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 *
“이 빌어먹을 용 같으니라고!”
유리한이 이를 으득 갈았다. 저녁이 되어도 니르로르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로 바니스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분명 말하지 않았나?
‘30분 안에 찾아서 데리고 오겠다면서!’
30분은 무슨, 세 시간은 훌쩍 지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괜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불안감을 디에스 라고가 단호하게 차단했다.
“그건 아닐 거다, 유리.”
안심이 되는 목소리였다. 그에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망할 파충류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니…….”
그랬다면 제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것이다. 유리한과 니르로르, 그들은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니르로르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일 따위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니르로르 씨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쩌죠? 힘을 많이 잃은 상태라고 하셨잖아요.”
고요한이 내뱉은 말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으으, 그럼 진짜 안 되는데.”
유리한이 앓는 목소리를 내며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디에스 라고는 눈가를 찡그리며 고요한을 노려봤다.
‘괜한 소리를.’
제게 닿는 시선에 책망이 담겨 있었다. 고요한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제가 뭘요.’
어쨌든 제 말로 인해 유리한이 불안해하고 있다.
‘달래드려야 해.’
고요한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그렸다.
“유리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니르로르 씨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면 어쩌죠?”
“그렇다면…….”
진짜 어쩌지?
고요한이 두 눈을 데굴 굴렸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제로 바니스타가 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이런, 다들 여기 계셨군요?”
“백작!”
유리한이 곧장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이고, 진정하십시오!”
제로 바니스타가 기겁하며 유리한을 진정시켰다.
“진정이 되겠어? 30분 안으로 찾아서 데려온다며? 그런데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줄 알아?!”
그리고.
“니르로르는 어디 있어!”
제로 바니스타는 혼자였다.
유리한의 성난 물음에 제로 바니스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용을 꽤 아꼈나 보군.’
그러지 않고서야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죽음의 드래곤을 이리 애타게 찾아댈 리가 없었다.
‘정말 특이한 관계라니까?’
니르로르는 유리한을 죽이려고 했고,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죽였다. 저를 불태우면서까지.
그런데 서로 애틋한 관계라도 된 것처럼 찾아대는 꼴이라니.
제로 바니스타가 실소를 흘렸다. 유리한이 그 웃음소리에 두 눈을 번뜩였다.
“웃어?”
“아닙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우선, 한 가지 말씀드리죠. 니르로르 님은 찾았습니다.”
“찾았다고요?”
유리한이 놀란 눈을 보이며 제로 바니스타의 멱살을 놓았다. 제로 바니스타는 흐트러진 차림새를 바로 하면서 픽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멱살을 잡으며 반말을 지껄이더니…….
‘그 모습이 진짜 모습이겠지.’
제 앞의 예의 바른 성격은 유리한이 한껏 꾸민 모습이리라.
제로 바니스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요?”
“니르로르 님께서 경매 물품으로 잡혀 계시더군요.”
“네?”
유리한이 멍하니 물었다.
“경매 물품이요?”
누가? 니르로르가?
“그 빌어먹을 용이 경매 물품으로 붙잡혀 있다고요?!”
유리한이 비명처럼 소리 지르며 물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싱긋 웃었다.
“네, 그렇더군요.”
네, 그렇더군요?
태연자약한 대답에 유리한은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도대체 어쩌다가요? 어쩌다 경매 물품으로 잡혔대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니르로르 님께서 꽤 귀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누가 그래요?”
유리한이 질색했다. 디에스 라고도 오만상을 찌푸렸다. 제로 바니스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고요한뿐이었다.
어쨌거나 제로 바니스타는 너털웃음을 터트린 후 말했다.
“하여튼, 니르로르 님의 귀여운 외모에 반한 사냥꾼이 그분을 붙잡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경매로 팔리게 됐고요?”
“네.”
아이고, 머리야.
유리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지금 어디 있어요?”
“되찾으러 가시려고요?”
“당연하죠.”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팔려 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만, 그건 안 될 소리였다.
‘빌어먹을 종속 관계.’
만에 하나 니르로르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녀에게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유리한은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제로 바니스타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한 님께서 어떤 힘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무력으로는 니르로르 님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제로 바니스타는 말했다.
니르로르가 갇혀있는 감옥은 50층에서 59층의 세계인 ‘엘리아룸’에서만 나오는 광물로 만들어져 있다고.
