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 *
달이 떠오른 늦은 밤.
“조용하네.”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바깥으로 나온 참이었다.
- 유리한아, 솜사탕이 먹고 싶으니라. 이 마을에 솜사탕은 없는 것이냐?
니르로르와 함께 말이다.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니르로르의 목덜미를 잡았다.
“솜사탕은 다음 층에 올라가서 사줄게. 여기엔 없는 것 같거든.”
- 그렇다면 달고나인가, 그것이 먹고 싶도다.
“그것도 다음 층에서 사줄게.”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무시하고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 어디에도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때문인가?’
지붕 위에 앉아있던 유리한이 제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제 목숨을 두고 시험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흐음.”
혈맹의 맹주, 랴오륭.
설마, 혈맹을 이끌고 있는 플레이어가 이곳에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다.
원래 유리한은 49층을 지배하고 있는 혈맹의 조직원을 찾아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맹주라니.
‘가볍게 이야기는 못 나누겠지?’
유리한은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타닷, 제가 앉아있는 지붕에 낯익은 객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유리한이 손님을 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서문기율 씨?”
“안녕하십니까, 유리한 씨.”
서문기율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였다. 유리한은 싱긋 웃는 낯으로 물었다.
“이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서문기율은 말없이 유리한을 바라보았다. 침묵 어린 시선에 그녀가 고개를 기울일 때.
“…마을을 떠날 생각이라면, 이곳에 대한 건 함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문기율이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들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건, 곧 여기를 보호하고 있는 수호진의 암호를 안다는 소리겠지요. 아닙니까?”
“맞아요.”
유리한이 정답이라면서 짓궂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간결한 대답에 서문기율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말했다.
“그러니 수호진에 대한 것을 함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싫다면요?”
“그렇다면…….”
서문기율이 검을 꺼내 들었다.
“당신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겠지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입니다.”
척, 저를 향해 날 선 것을 치켜든 모습에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뭐, 좋아요.”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그와 똑같이 검을 꺼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막아보세요. 막을 수 있다면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짓고는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제 앞에 당도한 그녀의 모습에 서문기율이 황급히 걸음을 뒤로 물렀다.
‘빠르다……!’
후웅, 검이 가른 허공에 바람이 일었다. 서문기율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검을 고쳐잡았다.
그는 유리한에게서 빈틈을 찾고자 했다.
제게 다가서자마자 휘두른 검이지 않나? 분명 허물어진 곳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
파고들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뭐 찾아요? 약점?”
“……!”
서문기율이 궤적을 그린 검날을 가까스로 막아내자 유리한은 막힌 검의 궤도를 수정했다.
챙, 채앵―!
서문기율은 막았고, 유리한은 공격했다.
‘젠장.’
서문기율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막아낼수록 몸이 뒤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치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윽!”
날아든 검을 쳐내자마자 발길질이 찾아들었다. 복부를 걷어차인 서문기율은 그대로 지붕 위를 구르고 말았다.
“쿨럭……!”
그가 기침을 한 번 토해내고는 여자를 노려봤다. 유리한은 그가 쳐낸 제 검을 잡으며 미소를 그렸다.
그녀와 달리 서문기율의 얼굴은 음식물 쓰레기라도 삼킨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보지 못했다. 도대체 왜?’
저를 향해 날아든 검을 피한 건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공격, 유리한이 제 복부를 걷어차는 그 움직임은 좇지 못했다.
‘도대체 왜!’
라펠과 프엉은 말했다.
유리한은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옛 시대를 끝낸 영웅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저와 같이 탑을 오르는 처지이지 않나?
‘유리한 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저 생명체의 힘인가?’
아니었다.
니르로르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투 상황을 그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서문기율의 의문을 어떻게 알았는지,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하죠? 당신이나 저나 가지고 있는 스탯 능력치가 비슷할 텐데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는 이유가요.”
더욱이 서문기율은 온 탑에서 슈퍼루키라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플레이어.
이렇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건 처음일 게 분명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문기율은 분하다는 얼굴로 유리한에게 물었다.
“…차이가 있나 봅니다?”
“있죠.”
유리한이 검을 제 어깨에 걸치고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르쳐드릴까요?”
