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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91)화 (91/235)

91화 

* * *

시스템 메시지가 뜨기 몇 분 전.

“빌어먹을 새끼야! 작작 하고 모습을 드러내!!”

유리한은 피로 얼룩진 눈밭 한가운데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한이연은, 아니, 그의 몸을 조종하고 있던 네크로맨서는 절대로 제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란 것을.

‘망할!’

유리한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 주위로는 두 눈을 뒤집어 깐 시체가 즐비했다.

손에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 그뿐일까? 검푸르게 변한 피부가 한눈에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유리한이 가볍게 혀를 찼다.

냉기 저항이 있었더라면 이 꼴이 되지 않았겠지만, 가지고 있는 건 열기 저항이었다.

화염 저항도 있고, 바람 저항에 중력 저항도 있는데 왜 냉기 저항이 없는 걸까?

던져봤자 대답이 없을 질문.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유리한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영의 두 눈은 여전히 빛을 잃은 상태.

다만, 고운 손에는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유리한, 그녀의 목을 향해 치켜올려진 채로 말이다.

당장에라도 제 목을 파고들 것처럼 보이는 것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뭐, 청예신 씨가 사지 멀쩡하게 구해 달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으득, 그녀는 이를 한 번 갈고는 설영을 향해 땅을 박차고 나갔다. 설영의 곁을 지키고 있던 시체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유리한은 가볍게 단검을 휘둘러 그들의 경동맥을 끊었다. 자기 몸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지 모를 신기한 상태다.

‘시간이 별로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완전히 못 쓰게 될 터. 유리한은 그 전에 어떻게든 설영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유리한이 단검을 고쳐 잡고 설영의 품을 파고들 때였다.

[Hello, Players?]

시스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리한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시스템의 일방적인 메시지.

[안녕하십니까, 44층의 플레이어 여러분. 좋은 하루 보내고 있습니까?]

보내고 있을 것 같냐?

유리한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며 걸음을 뒤로 물렀다. 간발의 차로 설영의 검이 휘둘러졌다. 베어진 허공에서 얼어붙은 공기가 아래로 투둑 떨어졌다.

‘베이면 뼈도 못 추리겠네.’

유리한은 설영의 공격에 대비하며 눈앞에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에 집중했다.

[제가 이렇게 플레이어 여러분을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44층의 시험 때문입니다.]

“44층의 시험 때문이라고?”

유리한은 넋 나간 얼굴의 설영을 쳐다봤다. 그녀를 향한 시선 위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현재 44층의 지배자, ‘설영’은 시험을 주관할 수 없는 상태. 그 때문에 44층의 시험에 개입하기로 했습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봐도 시스템이 정상적인 시험을 주관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시험은 44층의 모든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치러지는 ‘특별 시험’입니다.]

[그럼, 44층의 지배자인 ‘설영’을 대신해 플레이어 여러분께 시험을 내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Test Open!]

[주어진 시간 동안 북해빙궁의 보물, ‘만년빙정’을 부서뜨려 주십시오.]

[보물을 부서뜨리지 않으면 44층의 모든 생명체는 죽습니다.]

유리한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단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만년빙정’은 설영과 한 몸이 된 상태. 그러니까 북해빙궁의 주인, 청예신의 딸인 설영을 죽이라는 소리였다.

유리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장난해……?”

내뱉어진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동요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시험은 시작되고 말았다.

[00:29:59]

허공에 붉은 숫자가 그려졌다.

눈보라가 점점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유리한은 소리 질렀다.

“장난하냐고!”

그녀의 성난 목소리는 설영에게 닿지 못했다. 설영은 그저 유리한 쪽으로 검을 치켜들었을 뿐.

애초에 유리한은 설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것이 아니었다.

눈보라가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처럼 세차게 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유리한이 이를 갈았다.

시스템이 주관한 44층의 시험.

통과를 위해서는 설영을 죽여야 한다.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죽을 거란다.

“염치없지만 다시 한번 더 부탁드립니다. 44층에서 제 딸아이를 가지고 놀고 있는 그 빌어먹을 마법사들을 처치해 주십시오.”

청예신이 부탁한 그녀의 딸을, 죽여야 한다는 소리.

청예신은 빌어먹을 마법사들을 처치해 달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바람은 하나였다.

설영, 제 딸아이의 무사.

그 목숨을 유리한은 제 손으로 거두게 되었다.

“하하…….”

어쩜 이렇게 무력할 수 있을까?

유리한이 실소를 흘렸다.

튜토리얼 때도, 그것이 끝난 세상에서도 저는 시스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빌어먹을.”

유리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그녀는 보았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여자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죽여.

그 한 마디를, 유리한은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구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한 유리한은 얼어붙은 손을 움직였다.

