72화
유리한은 엘던스 테레시가 권한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만물의 짓이에요.”
유리한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엘던스 테레시가 엉거주춤하게 멈춰 섰다.
“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엘던스 테레시가 들은 건 환청이 아니었다.
“만물의 짓이라고요.”
유리한이 친절하게 한 번 더 일러줬기 때문이다.
엘던스 테레시가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만요. 피해자 중에 만물의 마법사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시겠죠?”
“잊을 리가 없잖아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뛰어난 암기왕(A).
그에 따라 유리한은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런 그녀가 제게 유리한 정보를 잊거나 까먹을 리가 없었다.
엘던스 테레시는 유리한의 옆에 서있는 디에스 라고를 흘긋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물이 왜 자신들의 마법사를 그렇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저야 모르죠. 하지만 만물의 짓인 건 분명해요. 참상을 발견한 날에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었다든가 그런 소리는 못 들으셨나요?”
“들었습니다만…….”
엘던스 테레시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유리한 님. 그 정도야 마법사가 아니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죠.”
유리한이 엘던스의 말을 끊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건 마법사의 짓이었어요. 제가 봤거든요.”
“네……?”
봤다니? 저건 또 무슨 소리지?
엘던스 테레시가 당황하여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태양교의 신전이 무너져 있던 것도 확인했죠, 엘던스 테레시 씨?”
“네? 네, 확인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네네’ 같은 대답만 되풀이하는 앵무새가 돼버렸다.
엘던스 테레시가 멋쩍어져 목 언저리를 긁적일 때, 유리한이 그에게 물었다.
“에델라이어 주교는 찾았나요?”
“……!”
엘던스 테레시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43층에 있는 태양교의 신전.
그곳의 주인을 유리한이 알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왓, 더. 저 여자는 도대체 모르는 게 뭐지?’
엘던스 테레시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34층의 태양교 대신전 측에 연락을 넣어뒀으니 곧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알 수 없을걸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이미 죽었거든요.”
“네……?”
당황함도 잠시, 엘던스 테레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 죽었다는 거죠.”
유리한이 태연자약하게 말을 덧붙였다.
“에델라이어 주교가 만물의 마법사였어요. 제가 정체를 알게 되자 공격을 하더군요.”
“그런……!”
빈민가의 사람들이 말한 하늘을 뒤덮은 어둠은, 결국 만물의 마법사가 벌인 소행이었단 말인가?
그 전에 에델라이어 주교가 만물의 마법사였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경악스러운 정보가 연달아 쏟아지자 엘던스 테레시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걸 어떻게 정리해서 위에 보고하면 좋을지 암담하기도 했다.
반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 유리한은 태평했다.
에델라이어 주교의 몸을 하고 있었던 만물의 마법사, 사토 하루나는 죽어 없다.
즉,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제 말이 거짓임을 밝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자신에게 한없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유리한은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합니다. 만물의 마법사가 같은 만물의 마법사를 죽였다니요?”
“그게 왜 이상한데요?”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던스 테레시는 당황스러웠다.
그게 왜 이상하냐니?
만물은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대단한 곳이었다. 그런 그들이 서로를 죽였다니.
‘이해가 안 되잖아?’
하지만 유리한의 이어진 말에 엘던스 테레시는 제 생각을 고쳐야 했다.
“혼란과 격변의 시대에서는 말이에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게 흔했어요. 엘던스 테레시 씨에게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요.”
유리한의 말대로, 엘던스 테레시에게는 너무나도 허황된 이야기로 들렸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유리한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가족끼리도 그랬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들끼리는 어떻겠어요? ‘만물’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있기는 해도 결국 남인데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만물의 마법사가 왜.”
“여기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냐고요?”
엘던스 테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은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엘던스 테레시 씨가 만물에게 물어봐야죠. 과연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엘던스 테레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유리한이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모르쇠로 나올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물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청의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되레 이번 일을 가지고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제가 이번 참상에 대해 해줄 이야기는 이게 끝이에요. 궁금한 거 있어요?”
엘던스 테레시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한 가지 여쭤볼게요.”
“네? 무엇을…….”
여쭤본다는 건지, 엘던스 테레시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네 윗대가리분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죠?”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했다.
