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서문기율은 황급히 태초의 마을로 돌아갔다.
유리한은 구태여 쫓지 않았다. 그저 그가 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그렇게 그가 사라졌을 때, 니르로르가 유리한에게 물었다.
- 유리한아.
“응?”
- 하늘 머리 인간도, 어두침침한 인간도 모두를 배신하는 것이냐?
“배신이라니? 나는 애초에 수호자를 선택한 적이 없는데?”
맞는 말이었다.
유리한은 단 한 번도 수호자가 되겠다고 말한 적 없었다.
- 네 선택에 후회는 없느냐?
“갑자기 왜 이래? 네가 제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 물론 좋기는 하다. 드디어 짐의 계약자답게 움직이는 것 같아서 말이지.
하지만 너답지 않아서 싫다는 말을, 니르로르는 꾹 눌러 담았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숲을 향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 어디를 가는 것이냐?
“침입자들이 있는 곳에. 수호자도 아닌데 태초의 마을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 정말 괜찮으냐? 그 두 녀석은 수호자를 선택한 것 같던데.
“괜찮아.”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결국에는 같이 탑을 올라가게 될 테니까.”
서로 다른 진영이 됐는데 같이 탑을 올라간다니?
니르로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한은 어리둥절해하는 작은 드래곤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 그런데 유리한아.
“또, 왜.”
- 침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냐?
“아니, 모르는데.”
그 대답에 니르로르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 참으로 대책이 없도다. 그러니까 지금, 너와 같은 침입자 녀석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가겠다는 것이냐?
“응.”
유리한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만 믿고 따라오도록 해.”
니르로르는 미덥지 못하다는 기색이었으나 잠자코 유리한의 머리 위에 앉아있기로 했다.
그렇게 숲속을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파삭, 유리한의 구둣발에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자마자 화살이 날아왔다. 그녀는 날아든 것을 가볍게 손으로 잡아내고는 말했다.
“봐봐, 침입자들 찾았지?”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레오 알버스를 비롯하여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한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여기 모여있었네요?”
참으로 경쾌한 인사였다.
* * *
“누가 찾아왔다고?”
“유리한이요, 유리한!”
“미안, 서율. 내 귀가 가버린 것 같으니 다시 한번 더 말해줄래?”
“유리한이 찾아왔다고요! 구시대의 영웅이신 유리한 님이요!!”
혈맹의 맹주, 랴오륭이 두 눈을 깜빡이다가 황급히 숨을 들이켜 마셨다.
“허어업.”
그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는 서율에게 다급히 물었다.
“정말이야? 왜 찾아오셨대? 설마, 나 죽이려고 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맹주께서 헛소리만 하지 않으시면 그럴 일은 없을걸요?”
그러니까 그 입 좀 조심하라면서 서율이 당부했다.
“유리한 님께 예쁘다느니 몸매가 잘 빠졌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 절대로 하면 안 돼요, 알겠죠?”
“생각해 보고.”
“맹주님!”
서율이 빼액 소리 질렀다. 랴오륭은 그 외침을 무시하고서 물었다.
“그래서 구시대의 영웅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얼굴 한번 보러 가고 싶은데.”
“응접실로 모셨어요.”
“좋아, 만나 뵈러 바로 가자고.”
랴오륭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는 저를 따라온 서율에게 말했다.
“서율, 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래도 돼요?”
“응, 그래도 돼.”
서율은 불안한 눈치였다. 마치, 랴오륭이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된다는 눈빛이었다.
“어휴, 걱정하지 마! 내가 설마 겁도 없이 영웅님께 추파를 던진다거나 희롱을 한다거나 그러겠어?”
네.
서율은 치밀어 오르는 대답을 꾹 눌러 삼키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맹주님. 그럼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좋아.”
랴오륭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하십니까, 영웅님!”
놀랄 만도 하건만 유리한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맹주?”
“오, 저를 아시는군요. 이것 참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꼭 한 번 만나 뵙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아리따운 영웅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영광이군요!”
랴오륭이 능글맞게 웃고는 그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례지만 머리 위에 그건 뭡니까? 아이템?”
- 짐에게 감히 아이템이라니! 유리한아, 저 무례한 인간을… 으읍!
“아이템이든 뭐든 편하게 생각해 주세요. 맹주께서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존재니까요.”
- 우으으웁!
