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불가능하다.”
유리한이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예상했던 대답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차오르는 분노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유서아를 휘감고 있는 것은 니르로르, 그의 힘이지 않나?
“왜 불가능한 건데?”
유리한이 다시 이를 갈았다. 니르로르는 태연하게 말했다.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현재 짐은 터무니없이 약해진 상태다. 섣불리 저 여자를 건드렸다가는 짐이 폭주하고 말 것이다.”
유리한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허구한 날 솜사탕만 찾아대는 남자처럼 보이지만, 그는 위대한 죽음의 드래곤이었다.
세상에서 모든 빛을 거뒀던 용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폭주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결국, 유리한은 니르로르한테서 기대를 접고 고요한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기로 했다.
“요한, 서아한테…….”
유리한이 목소리의 끝을 잠깐 흐렸다가 다시금 말했다.
“혹시, 서아한테 힘을 사용해 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
이것 역시 예상한 대답이기는 했다. 하지만 유리한은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고요한은 그런 마음 가질 필요 없다는 듯 미소를 그려주고는 유서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곧장 유서아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제 기운을 불어 넣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죄송해요, 유리한 씨. 제 힘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네요.”
고요한이 유서아한테서 손을 떼어내며 유리한에게 사과했다. 유리한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요한. 힘을 빌려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걸요?”
그런데도 고요한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요한, 정말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거죠.”
고요한은 유리한의 손이 제 뺨에 닿은 후에야 표정을 풀었다. 그녀는 고요한을 달랜 후 유서아에게 다가갔다.
“서아야…….”
유리한이 유서아의 마른 손을 꼭 잡았다.
“고모가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하나 봐. 그래야 우리 서아를 깨울 수 있나 봐.”
목소리가 떨렸다.
유리한은 유서아의 손을 그대로 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있던 유리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유리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까지 몇 번이고 몸을 돌려 유서아의 얼굴을 두 눈에 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드르륵, 탁.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가 유서아의 병실 문을 닫은 뒤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서아야.’
그녀는 차마 내뱉지 못한 조카의 이름을 꾹 삼키고는 애써 웃었다.
“고모! 누나랑 이야기 잘하고 왔어요?”
유시우가 저를 향해 조르르 달려왔기 때문이다. 유리한은 단번에 아이를 안아 들고는 말했다.
“응, 서아한테 시우 덧셈도 하고 뺄셈도 하고 곱셈도 할 줄 안다고 빨리 일어나라고 했어!”
“히힛!”
아이가 배시시 웃고는 유리한을 꼭 끌어안았다. 유리한은 제 품에 안긴 온기에 미소를 그렸다.
* * *
참 좋은 병원에서 돌아온 늦은 밤, 유리한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다리를 건들거렸다.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유리한아.”
“니르로르?”
유리한이 여전히 건장한 남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야?”
“야경을 구경하고 싶어서 잠깐 나왔느니라.”
니르로르가 유리한의 옆에 앉고는 입을 열었다.
“그 여자, 너를 많이 닮았더군.”
“서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구나.”
유리한이 피식 웃었다.
“내 동생의 피붙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우리 동생, 나를 엄청 닮았거든. 외모도, 성격…….”
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그래서 그런 걸 거야.”
유리한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시간.
유리한은 멋쩍게 뺨을 긁적이다가 괜히 성을 냈다.
“할 말 없으면 야경이나 구경하러 가지 그래?”
“같이 가도록 하지.”
“뭐?”
유리한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그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곧장 유리한을 안아 들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리한이 있는 힘껏 버둥거렸다.
“야! 니르로르! 이게 무슨 짓이야?! 안 내려놔?”
“유리한아, 그렇게 시끄럽게 굴었다가는 이곳의 모든 인간이 깨고 말 것이다.”
유리한이 씩씩거리며 니르로르의 얼굴을 있는 힘껏 밀었다. 그 힘에 니르로르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버틸 만하군.”
“이 망할 용이?! 죽고 싶어?”
“짐이 죽으면 네 정신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서로 이어진 상태란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말이라도 못하면!
유리한은 씩씩대다가 니르로르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기로 했다.
여기서 더 소란을 피웠다가는 기껏 잠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고 말 테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꼴을 보면 다들 놀랄 거야!’
놀라기만 할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니르로르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겼다. 유리한의 발버둥이 멈추자 그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얌전하니 좋군.”
“시끄러.”
유리한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렸다. 니르로르는 비웃음을 한 번 흘리고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은 왜…….”
여느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니르로르가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으악! 너 미쳤어?!”
