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랴오륭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보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유리한, 구시대의 영웅이 저를 한껏 비웃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유리한……!’
랴오륭은 이를 갈았다. 까드득, 들려오는 살벌한 소리에 유리한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쨌든, 제 승리네요. 약속대로 제 신분을 바꿔주실까요?”
유리한의 어깨 위에 니르로르가 앉았다. 그는 말이 없는 랴오륭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재수 없는 인간아, 맹약을 어기면 네 심장을 내놓아야 할 것이니라.
결국, 랴오륭은 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유리한의 신분을 바꿔주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진영이 ‘침입자’에서 ‘수호자’로 변경되었습니다.]
유리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마워요, 약속을 안 지키시면 또 어디를 잘라내야 하나 고민했거든요.”
“…약속을 안 지킬 리가 있겠습니까? 죽음의 드래곤 앞에서 맹약을 건 몸인데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네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니르로르가 죽음의 드래곤인 걸 용케 알고 계시네요?”
“모르는 게 이상하죠. 그나저나 재미있군요. 당신 목숨을 앗아 갔던 녀석과 함께라니.”
랴오륭이 이를 드러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온 탑이 당신을 조롱할 겁니다.”
“상관없어요.”
조롱하고 싶으면 하라지?
“저한테 덤빌 용기는 없고, 할 수 있는 건 입만 놀리는 것뿐인 사람들을 제가 신경 쓸 이유는 없거든요. 그리고.”
유리한이 입매를 비틀었다.
“저는 니르로르한테 죽은 적 없어요. 니르로르를 죽이면서 이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을 뿐이지.”
뭐, 어쩌다 보니 다시 살아났지만.
유리한이 싱긋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랴오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른팔을 잃은 고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 빌어먹을 여자가 또 내 감각을 빼앗아 간 모양이지.’
그게 유리한의 특기였다. 가장 조심해야 할 스킬 중 하나였고.
하지만 그것만 조심한다면 충분히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 두 눈을 잃고 오른팔을 잃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다.
‘이제 어쩌면 좋지?’
이 꼴로 탑을 돌아다녔다가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뒤통수에 칼을 맞을 게 분명했다.
혈맹의 맹주, 랴오륭.
남의 여자 빼앗고 여자의 연인을 조롱하는 것이 특기인 그는 사방이 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뿐이랴?
호시탐탐 제 자리를 노리고 있는 혈맹의 단원들도 문제였다.
혹자는 우호 관계인 ‘청의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이거, 내 꼴을 그쪽에서 알게 된다면 라이 에스페란도가 가장 먼저 내 목을 베러 오겠군.’
그건 잘못된 사실이었다.
랴오륭은 남은 한 손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라이 에스페란도의 서슬 퍼런 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있잖아요, 맹주님.”
유리한이 랴오륭의 앞에 무릎을 살짝 굽히고는 목소리를 내었다.
“저랑 거래를 하나 더 하지 않을래요?”
“이번에는 저한테서 또 뭘 가져가려고 하는 겁니까?”
“가져갈 생각은 없고 돌려주려고 해요.”
돌려주려고 한다고?
랴오륭이 미간을 좁혔다. 유리한은 못 미덥다는 듯 저를 향해 고개를 든 랴오륭을 보고는 웃었다.
“제가 빼앗은 당신의 두 눈과 오른팔을 돌려드릴게요. 대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자리를 넘기도록 하세요.”
“뭣……!”
“싫으면 마시고.”
랴오륭이 입을 다물었다.
혈맹이 지배하고 있는 층은 49층을 제외하고도 다섯 개가 더 있었다. 다른 오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지만…….
“당신한테 넘기면 됩니까?”
두 눈과 오른쪽 팔을 다시 돌려준다는데 못 줄 거야 없었다.
랴오륭의 말에 유리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서문기율 씨한테 넘기도록 하세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렇게 외친 사람은 서문기율이었다. 그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서문기율 씨, 맹주께서 49층을 계속 지배하기를 바라요?”
“그건……!”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그 사람은 제대로 49층을 굴릴까요?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서문기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50층도 오르지 못한 제가 49층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분명 많은 플레이어가 이 자리를 노리려고 할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여기, 맹주께서 당신의 뒤를 봐줄 테니까요.”
그럴 생각 따위 없었던 랴오륭이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유리한이 짓궂게 물었다.
“어때요, 맹주? 이만하면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유리한이 바라는 건 그가 서문기율의 뒤를 봐주는 것. 랴오륭은 치욕스럽다는 듯 흙바닥을 손으로 긁어댔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도록 하죠.”
유리한의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그 목숨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들려온 대답에 유리한이 만족스럽게 웃고는 고요한에게 물었다.
