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서문기율의 동료, 레오 알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태초의 마을’이라고 알려진 수인족의 마을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수호진 때문이겠지.’
먼 옛날, 위대한 마법사가 수인족의 도움을 받은 데에 대한 보답으로 그려놓고 갔다는 마법진.
태초의 마을은 오직, 암호를 통해서만 마법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레오 알버스는 지금.
“후우…….”
침입자들에게 암호에 대해 알려주려고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배신이었다.
‘어쩔 수 없어.’
49층에 묶이게 된 지도 어느새 1년째였다.
이 층에 다다르기 전, 어떤 시험이든 한 달도 되지 않아 서문기율과 함게 통과했던 그였다.
그런데 수호자를 선택하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49층에 묶일 줄 알았다면 서문기율을 진작 배신했으리라.
‘무엇보다 노예로 잡혀있는 수인족 녀석들을 구하겠다니!’
마을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너무 큰 욕심이었다.
그렇기에 레오 알버스는 서문기율을 배신하기로 했다. 그의 다른 동료가 그랬던 것처럼.
“보자, 만나기로 한 곳이…….”
레오 알버스가 주위를 살폈다.
그는 서문기율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수인족이 노예로 잡혀있다는 곳을 탐방하러 갔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침입자와 몰래 거래를 했었다.
태초의 마을을 지키고 있는 수호진의 암호를 알려줄 테니 자신을 침입자로 받아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레오 알버스가 만나기로 한 침입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후욱, 주위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뭐, 뭐야?”
레오 알버스가 잔뜩 당황한 얼굴을 보일 때였다.
“안녕하세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 알버스는 흠칫, 몸을 떨고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두 손에 쥐어진 차크라를 보자 그에게 인사한 불청객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함부로 저한테 던지지 않기를 추천할게요. 제가 평화주의자거든요.”
“평화주의자고 자시고 당신 뭐야?! 당신이 이 공간을 만들었지?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없애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았다가는……!”
“어떻게 되는데요?”
따악,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주위를 휘감고 있던 어둠이 조금 옅어졌다.
그와 함께 레오 알버스는 제게 인사했던 불청객의 얼굴을 보게 됐다.
“…유리한?”
레오 알버스가 두 눈을 살짝 떨었다.
“거짓말.”
레오는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자가 환상이라도 되는 듯 두 눈을 뻑뻑 닦아냈다.
- 유리한아, 저 인간이 네가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구나.
“그러게.”
유리한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서문기율 씨, 나와서 레오 알버스에게 말해주지 그래요? 저는 환상이 아니라고.”
유리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기율!”
“레오 알버스.”
서문기율이 레오 알버스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곳에는 왜 온 겁니까?”
들려온 질문에 레오 알버스가 얼굴을 굳혔다. 이내 그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글쎄, 내가 왜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레오!”
서문기율이 이를 으득 갈았다.
“배신하는 겁니까?”
“한두 번 배신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상처받은 얼굴이야?”
레오 알버스가 히죽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곧 험상궂게 구겨졌다.
“네 같잖은 영웅심에 어울려 준다고 이곳에서 벌써 1년이나 썩었어! 알아?!”
“…저는.”
“네가 침입자가 되기를 선택하기만 했어도 내가 이런 곳에서 썩지는 않았을 거야! 네 잘못이라고!”
빽빽 지르는 목소리에 서문기율은 입을 다물었다. 죄책감 어린 얼굴에 유리한이 짧게 혀를 찼다.
‘애가 왜 저리 유약하담?’
슈퍼루키라고 하더니, 그 별명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여린 녀석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거지만.’
제가 강한 걸 알고 있음에도 그 힘을 약자를 위해 쓰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그러니 유리한은 서문기율이 마음에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주 보듯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것도 모를 만큼 말이다.
“자자, 어쨌든 당신은 서문기율 씨를 배신했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쩔 건데?”
“글쎄요, 그건 제가 아니라 서문기율 씨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죠.”
흠칫, 서문기율이 몸을 떨고는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자, 서문기율 씨. 어떻게 할래요? 이분을 그대로 내보낼래요? 아님, 대화를 나눠볼래요?”
서문기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리한이 말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주겠다고.
그런데 제게 저런 선택지를 밀어놓다니.
서문기율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 * *
“디에스 씨, 주무세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요한은 몇 번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텅 비어있는 침대가 보였다. 유리한의 침대였다.
서문기율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리한의 일행에게 방 하나만 안내해 줬다.