이 정도 높이에서는 어떤 플레이어도 세상을 하직할 터였다.
유리한은 저도 모르게 니르로르를 꼭 끌어안으며 속으로 열심히 그를 욕했다.
‘이 망할 용이!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이게 무슨 봉변이야?!’
그렇게 두 눈을 꼭 감을 때였다.
- 유리한아, 눈을 떠보거라.
머릿속에서 니르로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리한이 놀라 두 눈을 떴다.
중력을 따르던 움직임이 멈춘 게 느껴졌다. 곧, 서울의 야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와아.”
유리한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후웅,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기분 좋았다. 니르로르는 그녀에게 물었다.
- 어떻느냐?
유리한이 고개를 내렸다. 비늘 덮인 단단한 등이 보였다. 인간 따위는 아주 자그마한 점처럼 보일 정도로 넓은 등이었다.
유리한이 멍하니 물었다.
“너, 어떻게 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거야?”
- 아주 잠깐 이 모습을 취할 수 있느니라. 네가 짐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짐도 힘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더군.
“잠깐, 그거 좋은 일인가?”
- 좋은 일이지.
“아닌 것 같은데.”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갔던 죽음의 드래곤이다.
암만 저와 계약 관계라고 하더라도 훗날 힘을 되찾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 그보다, 소감은?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 세상을 위협했던 거대한 존재가 저를 태우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유리한은 펼쳐진 풍경에 멍하니 읊조렸다.
“멋져.”
분명, 탑에 들어가기 전에도 봤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찰까? 왜 이렇게…….’
뚝뚝,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처음, 되살아나 귀환했을 때는 유서아와 유시우의 일로 너무 바쁘게 움직인 탓일까?
유리한은 단 한 번도 마음 터놓고 이런 야경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한이 울음을 터트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르로르가 무심하게 말했다.
- 유리한아, 네가 나로부터 지킨 세상이다.
“잘 알고 있네.”
내뱉은 목소리가 떨렸다. 유리한이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고는 크흠, 헛기침을 터트렸다.
“너만 아니었으면 편안한 노후를 보내면서 평화를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니르로르가 낮게 웃었다.
- 그때는 어쩔 수 없었느니라.
“그런 말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아니지? 너 하나 잡겠다고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가 희생됐는데.”
니르로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입을 열었다.
- 유서아는 분명 깨어날 수 있을 거다. 너라면 가능해.
니르로르가 저를 응원해 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서툰 인사를 전했다.
“빈말이라도 고맙네.”
한 명의 플레이어와 한 마리의 용은 그렇게 오랫동안 서울의 야경을 구경했다.
어슴푸레 햇빛이 서울을 밝힐 때까지, 아주 오래도록 말이다.
* * *
“유리한 님, 유리한 님!”
아침 일찍부터 소란이네.
유리한이 피곤한 낯을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르로르와 함께 어젯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경을 구경하고 막 잠이 든 터라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플레이어의 몸으로는 이깟 피로쯤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유리한은 기지개를 한 번 쭈욱 켜고는 밖으로 나갔다.
“백상철 사장님? 아침부터 왜 그렇게 저를 찾으세요?”
“유리한 님!”
어제 하루 발에 불이 나도록 곳곳을 뛰어다녔던 백상철이 희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그거 들으셨습니까? 센터의 협회장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시체가 발견됐다고 해요!”
“아, 그래요?”
유리한이 뒷목을 꾹꾹 누르며 태연하게 말했다.
“지하에 파묻힌 걸 용케도 찾았네요.”
“네?”
백상철이 놀란 눈을 보였다.
“협회장님의 시체가 지하에서 발견된 건 어떻게 아셨는지…….”
“다 아는 수가 있죠.”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그보다 수고하셨어요. 제 부탁 엄청 잘 들어주셨던데요? 주아라 협회장님에 대한 걸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었대요?”
“원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약점 잡기가 수월합니다.”
“아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그래도 청렴한 인간은 암만 높은 자리에 있어도 캘 것이 없지요.”
그러니까 주아라는 청렴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거다.
유리한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쨌든 수고했어요.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네요.”
유리한이 원한 건, 주아라에 대한 대중의 분노였다.
‘어젯밤, 커뮤니티 반응을 살펴보니 아주 난리였지?’
주아라의 실종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대부분 좋지 못한 소문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주아라가 지금껏 벌여온 악행이 인터넷에 아주 대서특필 됐으니.
‘잘된 일이지.’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그런데 유리한 님.”
“네?”
백상철이 우물쭈물 유리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탑에는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