“가르쳐주신다면 감사히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때는 놀리지 말라면서 달려들어야 하지 않나? 정말이지, 눈앞의 남자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유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가볍게 검을 고쳐 쥐었다.
“경험이요.”
“네?”
“경험에서 차이가 난다고요.”
척, 유리한이 서문기율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남을 죽이는 경험도, 죽임당할 위험에 처하는 경험도 월등히 제가 많거든요.”
또한, 남을 구하는 경험까지도 말이다.
‘그 실패의 경험 역시 내가 훨씬 많지.’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 그때는 이곳의 탑처럼 ‘지배자’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살아남기 위해 죽여야 했고,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길러야 했다. 그렇게 기른 힘으로 저뿐만이 아니라 제 소중한 사람도 지켜야 했다.
유리한은 그렇게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에서 살아남았다.
서문기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목소리를 낸 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경험, 이번 기회에 메꾸면 되겠군요.”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래?
유리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서문기율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저는 유리한, 당신을 어떻게든 죽여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를 죽이고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허, 유리한이 실소를 흘렸다.
“그 말, 진심이세요?”
“네, 진심입니다. 어차피 당신은 저를 죽일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유리한은 서문기율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기꺼이 그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 * *
채앵―!
날아간 검이 지붕 위에 꽂혔다.
검을 놓친 서문기율이 쌕쌕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직입니다.”
“아직은 무슨.”
유리한이 서 있는 것이 고작인 서문기율의 어깨를 밀어 그를 쓰러뜨렸다.
힘없이 바닥에 드러누운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있잖아요, 서문기율 씨. 사람이 왜 그렇게 끈질겨요? 포기할 줄도 알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에요.”
“제 사전에 포기란 없습니다.”
서문기율이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더 가지요.”
유리한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
해가 진 지 오래였던 늦은 밤이었는데, 어느새 어렴풋이 여명이 찾아드는 중이었다.
그들의 공방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니르로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유리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까지 하죠? 서문기율 씨, 그러다 쓰러져요.”
“안 쓰러집니다. 저는 이 탑에 들어온 후 단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쓰러져 보면 되겠네요.
유리한이 뒷말을 삼키고 주먹을 쥘 때였다.
“레오?”
서문기율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제 오후, 그와 언쟁을 벌였던 동료 레오 알버스가 마을을 나가고 있었다.
서문기율이 미간을 좁혔다.
“이 시간에 왜…….”
“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유리한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나는 알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분께서 어디에 가시는지 알 것 같다는 소리죠.”
서문기율이 얼굴을 굳혔다. 유리한은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서문기율 씨, 원래 몇 명의 동료와 함께 탑을 오르고 있었나요? 이렇게 적지 않았을 거 같은데.”
서문기율이 우물쭈물 목소리를 내뱉었다.
“열은 훌쩍 넘었습니다.”
하긴, 그럴 것 같았다.
서문기율은 올곧은 사람이었다. 가진 신념이 뚜렷하다는 말. 그런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모여든 사람이 많았을 거다.
더욱이 강하지 않나?
‘자신의 리더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서문기율의 신념은 너무나도 올곧았다. 그에 동료가 한 명씩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을 거다.
조금 전에 마을을 나간 바로 저 남자처럼.
“서문기율 씨, 저 사람도 수호진의 암호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서문기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배신하지 않을 거란 보장 있어요? 없을 텐데?”
그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야 마을을 떠나버린 제 동료는 현 상황에 굉장히 큰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배신을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
서문기율이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핏줄이 설 만큼 꽉 쥔 손을 보며 유리한이 말했다.
“따라오세요.”
“네?”
“따라오라고요. 저 사람, 수호진의 암호를 알고 있다면서요? 처리하러 가야죠.”
처리라니!
서문기율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저를 배신한다고 해도 함께 탑을 오르던 동료였다. 죽이는 건 절대로 안 됐다.
그에 유리한이 웃음을 흘렸다.
“꼭 죽여야만 처리가 되나요?”
유리한이 재미있는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실실거리며 말했다.
“서문기율 씨, 선배 플레이어로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드릴게요.”
“네……?”
서문기율이 얼빠진 얼굴을 보였다. 반면 유리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제가 누구 가르치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영광으로 아세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서문기율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