유리한에 의해 입이 틀어막힌 니르로르가 그 소리에 발광하기 시작했다. 랴오륭은 별걸 다 본다는 눈빛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알겠습니다. 영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뭐. 편하게 날개 달린 도마뱀이라고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랴오륭 역시 사람 좋게 웃어 보이고는 물었다.
“귀한 분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딱히 별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 아니에요. 침입자가 된 입장에서 맹주께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그 말에 랴오륭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가 침입자를 선택했을 줄 몰랐나 봐요?”
“하하, 이것 참. 영웅님께서는 당연히 수호자가 되어 수인족을 지키실 줄 알았지 뭡니까?”
랴오륭이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킬킬거리자 유리한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도 사람이라서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탑을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뻔히 보이는 데 힘든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아서요.”
“하하, 그렇죠! 이곳에서 수인족을 지키겠답시고 설치고 있는 그 녀석과는 달라서 참 좋습니다!”
“그 녀석이라고 하면…….”
“서문기율이라고 있습니다. 영웅님께서 탑에 들어오기 전에 한창 이름을 떨치던 녀석인데, 애가 참 바보같이 착해서요.”
유리한은 처음 듣는 이름이란 듯 웃어 보였다.
“이런 세상에서는 참 살기 힘든 성격이네요.”
“크으, 역시 뭘 아시는군요!”
랴오륭이 그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탑을 이끌고 있는 세력인 오광.
그중 한 곳의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태도였다.
하지만 유리한은 알았다.
‘내 빈틈을 계속 찾고 있네.’
랴오륭의 두 눈이 바쁘게 굴러가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저를 향한 단순한 경계인지 아님, 제 동생 ‘유지한’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랴오륭을 한 번 떠보기로 했다.
“맹주께서는 어쩌다가 이 탑에 들어오게 되셨나요?”
“어이쿠, 갑자기 그런 질문이라니 당황스럽군요.”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니까요. 보자, 제가 탑에 들어온 지 어느새 20년이 훌쩍 넘었군요. 탑에 막 들어왔을 때 저는 열다섯의 풋풋한 소년이었는데 말이죠.”
랴오륭이 옛일을 꺼내는 것이 즐겁다는 듯 나불댔다.
“여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전 세계 다양한 여자를 만나고 싶었죠! 그러다 어떤 여자에게 첫눈에 마음을 빼앗기게 됐습니다.”
“오, 누구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유리한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에 랴오륭이 씨익 웃었다.
“이곳의 왕.”
유리한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이곳의 왕이라면, 수인족의 왕이지 않은가?
그것도 혈맹의 맹주, 랴오륭의 손에 죽은.
유리한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랴오륭은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줄 알고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런데 말입니다. 그 여자가 계속 저를 거부하지 뭡니까? 그래서 홧김에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죽여서요?”
“하하, 그건 또 어떻게 아셨답니까? 뭐,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유리한은 잠자리 한 번 가져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둥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랴오륭을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저는 49층의 지배자 자리를 얻게 됐죠.”
“그리고 이런 시험을 진행 중인 거고요?”
아뿔싸,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다행히도 랴오륭은 유리한의 날 선 목소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도 이런 시험을 진행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계속 날뛰지 뭡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시험을 구성하게 됐죠.”
“아하.”
“영웅님께서는 이곳에서 치러지고 있는 시험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봅니다?”
“아니요,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유리한이 입매를 비틀었다.
“원래 약육강식인 세상이잖아요? 이곳, 탑이든 바깥이든 말이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유리한은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물었다.
“시험은 이미 시작된 거죠?”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침입자로서 수호자가 지키고 있는 마을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남은 건 태초의 마을이라고 불리는 단 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노예로 잡혀있는 녀석들을 몇 풀어줘서 다시 마을을 세우게 할 겁니다. 그런 다음 또 시험을 진행하는 거죠.”
“아아.”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마음에 드네요.”
“하하, 그렇죠? 그럼, 모쪼록 시험을 잘 진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웅님께서 침입자의 편에 서주셨으니 이번 시험은 굉장히 빨리 끝나겠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유리한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른 분들과 함께 태초의 마을을 무너뜨리러 가볼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어이쿠, 그래도 살살 해주시죠.”
“생각해 보고요.”
싱긋 눈웃음을 지은 유리한은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랴오륭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정말 유지한, 그 녀석의 누님이 맞단 말이야? 너무 다른데?”
그는 빛 한 점 들지 않던 지하실에서 이를 악물고 저를 쳐다보던 남자를 떠올렸다.
하하,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