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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77)화 (77/235)

77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숨 쉬는 법을 잊어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서로의 숨이 맞닿는, 아주 짧은 간격. 바로 그 간격의 끝에 유리한이 보였다.

고요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은빛이 감도는 두 눈 역시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유리한이 뒷머리를 만지며 고요한에게 물었다.

“요한? 괜찮아요?”

“네? 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멍하니 유리한을 보고 있던 고요한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워낙 급하게 움직인 탓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조심해요, 요한.”

그런 고요한을 유리한이 붙잡아 주었다. 자신을 부축해 주는 손길에 고요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커다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웅얼거렸다.

“죄, 죄송해요, 유리한 씨…….”

“요한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저 망할 용이 문제지.”

유리한이 자신의 옷을 툭툭 털어내고는 니르로르를 노려봤다.

“짐은 잘못이 없느니라!”

“없기는 뭐가 없어! 내가 요한한테 무슨 일 있으면 혼난다고 했지?”

유리한에게 목덜미가 잡힌 니르로르가 뚱하게 말했다.

“하늘 머리 인간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만.”

“마법을 썼잖아, 마법을!!”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귀를 뜯어낼 듯이 쥐어 잡고는 흔들었다.

“마력 폭주라도 일으켰으면 어떻게 하려고!”

“짐은 위대한 드래곤이다! 설마 저 하늘 머리 인간의 마력을 짐이 조절해 주지 못했을 것 같으냐!”

“어이구, 그걸 말이라고!”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앙증맞은 머리통에 딱밤을 먹였다.

“아야! 유리한아, 지금 감히 짐을 때렸느냐?!”

“그래, 때렸다. 어쩔래? 같이 죽기도 했던 몸인데 때릴 수도 있지. 안 그래?”

니르로르가 붉은 눈을 부릅뜨고는 유리한을 노려봤다. 그래 봤자 아이가 보내는 토라진 시선. 유리한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일주일 동안 솜사탕 금지야.”

“……!”

아이의 붉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니르로르가 충격을 먹은 얼굴로 소리 질렀다.

“그러는 게 어디 있느냐, 유리한아! 솜사탕 없이 어떻게 살라고!”

“솜사탕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거든?”

“못 산다! 짐은 못 사느니라!”

“그럼, 한 달 동안 금지.”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유리한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망할 용한테서 고개를 돌린 채였다.

니르로르의 붉은 눈이 이번에는 고요한에게로 향했다. 애절하기 그지없었으나 고요한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티커 키코뉴 님이 잡혔습니다.]

[남은 플레이어, 1명.]

이번에는 유리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이 쫓고 있던 남자가 바로 티커 키코뉴였기 때문이었다.

니르로르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는데, 잡히고 말았다니?

“뭐야? 도대체 누가…….”

“즐거워 보이는군, 유리.”

“디에스!”

언제 왔는지 모를 디에스 라고가 손에 쥐 모양의 머리띠를 든 채로 말했다.

“드디어, 유리. 너와 동점이군. 나와의 내기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안 잊었지! 그보다 치사한 거 아니야?!”

“적반하장이다, 유리.”

디에스 라고가 웃었다.

“이제 한 명 남았군. 그럼, 나는 그 녀석을 잡으러 가보겠다. 내 소원을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군, 유리.”

“야! 디에스!!”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를 붙잡고자 했지만,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고요한이 물었다.

“유리한 씨, 내기라니요? 소원은 또 무슨 말인가요?”

“아아, 그거요.”

유리한이 목 언저리를 긁적이고는 목소리를 내었다.

“디에스랑 내기를 했거든요.”

“내기요?”

“네, 누가 더 도망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많이 잡나로요.”

“그럼, 소원은…….”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했어요. 이기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따라잡힌 건지!”

이게 다 저 망할 용 때문이다.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한 번 노려보고는 말했다.

“그럼, 저도 남은 한 명 잡으러 가볼게요. 조금만 저 망할 용용이랑 기다리고 있어줘요, 요한!”

유리한은 그 말만을 남기고서 빠르게 사라졌다.

분수대 앞에 홀로 남게 된 고요한이 두 눈을 낮게 내리깔았다.

디에스 라고가 이겼을 시, 유리한에게 무슨 소원을 빌까?

고요한은 어렵지 않게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에게 빌 소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버리자거나 그러지는 못할 거다.

‘유리한 씨가 화낼 테니까.’

그렇다면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에게 어떤 것을 바랄까?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자거나 그러겠지.’

다르게 말하면 데이트였다.

고요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니르로르 씨.”

- 왜 부르느냐, 짐을 도와주지 않은 하늘 머리 인간아.

어느새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온 니르로르가 잔뜩 불퉁한 얼굴로 고요한을 쳐다봤다.

고요한이 선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제 한 사람만 잡으면 된대요. 그래서 말인데, 그 한 사람. 우리가 잡지 않을래요?”

아니면 유리한 씨가 잡게끔 도와주거나.

고요한은 뒷말을 삼키고는 니르로르를 안아 들었다.

“같이 잡아주시면 유리한 씨 몰래 솜사탕 사드릴게요. 일주일 내도록 말이에요.”