“요한, 맹주님을 치료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고요한은 웃는 낯이었으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있었다.
감히 유리한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던 그를 치료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한이 부탁한 일, 고요한은 기꺼이 그녀의 부탁을 따랐다.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이 랴오륭을 치료해 주는 것을 보며 유리한에게 물었다.
“유리, 괜찮겠나?”
“괜찮아.”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서문기율 씨를 해치고 또 기어오를 것 같으면 잘근잘근 한 번 더 밟아주면 돼.”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랴오륭의 귀에 똑똑히 틀어박혔다.
그는 알았다.
제가 서문기율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유리한은 끝까지 자신을 쫓아오리란 것을.
랴오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지한에 대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덤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두 눈과 오른쪽 팔을 되찾은 보람도 없이 이 목이 썰리고 말 것이다.
곧 치료가 끝났다. 랴오륭은 제 팔이 멀쩡히 돌아온 것에 놀라워했다.
“이렇게 깔끔하게 상처가 회복되다니. 당신, 태양교의 사제보다 낫군.”
전직 태양교 사제, 고요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랴오륭은 유리한과의 거래대로 49층의 지배자 자리를 서문기율에게 넘겨줬다.
[49층에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했습니다!]
[플레이어, ‘서문기율’.]
[49층을 잘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유리한이 짝, 가볍게 손바닥을 한 번 맞부딪치고는 웃었다.
“서문기율 씨, 축하드려요.”
“저는…….”
“이 자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거나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럴 자격 충분하니까요.”
적어도 수인족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친 랴오륭보다는 나았다.
그러니까.
“이제 쓰러진 사람들 좀 옮겨볼까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들은 모두 유리한에 의해 어디 한 군데 부러져 정신을 잃어버린 침입자들이었다.
* * *
“다들 미안!”
침입자들을 모두 감옥에 처박고, 노예로 사로잡혀 있던 수인족들을 모두 구출한 후 유리한 일행은 묵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마자 유리한은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에게 사과했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서 사과하는 그녀의 모습에 디에스 라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찮다, 유리. 너라면 분명 다른 생각이 있어 침입자가 됐을 거로 생각했었다.”
또한, 믿었었다.
분명 다른 수가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 따위 없이 유리, 네가 그냥 침입자가 됐다고 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랬다면 나랑 진심으로 싸워야 했을 텐데?”
“그렇다고 해도 나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았다.”
“너도 참…….”
유리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요한은 어땠어요?”
“무서웠어요.”
무서웠다니?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저랑 싸우게 될까 봐 무서우셨나 봐요. 제가 요한이랑 싸울 리가 없잖아요?”
고요한은 그저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그가 무서웠던 건 하나, 유리한이 저를 두고 혼자서 탑을 올라가 버리는 것이었다.
고요한이 내보이는 미소를, 디에스 라고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쳐다봤다.
유리한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니르로르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던 유리한은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두 사람한테 미안하게 생각해.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그래서 그런 거란 말이군.”
“정답!”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디에스 라고가 픽 웃음을 흘렸다.
고요한은 여전히 미소를 그린 낯으로 유리한을 쳐다보았다. 그때, 고요한이 성큼 유리한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뺨에 손을 얹었다.
“요, 요한?”
유리한이 당황하여 두 눈을 끔뻑였다. 고요한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한 씨, 다친 줄 모르셨죠?”
“아…….”
유리한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곧, 뺨에 닿아있는 고요한의 손 주위로 따뜻한 기운이 번져갔다.
유리한은 가만히 그 기운을 느끼다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요한.”
“그런 말씀 마세요.”
고요한이 선하게 웃음을 짓고는 여자의 뺨에서 손을 거두었다.
유리한은 고요한의 손이 닿았던 곳을 괜히 한 번 어루만졌다.
쿵쿵,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방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서문기율과 함께 수인족을 지켰던 동료, 프엉이었다.
“뭐지?”
디에스 라고가 볼일이 있으면 빨리 말하라는 듯이 물었다. 프엉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디에스 라고가 불쾌하다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말을 못 하는 건가?”
“프엉 씨는 과묵하시거든요.”
프엉의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라펠이라고 해요! 기율 씨와 함께 탑을 오르는 중이죠.”
라펠이 밝게 인사하고는 말했다.
“기율 씨가 부르세요. 수인족분들께서 유리한 님께 할 이야기가 있으신가 보더라고요.”
유리한이 고개만 갸웃거리자 디에스 라고가 말했다.
“감사 인사라도 할 생각인가 보군.”
“그래?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니르로르랑 같이 성장의 문 좀 열어보려고 했는데.’
아쉽지만 성장의 문을 여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유리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서문기율 씨한테 안내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