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설영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어젯밤, 왜 안 찾아왔느냐니?
‘무슨 소리지?’
저와 유리한은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그 순간 떠오른 기억.
“그 차림새로 손님들을 만나 뵈러 갈 생각이셨던 건 아니겠지요, 궁주님?”
“그 입,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지난밤, 자신은 한이연의 눈을 피해 유리한과 그 일행을 만나러 가려고 했었다.
실패했었지만.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설영이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분명, 그때 주변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없었다.
‘아니었던가?’
인기척을 느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드는 주술에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던지라 기억이 분명하지 못했다.
“너는, 도대체…….”
설영이 더듬더듬 목소리를 내뱉을 때였다. 한이연이 유리한의 손아귀에서 그녀를 떼어냈다.
“궁주님!”
설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설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으니 이 더러운 손을 떼라고 하기에는…….
“오늘, 창문 열어두세요.”
유리한의 나긋한 목소리가 마음속 깊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닿은 목소리.
설영의 미간이 살포시 좁혀졌다. 유리한은 싱긋 웃었다. 한이연은 그 얼굴을 보지 못하고서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유리한 님, 정말 죄송합니다. 궁주님께서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물론이죠.”
그렇게 한이연이 설영을 데리고 떠나자마자 고요한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유리한에게 물었다.
“유리한 씨,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정말이세요?”
“네, 정말로요.”
유리한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활짝 웃어 보였다. 니르로르가 그녀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는 물었다.
- 유리한아, 북해빙궁의 주인 되는 여자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온 것이냐?
“비슷해.”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다. 다만, 끈 떨어진 인형과도 같은 모습에 화가 난 것뿐이었다.
‘지한이가 저랬지.’
유지한은 세뇌를 당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된 실험으로 목각 인형과도 다름없이 변해버렸다.
그래서 설영에게 그런 거였다.
유리한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갈 때, 디에스 라고가 물었다.
“유리, 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궁주에게 시비를 건 건 아니겠지.”
“정답.”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다들 잘 들어.”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쫑긋 귀를 세웠다. 유리한은 딸기 하나를 콕 집고는 말했다.
“이곳은 지금 만물의 마법사들에게 장악된 상태야.”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만물(萬物).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이름이었다. 이제 지겨울 지경. 그건 유리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집어 든 딸기를 우물거리고는 말했다.
“이곳에 몇 명의 마법사가 있는지는 몰라. 한 명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빌어먹을 자식들이 이곳, 44층의 주요 무대인 북해빙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유리한이 입매를 비틀고는 말을 덧붙였다.
“만물이 노리는 건 ‘만년빙정’이라는 북해빙궁의 보물이라고 해.”
“유리, 네가 잡화점의 주인에게 물어봤던 물건이군.”
“응, 그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서 말이야. 다만 만물이 왜 그 보물을 노리는 건지는 알고 있어.”
70층 공략.
만물은 그것을 위해 북해빙궁을 장악한 것이 분명했다.
‘북해빙궁의 보물을 이미 손에 넣었다고 하더니.’
청예신은 분명 그랬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받았던 보고는 만물이 북해빙궁의 보물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고.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지.’
유리한이 심드렁한 얼굴을 보였다. 그때 디에스 라고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뭐지?”
유리한이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듯이 비딱하게 웃었다.
“당연히 이곳을 장악한 만물을 처리하는 거지.”
“그래도 될까요?”
고요한이 걱정된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야, 만물의 마법사들이 이곳을 차지한 건 70층 공략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나?
그들을 처리하면 70층 공략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할 터.
고요한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70층 공략에 앞장서고 있는 분들께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요.”
“불만 있으면 찾아오라고 해요.”
유리한이 의자 위에서 불량스레 자세를 취하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예상하는 건데, 70층 공략에 앞장서고 있는 플레이어들 중 저를 찾아올 녀석은 한 명도 없을걸요?”
죽고 싶지 않다면야 저를 찾아올 리가 없었다.
‘내가 찾아간다면 몰라.’
그러니까.
“요한은 아무 걱정 마세요. 70층 공략이 걱정되는 거라면…….”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머지않아 제가 공략할 테니까요.”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 * *
탁,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 위로 그 못지않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나 참, 궁주님. 귀한 손님분들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특히나 유리한, 그 여자는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단 말입니다.”