“그리고 그 광물은 플레이어의 힘을 차단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플레이어의 힘을 차단하는 광물이라니.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35층의 감옥이 그랬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유리한이 짜증스레 말했다.
“그럼, 경매 관계자들을 한 명씩 때려눕히면 되겠네요.”
“물론, 유리한 님이라면 그러실 수 있겠지만…….”
제로 바니스타가 의미심장하게 목소리 끝을 흐렸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주지 그래요?”
제로 바니스타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유리한 님, 엘리아룸이 정령왕들이 다스리는 세계란 것은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이곳, 50층은 정령왕들께서 임명한 귀족들이 다스리고 있죠. 그리고 그들이 바로 경매 관계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귀족들을 때려 부수면 정령왕들이 분노하게 될 거라고요?”
“네, 그분들께서는 질서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거든요.”
그러니 그들을 때려 부순다는 건 이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란 말씀.
‘그렇게 된다면…….’
엘리아룸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게 될 거다.
60층의 문지기를 공략하면서 이후의 세계가 개방됐다. 하지만 그곳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엘리아룸의 지배자들이 내리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유리한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제로 바니스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답을 못하면 애꿎은 제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엘리아룸의 귀족들과 부딪치지 않고 무사히 니르로르 님을 되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유리한이 어서 말해보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경매에 참가하는 겁니다.”
유리한이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가 보기에 이 사태를 무사히 넘기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유리한 님, 돈 많잖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요.”
니르로르를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니!
“니르로르가 다른 귀족에게 팔려 가기를 기다렸다가 강탈하는 건 안 되겠죠?”
그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
‘서로 애틋한 관계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제로 바니스타는 혼란스러워졌지만 유리한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이곳, 엘리아룸에서 정령왕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괜한 짓은 하지 말라는 거였다.
유리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빌어먹을 용 새끼가 사람 참 귀찮게 한다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다.
“경매는 언제 열리나요?”
경매에 참가해 그 빌어먹을 용을 구할 수밖에.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으며 유리한의 질문에 답해 줬다.
“내일 저녁 7시에 열릴 예정입니다. 위치는 제가 알고 있으니 그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분께서는…….”
제로 바니스타가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 고요한을 차례차례 훑어보고는 방긋 웃었다.
“옷을 맞추도록 하죠!”
유리한이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옷을 맞춘다니요?”
“그 꼴로 경매에 참석하겠다고 찾아갔다가는 안쪽은 구경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옷을 맞춰야 한다면서 제로 바니스타가 말했다.
“제가 애용하는 살롱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옷을 맞추는 게 싫으시다면 저희 뮤즈에서 빌려드리도록 하죠!”
짝짝, 제로 바니스타가 손뼉을 맞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제이가 나타나 여러 벌의 옷을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에게 보여줬다.
“으.”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유리한이 질색했다. 디에스 라고 역시 그녀와 똑같이 질색하며 제이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멀쩡한 사람은 9층, 리스체가스 가문 출신인 고요한뿐이었다.
“멋지네요.”
“요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고요한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의 다양한 반응에 제로 바니스타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저희가 보여드린 옷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으니 살롱으로 가보죠!”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할까?”
그 질문에 디에스 라고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마음대로 해라, 유리.”
제로 바니스타를 따라 살롱으로 가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었다.
고요한은 싱긋 웃었다.
“유리한 씨 의견에 따를게요.”
내 저렇게 말할 줄 알았지.
유리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고는 말했다.
“가죠.”
제로 바니스타가 기다렸다는 듯 히죽였다. 그 웃음이 왜인지 모르게 정말로 재수없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래?’
니르로르가 경매 물품으로 잡혀 있다는 말은 사실일 거다. 진실 감별(B)로 확인했으니.
‘제로 바니스타가 진실 감별(B)을 피할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다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하지만 유리한은 그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살롱.
“싫어! 나 그냥 경매 참가 안 할래!”
유리한은 살롱의 마담이 보여주는 옷들에 기겁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유리한 님. 경매에 참가하지 않으면 니르로르 님을 구할 수 없습니다만?”
“그냥 팔려 가라고 해요!”
유리한이 빼액 소리 질렀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그러다 유리한한테 한 대 맞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