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무대 위에 선 사회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엘리아룸에서 나는 가장 단단한 광물! 크레이톤을 가볍게 자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디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크레이톤은 니르로르가 갇힌 감옥을 이루고 있는 광물이었다.
“흥! 크레이톤을 자를 수 있는 검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곳곳에서 경매 상품을 두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회자는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이라던 크레이톤은.
“오오오! 저 단단한 것을 저렇게 가볍게 베어버리다니!”
사회자가 휘두른 검에 깔끔하게 반으로 잘리고 말았다.
“내가 사겠소! 저것은 우리 테이란 백작가가 가져가겠소!”
“탑의 주민은 빠져! 저건 우리 청의 기사단이 가져간다!”
감탄 섞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아룸 귀족의 것도 있었고, 플레이어의 것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회자가 선보인 검을 원했다. 그 검을 경매장에 내놓은 유리한이 비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아수라장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어쩔 수 없지요. 크레이톤을 저렇게 가볍게 벨 수 있는 무기는 별로 없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다들 환장할 만도 하다면서 제로 바니스타가 덧붙였다.
“흐음, 대단한 물건이었구나?”
유리한은 적당히 대꾸해 줬다.
저 검이 대단한 무기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탑을 오를 때마다 방문한 대장간에서 모두 하나같이 자신들에게 팔아 달라고 아우성이었으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 무기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쨌든, 얼마에 팔리려나?’
유리한이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경매를 지켜봤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이제 경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매의 시작과 함께 곳곳에서 손이 올라왔다.
“네! 청의 기사단에서 120만 골드를 불렀습니다!”
1골드에 1만 원이니, 120만 골드는 즉 120억 원이었다.
“와우, 미친 거 아니야?”
유리한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로 바니스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청의 기사단원들은 검에 환장하는 분들이시니 말입니다. 저 검에 눈독을 들일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리한이 내놓은 검은 위력은 강할지라도 생김새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수백억을 부를 줄은 몰랐다.
“125만 골드 나왔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140만 골드.”
장내가 또 한 번 술렁였다.
140만 골드를 부른 사람이 다름 아닌 라이 에스페란도, 청의 기사단의 부단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단장님께서 이번 경매에 나오실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저 사람이 라이 에스페란도?”
“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신가 보군요.”
“네, 처음이에요.”
유리한이 남청색 머리칼을 지닌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 순간이었다.
‘아, 눈 마주쳤다.’
유리한이 라이 에스페란도를 향해 싱긋 웃었다.
라이 에스페란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가 싫은가 봐요.”
“그럴 리가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고요한이었다. 고요한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세상에 유리한 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글쎄요.”
당장 만물의 마법사들은 저를 싫어할 게 분명했다. 혈맹의 맹주인 랴오륭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생각해 보니 나 많이 미움받고 있네.’
그래도 뭐 어쩌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만 생각하면 되지!’
유리한이 고요한을 향해 방긋 웃었다.
그 사이에도 경매가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170만 골드 나왔습니다!”
“오, 테이란 백작께서 크게 욕심을 내고 있군요.”
“테이란 백작?”
“네, 저기 저 사내 보이시지요?”
“대머리 아저씨요?”
크흡, 제로 바니스타가 헛기침을 터트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자 역시 검에 조예가 깊은 자거든요.”
“흐음,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테이란 백작은 술배가 나온 남자였다. 그러니까 검과 그다지 인연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제로 바니스타가 유리한의 혼잣말을 듣고는 입을 열었다.
“테이란 백작께서는 검에 관심이 있을 뿐, 휘두르거나 그러는 데는 관심이 없답니다.”
“그런데 저걸 왜 가지려고 한대요? 쓸모도 없는데.”
“테이란 백작의 아드님께서 라이 에스페란도 부단장님 못지않게 검을 잘 쓰시거든요.”
“아하, 아들에게 주려고 사려는 거군요?”
유리한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앞으로 저 검보다 더 좋은 무기가 계속해서 나올 텐데.’
구태여 알려줄 필요는 없지.
유리한은 속 편하게 경매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래, 그러려고 했지만.
“200만 골드.”
“부단장님!”
라이 에스페란도의 돈지랄에 유리한은 그럴 수가 없었다.
“200만 골드면…….”
“200억이죠.”
제로 바니스타의 태연한 설명에 유리한이 숨을 들이마셨다.
튜토리얼 시대 때도 어느 정도 돈을 벌기는 했었다.
그야, 몬스터를 처치하면 그 사체를 사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돈을 번 건 처음인데.’
유리한이 현실감 없는 거금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사이 유리한이 내놓은 검이 라이 에스페란도에게 낙찰됐다.