설영은 조용히 한이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아니, 그녀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서 한 귀로 흘렸다.
한이연,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네크로맨서 리신의 세뇌 탓에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고 있던 설영이 돌연 입을 열었다.
“창문…….”
“네?”
“창문, 열어놓고 가줘.”
“허어.”
한이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설영이 원하는 대로 창문을 열었다.
후웅, 불어온 겨울바람에 설영의 두 뺨이 곧장 붉어졌다.
한이연이 붉어진 여자의 얼굴에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감기에 걸려 뒈지고 싶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궁주님.”
한이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다소 멍해 보이는 설영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만년빙정, 그것의 행방을 저희한테 알려주실 때까지는 돌아가시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
설영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보이는 모습. 한이연은 짧게 혀를 차고는 그녀의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반쯤 열려있던 창문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 움직임이 멈췄을 때.
“창문 열어두셨네요?”
유리한이 설영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싱긋 웃는 얼굴에, 초점이 흐릿하던 설영의 두 눈에 이채가 가득 서렸다.
“유리한.”
“네, 맞아요. 제 이름 기억해 주셨네요? 감사해라.”
유리한이 키득거리고는 설영의 방 안으로 가볍게 발을 디뎠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볼게요.”
설영이 무엇이든 물어보란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에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제 앞에 계신 궁주님께서는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계시는 설영 님이 맞으신가요?”
“맞아.”
단호하면서도 선명한 목소리.
“나는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 북해빙궁의 주인, 설영이다.”
설영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유리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요.”
유리한이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럼, 현재 북해빙궁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 좀 나눠볼까요?”
“그 전에 나 역시 네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무엇을요?”
되묻는 말에 설영이 얼굴을 굳히고는 유리한에게 물었다.
“청예신, 그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야 친분이 있는 분이니까요.”
“친분이라니?”
“설영, 당신이 청예신 씨의 따님이신 것을 알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는 말이죠.”
물론 유리한은 청예신과 그 정도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 사람은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어쨌거나 유리한이 덧붙인 말에 설영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머니께서 나를 부탁했나?”
“그건 아니에요.”
아쉬운 기색이 설영의 얼굴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당신 어머니께서 저한테 부탁하신 일은 44층에 있는 만물의 마법사들을 처치해 달라는 거였어요.”
이어진 말에 설영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머니께서……?”
“네, 못 믿겠다고 해도 별수 없어요.”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저를 막으실 생각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 나 역시 네게 어머니와 같은 일을 부탁하려고 했으니.”
‘흐음.’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밤, 그녀가 찾아오려고 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나?
“그런데 궁주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정신을 붙잡고 계신 건가요?”
“어머니.”
“네?”
난데없이 어머니라니?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뇌를 당하기 전, 어머니 이름을 몇 번이고 외웠거든. 나를 구해주러 오셨을 때 알아보지 못하면 안 되니까.”
설영이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유리한은 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예신 씨의 출입은 막혀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내가 어머니의 출입을 막아뒀지. 이곳에 오시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외워버린 거야.”
설영이 일그러진 미소를 입가에 내걸며 중얼거렸다.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아주 힘없이.
“어머니라면 어떻게든 나를 구하러 오실 거라고. 그분의 사람들이 이곳을 들락날락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거든.”
모두 죽어버렸지만.
나지막하게 덧붙인 목소리에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청예신 씨의 기사들이 모두 죽어버렸다니?”
그러자 설영이 되물었다.
“이곳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 안 들었어?”
“물론 들었죠. 하지만 모두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한이연 씨 말로는.
덧붙여진 이름에 설영이 키득거렸다. 다소 신경질적인 웃음소리였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네?”
“제가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저를 놀리는 목소리에도 유리한은 태연했다. 설영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입을 열었다.
“뭐, 반쯤은 맞아.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는 했지. 죽은 몸 그대로 말이야.”
설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유리한. 나 역시 부탁할게.”
짓씹듯이 억눌린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마법사인지 뭔지, 내 사람들을 죽여버린 그 작자들 모두 죽여줘.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니.”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잘 버티고 있으면서.”
“아니.”
설영이 다시 자조적으로 웃고는 목깃을 젖혔다.
“나는 얼마 못 버텨, 유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