고요한은 기겁했지만 유리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중앙 침대는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했을 뿐.
하지만 지금 그녀는 침대를 비운 상태였다.
‘어디를 가신 걸까?’
자신들 몰래 나가고자 하는 것 같아 고요한은 조용히 잠든 척을 했었더란다.
‘평소에도 밖에 볼일이 있다며 나가곤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 ‘볼일’을 처리하러 가는 줄 알았더니만 유리한은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되겠어.’
고요한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렇게 방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유리를 찾으러 나갈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깨어있었어요?”
“그래.”
디에스 라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녀석이랑 말을 섞는 게 싫어 잠든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말을 왜 저렇게 한담?
고요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유리는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 거다. 이 마을에 있는 플레이어한테 관심이 있는 모양이더군.”
고요한의 귀에는 마지막 문장만 들렸다.
“관심이요? 유리한 씨가 누구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멍한 물음에 디에스 라고는 친절하게 다시금 알려줬다.
“이 마을에 있는 플레이어한테.”
이곳에서 만난 플레이어라면 한 사람뿐이었다.
서문기율.
한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 그였는데 어떻게 유리한의 관심을 끌게 된 걸까?
‘유리한 씨가 그분께 마음이라도 준다면, 나는……!’
고요한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리한이 서문기율에게 보이는 ‘관심’은 흥미 위주의 것이었으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고요한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나중에 그분과 이곳에서 식을 올린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건만 그는 초조해하며 걱정했다.
쿵쿵쿵!
밤을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고요한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누구세요?”
묻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인간들!!”
들어온 사람은 네쥬였다. 네쥬가 희게 질린 얼굴로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에게 물었다.
“서문기율, 그 자식 못 봤어?”
“그 녀석이라면 유리와 대화 중일 거다.”
“유리가 누구인데? 너희랑 같이 온 여자?”
“그래.”
그 말에 네쥬가 황급히 비어있는 침대를 쳐다봤다.
“아니야…….”
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곧이어 네쥬는 버럭 소리 질렀다.
“서문기율이 사라졌다고! 마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다급한 외침에 디에스 라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문기율이 마을에서 사라졌다니? 유리는 분명 그와 이야기를 나누러 나갔을 텐데?
‘설마…….’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유리한은 말했었다.
“왜? 당연히 수인족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디에스 라고는 그녀가 당연히 수호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가 아는 유리한은 강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다.
‘유리도 변한 건가.’
사람의 본질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리한은 이 탑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
더욱이 30년 전, 동생을 부탁하면서 목숨을 내놓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지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하지만…….’
디에스 라고가 두 손을 꾹 주먹 쥐는 순간.
“서문기율을 찾아와 줘! 그래, 그 여자도! 강해 보이던데 그 여자도 찾아와 줘!”
네쥬가 그를 붙들어 잡으며 간절하게 외쳤다.
디에스 라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 * *
“실망이네요.”
서문기율이 아쉬움을 뱉어낸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둠은 걷힌 지 오래, 또한 그 속에서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던 레오 알버스 역시 사라진 뒤였다.
서문기율이 레오 알버스를 놓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유리한 씨께서 주신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전자를 선택할 수 있어요?”
니르로르도 유리한의 말을 거들었다.
- 인간아, 네가 놓아준 그 녀석은 분명 좋다고 너를 배신하려고 할 거다.
“압니다.”
서문기율은 날개 달린 도마뱀을 신기하다는 듯이 한 번 쳐다보고는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괜찮다고요?”
“네, 태초의 마을은 제가 꼭 지킬 거니까요.”
남은, 제 동료들과 함께요.
나지막한 뒷말에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지킬 수 있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유리한은 싱긋 눈웃음을 짓고는 그에게 물었다.
“제가 당신의 적이 된다고 해도 그 마음 변치 않나요?”
서문기율의 두 눈이 떨렸다. 그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제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이 제 적이 된다고 해도 태초의 마을을 지킬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좋아요.”
짝, 가볍게 손뼉을 친 유리한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잘 부탁할게요.”
“네? 무엇을…….”
“뭐겠어요?”
유리한이 그를 놀리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적으로 만나도 잘 부탁한다는 소리죠.”
우우웅―!
그녀 주변에서 발한 빛이 곧 허공에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플레이어, ‘유리한’은 침입자입니다.]
서문기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게는 암담하기 그지없는 메시지였던 탓이다.
희게 질려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유리한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