유리한이 비릿하게 웃음을 지으며 엘던스 테레시에게 다그쳐 물었다.
“나눌 수 있을 거야. 그렇죠?”
“그, 그게…….”
“제가 엘던스 테레시 씨와 연락하려고 찾아왔던 것 알죠? 근데 기사분들께서 막더라고요.”
그것을 직접 명령 내렸던 엘던스 테레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유리한은 속이 훤히 내다보이는 엘던스의 반응에 즐거워하며 말했다.
“이상했죠. 엘던스 테레시 씨는 저를 청의 기사단에 영입하고자 아래층에 내려간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직접 찾아왔는데도 연락을 피하다니?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윗분들이 시켜서 그런 거잖아요? 그쵸?”
엘던스 테레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엘던스는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으나, 그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 하나하나가 긍정의 대답이었다.
유리한이 선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좋게 말할 때 연락하세요. 날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
엘던스 테레시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 * *
54층, 청의 기사단의 본관 건물 회랑에서 한 남자가 고민에 잠긴 얼굴로 서있었다.
“라이? 라이!”
“아, 네. 단장님.”
남자의 이름은 라이 에스페란도. 청의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그를 부른 단장, 청예신이 웃는 낯으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봐? 몇 번이나 불러도 듣지를 못하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없고.”
청예신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우웅 진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이 에스페란도에게 걸려온 연락이었다. 라이 에스페란도가 청예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 청예신이 방긋 웃었다.
“편하게 받아봐.”
“네, 감사합니다.”
라이 에스페란도가 푸른색 제복 안쪽 주머니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우웅, 울리던 진동이 그의 손에 닿자 멈췄다. 곧이어 곤란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부단장님.
“무슨 일이지, 엘던스 테레시?”
- 그것이…….
엘던스 테레시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라이 에스페란도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엘던스 테레시?”
하지만 그의 부름에 답한 사람은 엘던스 테레시가 아니었다.
- 연결됐어요? 됐으면 저 좀 바꿔주세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 에스페란도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도대체 감히 누가 엘던스 테레시를 이용해 제게 연락을 취하는 건가 싶었다.
- 여보세요, 부단장님?
“누구인지 밝혀줬으면 하는데.”
- 유리한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 들어보셨죠?
라이 에스페란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청예신을 바라보았다.
청예신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랑 연결시켜 줄래, 라이?”
* * *
- 여보세요? 유리한 님 맞으십니까? 청의 기사단의 청예신이라고 합니다.
유리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그녀의 맞은편에 있던 엘던스 테레시가 숨을 들이켜 마셨다.
아무래도 유리한에게 인사를 건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유리한이 경직된 엘던스 테레시를 보며 입을 뻐금거렸다.
누군데요?
엘던스 테레시가 유리한의 입 모양을 읽고는 그 역시 입을 뻐금거리며 답해주었다.
단장님이요.
엘던스 테레시의 대답에 유리한이 활짝 웃었다.
단장님이라니! 정말 높은 분과 연결됐잖아?
유리한이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환하게 걸려있던 유리한의 웃음이 비딱해졌다.
- 저희가 지배 중인 43층에 올라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 죄송합니다만 유리한 님. 시험에 관해서는 청의 기사단 소속이 아닌 이상 아무것도 알려드릴 수 없답니다.
“그거야 모를 일이죠. 그리고 그 말, 청의 기사단에 입단하라는 권유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청예신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 하지만, 유리한 님. 저희 기사단에 입단할 생각 없지 않습니까?
이런, 들켰네.
유리한이 전혀 아쉽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쉽게도요.”
유리한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어 말했다.
“시험에 대해서는 43층의 지배자이신 엘던스 테레시 씨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게요.”
엘던스 테레시가 낭패 어린 얼굴을 보였다. 유리한과 대화 중인 청의 기사단의 단장, 청예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계속해서 청예신과 대화를 이어갔다.
“단장님, 따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답니다. 괜찮을까요?”
- 네, 당연히 괜찮죠. 무엇이든 편하게 여쭤보세요. 저희는 유리한 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고 싶거든요.
유리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엘던스 테레시가 놀라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디에스 라고가 그런 유리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리한은 그의 손등을 감싸 쥐고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유리한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 동생, 유지한을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