“축하합니다, 라이 에스페란도 님!”
모두가 그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단 한 사람, 유리한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쩌면 좋아.’
앞으로 나올 무기는 저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일 텐데…….
크레이톤인지 뭔지 하는 광물을 베어내는 건 물론, 4대 정령왕의 힘에도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무기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였다.
‘라이 에스페란도라고 했지? 부단장님께서 눈물 좀 흘리시겠네.’
유리한이 동정 어린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제게 굴러 들어올 돈을 생각하며 히죽거렸다.
‘니르로르는 쉽게 사들일 수 있겠네.’
이곳, 경매장에서 자신보다 많은 돈을 거머쥐고 있을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아직 남은 상품들이 어떻게 낙찰될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번 상품 못지않게 큰돈을 만지게 될 터였다. 그리고 유리한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경매를 통해 벌어들인 금액은 총 1,780골드.
“와우…….”
평생 벌어도 만져볼까 말까 한 숫자의 금액이었다. 유리한이 머릿속으로 제가 받을 돈을 계산해 보고는 픽 웃었다.
‘이 정도면 정말 문제없겠어.’
하지만.
“570만 골드! 뮤즈의 백작님께서 570만 골드를 불렀습니다! 금액을 더 올리실 분, 또 없습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니르로르를 사기 위한 입찰 경쟁에 나서면서 계획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 이 빌어먹을 인간들아! 짐은 위대한 용이다! 감히 돈 따위로 짐을 사려고 하다니! 다들 가만두지 않겠느니라!
감옥에 갇혀있던 니르로르가 발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이를 으득 갈았다.
“이봐요, 백작님.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이죠?”
“하하, 저는 정정당당하게 경매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아하, 그렇구나? 580만 골드!”
유리한이 금액을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니르로르가 내 빌어먹을 도마뱀이란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니까 이러는 거죠.”
제로 바니스타가 유리한이 올린 금액의 더블을 불렀다. 그러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유리한 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지랄하네.
유리한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렸다. 제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입찰 경쟁에서 빠졌어야 했다.
“1,160만 골드! 경매 사상 최고 금액을 조금 전, 뮤즈의 백작님께서 경신했습니다!”
입찰 경쟁에 나서서 금액을 계속 올리지 말라고!
유리한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어마어마한 숫자에 실소를 흘렸다.
디에스 라고는 당장에라도 무기를 꺼내 들 자세를 취했다. 지금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빌어먹을 용이 마찬가지로 빌어 처먹을 백작이란 놈에게 팔려 갔으면 했지만.
‘그럼, 유리가 곤란해지겠지.’
유리한이 곤란해지는 일 따위 원치 않는 디에스 라고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의 위협을 느꼈을 텐데도 싱글벙글 웃고 있기만 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그랬다는 거다. 가면 속에 숨겨진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니르로르를 사수하지 못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의 드래곤을 손아귀에 넣어 유리한을 협박해야만 했다.
‘협박이라니,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전에 제 옆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협박이 먹힐까? 제로 바니스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만 했다.
‘정 안 되겠으면 니르로르를 대신 구해줄 생각이었다고 잡아떼지 뭐.’
설마 저를 죽이기라도 할까 싶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만큼 유리한을 절실히 원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을.
‘천하태평이 만물과 손을 잡고 탑을 오르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래야만…….
“아! 옆의 숙녀분께서 1,200만 골드를 불렀습니다! 경매 사상 최고 금액이 또 한 번 경신됩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회자는 쩌렁쩌렁하게 열을 토해내고 있었다.
1,200만 골드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한이었다. 제로 바니스타가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만한 돈은 없을 텐데요?”
“물론, 백작님의 정보로 알아본 바는 그렇겠죠.”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로 바니스타는 꿀꺽 침을 삼켰다.
“설마, 고요한 님과 디에스 라고 님에게 빌리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유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순수 제 돈으로 지불할 생각인데요?”
제로 바니스타가 미간을 좁혔다.
“당신에게 그만한 재산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있어요, 재산.”
유리한이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그러기 무섭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경매 관계자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엘브리스크의 무기 총 7점에 대한 값이 모두 지불됐습니다.”
“고마워요.”
제로 바니스타의 두 눈이 떨렸다.
엘브리스크의 무기 총 7점이라니? 그것들은 니르로르가 등장하기 전, 경매를 불태웠던 상품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 상품의 주인이.
‘유리한이었다고?’
그는 이제 입술까지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유리한은 경매 관계자로부터 돈을 모두 건네받고는 그를 향해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있네요, 여기.”
내 재산이.
더없이 자신만만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