검을 쥔 채 그녀는 설영의 품을 파고들고선 망설임 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 * *

챙그랑―!

날아간 검이 흙바닥에 처박혔다.

“아이고…….”

연무장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엘던스 테레시가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니, 엘던스?”

엘던스와 대련 중이던 청예신이 손을 내밀었다. 엘던스가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 괜찮습니다.”

쥐고 있던 검은 깔끔하게 두 동강 나버렸다.

청예신이 그것을 보고선 말했다.

“이런, 새로 하나 맞춰줄게.”

“아닙니다, 단장님. 어차피 대련용 검이었으니까요. 그보다 43층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고 계셔도 괜찮습니까?”

엘던스 테레시가 청예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층의 일은 라이에게 맡기고 있으니까 괜찮아. 솔직히 라이가 나보다 더 행정 업무를 잘 보지 않니?”

“하,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에 청예신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인정하나 보구나?”

“아니요, 아닙니다!”

엘던스 테레시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청예신은 알기 쉬운 부하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후웅, 불어오는 바람에서 한기를 느낀 건 그때였다.

청예신이 연무장 바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춥구나.”

“인제 겨울이니까요.”

“그래…….”

청예신이 겨울과 참 닮았던 아이를 떠올리고는 미소를 그렸다.

“겨울이구나.”

* * *

고운 손에서 떨어진 검이 쌓인 눈 위에 처박혔다. 설영의 몸이 힘없이 기울어졌다.

그녀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은 여자가 황급히 설영을 부축했다.

“어머니…….”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몸이 살짝 떨렸다. 설영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여자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인제 정신을 좀 차렸나 봐요? 조금 더 일찍 차렸으면 좋았을 텐데.”

자조 섞인 목소리를 무시하며 설영은 다시금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셔?”

“아래층에 계시죠.”

아무렇지 않은 척, 간결하게 내뱉은 목소리. 설영은 그녀의 말을 읊조렸다.

“아래층…….”

그래… 볼 수 없구나. 하긴… 내가 그분의 출입을 막았는데… 어떻게 볼 수 있겠어…….

띄엄띄엄 말을 내뱉던 설영이 저를 안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나도 너희와 똑같았다면 이런 끝은 아니었겠지?”

어머니와 함께 탑을 오를 수 있었을 거다. 그분의 곁에서 검을 들고 함께 싸울 수 있었을 거다.

“그거야 모르죠.”

여자는 이번에도 태연하게 설영의 말에 대꾸했다.

그녀의 가슴팍을 적시고 있는 붉은 피를 보는 두 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세차게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점점 잦아드는 가운데 설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분께 약점이 될까 무서웠어.”

그래서 청예신의 44층 출입을 막았던 거다.

설영을 위해 이 마을을 떠나기를 주저하기도 했던 여인이니까.

제가 위험에 처한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저버리고 달려올 게 뻔했다.

그래서 말했다.

“어머니, 더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북해빙궁주로서 여행객인 당신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울지 못해 일그러뜨린 미소를 내보이며 그렇게 말했을 때, 저의 울타리가 되어줬던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궁주. 하지만 제 기사들의 출입은 금하지 마세요.”

울지 못해 웃는 낯으로.

“궁주께서 얼마나 훌륭하게 자라셨는지, 얼마나 훌륭하게 북해빙궁을 이끌어 가시는지 볼 수 없으니 듣기라도 하고 싶거든요.”

그러니 제 기사들의 출입은 막지 말아 달라며 그녀는 바랐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며 설영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또르륵,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내뱉는 숨 하나하나가 벅차기 시작했다. 설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뒷말을 꾹 삼키며 설영은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완전히 멎은 눈 위로 찬란하게 해가 드리웠다.

설영을 품에 안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플레이어 여러분에게 45층을 오르는 자격을 물었던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합격자는 유리한 외 서른네 명.]

[축하합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가 저를 꼭 놀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제 품에서 숨을 거둔 설영을 꼭 끌어안았다. 핏방울이 맺힐 만큼 입술을 꼭 깨물며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을 구했고, 또 수없이 잃었다.

그만큼 저 스스로를 죽이고픈 이 감정도 금방 수그러들 것이리라.

‘하지만.’

한심했다.

구할 수 있었는데도 시스템의 농간으로 구하지 못한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데도 참으로 한심했다.

“유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제 품에 안겨있던 설영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정했어, 내 소원.”

오직, 제 가족을 생각하면서 오르고 있던 탑.

소원 따윈 없이, 가족의 행복을 비는 것만이 전부였던 유리한이 이를 악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부술 거야, 이 탑.”

탑의 가장 높은 곳, 모든 것의 주인을 향한 선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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