- 하늘 머리 인간아, 짐은 위대한 드래곤이다.

니르로르가 그런 내가 네 말을 들어줄 것 같으냐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 그리고 솜사탕은 짐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지.

그러니 고요한을 도와주겠다는 소리였다.

고요한은 활짝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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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운]: 얘들아, 정말 아무도 없니? 나 혼자 남은 거야ㅠ?

[이지운] : 정말 그런 거니ㅠ?

유일한 생존자, 이지운.

그녀는 달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훌쩍였다.

수능이든, 자격증 시험이든 이지운은 단 한 번도 재수라거나 삼수를 한 적이 없었다.

탑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43층까지의 모든 시험을 승승장구하며 올라왔다.

그런데 43층!

바로 이곳에서 재수도 아니고 삼수 중이었다.

그리고 곧 삼수를 실패해 사수에 도전하게 될 거라는 것을, 이지운은 어림잡아 짐직했다.

“내 인생 왜 이래…….”

43층에 올라온 지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갔다.

첫 번째 시험은 지금과 같이 도망치는 쪽이었다. 문제는, 술래. 저를 잡으려 드는 플레이어가 소문이 자자했던 슈퍼루키였다는 것.

그는 지금보다 더 빠르게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을 잡아 시험을 통과해 버렸었다.

그렇게 다시 도전한 시험에서는.

‘술래였지.’

슈퍼루키처럼 저도 열심히 플레이어들을 붙잡고자 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은신의 달인들뿐이었다.

더욱이 술래들끼리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저들끼리 잘해보겠다고 되도 않는 분열이 생기고 말았었다.

결국, 또 실패하여 세 번째 시험을 치르게 됐건만.

‘술래가 유리한이랑 디에스 라고라니! 왜 하필 그 두 사람이냐고!’

탑의 거주민이었다는 혼혈과 웬 드래곤도 한 팀이라고 들었다.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만으로도 벅찬데, 한 사람과 한 파충류의 눈을 피해서도 도망가야 하다니.

“기구한 내 인생.”

이지운은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그녀는 시험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남은 시간은 10여 분 남짓.

그동안 이지운은 이곳, 플레이어들을 위한 안내소에서 숨을 죽이고 있기로 했다.

무작정 몸을 숨기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제발, 분신들아! 조금만 시간을 벌어줘!’

이지운은 가지고 있는 스킬, ‘어수선한 분신(A)’을 통해 일곱의 분신을 만들어 냈다.

지금쯤 43층의 곳곳에서 술래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을 것이다.

[일곱의 분신 중 하나가 찬란히 부서졌습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이지운이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섯의 분신 중 하나가 찬란히 부서졌습니다,]

“어?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지운이 당황하는 사이, 다섯의 분신 중 하나가 또 사라졌다.

이제 남은 분신은 넷.

이지운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시험이 종료되기까지 이제 5분.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지운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보였다.

[넷의 분신 중 하나가 찬란히 부서졌습니다.]

아무래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넷에 이어 셋, 셋에 이어 둘, 그리고 하나.

[마지막 분신이 찬란히 부서졌습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진 제 분신들에 이지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괴물들.”

분신이라고 해도 레벨 45인 자신과 똑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이렇게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다니.

이지운은 5분 남짓한 시간을 확인하고는 무릎 위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냥 운에 맡겨야겠다. 분신을 만들어 낼 마력도 없어.’

라고 이지운이 생각할 때였다.

콰과광―!

그녀가 숨어있던 플레이어들을 위한 안내소의 양 벽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지운이 놀라 허둥거리는 찰나.

“디에스?”

“유리?”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가 서로 반대쪽 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우리 동시에 찾은 거야? 이거 곤란한데.”

“그러게 말이다. 유리, 혹시 나에게 저 녀석을 양보해 줄 생각 없나?”

“응, 없어.”

유리한이 창을 꺼내 들었다. 디에스 라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당장에라도 전투를 치를 듯, 서로를 향해 겨누었다.

그들 사이에 낀 이지운은 얼떨떨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아니, 왜 당신들끼리 싸우려고 하는 거야?’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래도 도망갈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았다. 이지운은 슬금슬금 다리를 움직였다.

- 찾았느니라, 하늘 머리 인간아!

하지만 하늘은 이지운을 도와주지 않았다. 난데없이 창문이 깨지더니, 분홍 젤리가 그녀의 이마를 꾹 눌러버린 거다.

앙증맞은 드래곤은 이지운이 머리에 쓰고 있던 쥐 모양의 머리띠를 그대로 벗겨버렸다.

- 하하하! 하늘 머리 인간아, 이게 바로 짐의 위대함이다! 약속 꼭 지키도록 하거라!

웬 날개 달린 파충류의 의기양양한 외침에 이지운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니르로르? 너는 또 왜 여기 있는 거야?!”

“젠장, 저 망할 용이……!”

“니르로르 씨! 혼자서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허탈해하는 이지운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지운 님이 잡혔습니다.]

[축하합니다, ‘술래’인 유리한 님의 팀이 승리했습니다!]

보름달이 떠오른 늦은 밤.

어쨌거나 유리한은 43층의 시험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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