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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26)화 (126/235)

126화 

“뭐 하자는 거예요? 갑자기 사과를 한다고 제가 받아줄 거 같아요?”

제로 바니스타는 고개를 저으며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유리한 님. 제가 할 줄 아는 일이 협박과 위협뿐이라 그랬습니다.”

유리한은 기가 찼다.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는 사실을 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남에게 굽실거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로 바니스타는 온 탑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였고, 그걸 가지고 남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플레이어였다.

유리한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제로 바니스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유리한은 잠시 그를 내려다보더니 휙 몸을 돌렸다.

“유리, 제로 바니스타에게 한 대 먹이지 않을 건가?”

“김빠졌어.”

디에스 라고의 물음에 유리한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부서진 문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백작님! 백작님!!”

제이가 애타게 제로 바니스타를 불렀다. 유리한이 자리에 멈춰 서서는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렸다.

제로 바니스타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뭐야? 나 안 때렸는데?”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제이가 유리한에게 도움을 청했다.

“염치없지만 도와주십시오!”

염치없는 건 알아서 다행이다. 유리한은 실소를 흘리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제로 바니스타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병이라도 앓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지금 저렇게 발작이 일어난 거고?

유리한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고는 고요한에게 부탁했다.

“요한, 백작님을 다시 봐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고요한이 싱긋 웃고는 제로 바니스타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수록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요한?”

“이상하네요.”

고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에 살펴봤을 때는 기절한 것 말고 이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요?”

“지금은 온몸의 마력이 뒤죽박죽 얽혀있는 상태예요.”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그러게요,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고요한이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일단, 치료해 볼게요.”

고요한의 손을 중심으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쿨럭…….”

제로 바니스타가 기침을 토해냈다. 문제라면, 기침과 함께 입술을 타고 피가 흘렀다는 거다.

유리한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요한, 치료하고 있는 것 맞죠?”

“제로 바니스타를 죽이고 있는 것 같은데.”

유리한에 이어 디에스 라고도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 하늘 머리 인간아,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거냐?

고요한은 입술을 씰룩였다.

“치료하고 있는 것 맞아요. 보세요, 혈색이 돌고 있잖아요.”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 모두 치료에 문외한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제로 바니스타의 충성스러운 종인 제이는 그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이가 은인이라도 만난 듯 연신 고개를 숙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백작님을 살펴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작님께서 한 번 쓰러지시면 몇 날 며칠을 앓으셔서…….”

고요한이 곤란하다는 얼굴을 보이며 유리한에게 의견을 물었다.

“유리한 님이 싫으시다면 치료는 중단할게요.”

솔직히 그녀는 제로 바니스타 따위 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는 요한의 마음이 불편하겠지.’

그는 상처 입은 자를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제 앞에서 다친 사람은 더더욱 무시하지 못했다.

결국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머물도록 하죠. 하지만 그만큼 충분한 보상을 해줘야 할 거예요.”

“물론이죠!”

제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로 바니스타를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유리한은 제이가 정성스럽게 백작의 이부자리를 정돈하는 걸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런 일이 꽤 자주 있었나 보네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이가 우물쭈물 유리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큰 위협을 받거나 심경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만 이러시지요.”

“아하, 그러니까 제 탓이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이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유리한은 피식 웃고는 그에게 물었다.

“제로 바니스타의 목적은 뭐예요? 알고 있는 게 있겠죠?”

제이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유리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장 치료를 중단하도록 하죠.”

그러자 제이가 다급히 외쳤다.

“유리한 님과 함께 탑을 오르는 것이 백작님의 목적입니다!”

“그건 알아요. 제가 원하는 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에요.”

제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였다. 유리한은 한 번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제로 바니스타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해드릴까요?”

제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유리한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먼저, 제로 바니스타는 50층에 진입한 후 좀처럼 움직이지 않은 플레이어죠.”

그러니까 탑의 공략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플레이어라는 말씀.

“그런데 인제 와서 저와 함께 탑을 오르기를 원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덧붙여 묻는 목소리에 제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봐요, 제이. 제가 말했을 텐데요? 아는 걸 말해주지 않는다면.”

“백작님의 치료를 중단할 거라고 하셨지요.”

제이가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한낱 종인 제가 말씀드려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백작님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어디 한번 말해주세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제로 바니스타에 대해.”

제이는 유리한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 *

제로 바니스타의 기억은 연구실에서 시작됐다.

약품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연구실, 그곳이 제로 바니스타의 고향이었다.

플레이어의 비밀을 파헤쳐 보겠다고 했던가?

제로 바니스타는 그것을 위해 연구실에 잡혀있던 실험체였다. 연구실 내에서 가장 훌륭한 실험체.

“아아아악!”

그는 비명이 들려올 때면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때때로 연구진이 광기에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한 단어에 집중했다.

소망의 탑.

제로 바니스타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탑을 그려보며 비명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에게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나는 꼭 이곳을 벗어날 거야.”

“어떻게?”

“소망의 탑에 플레이어로 들어가는 거지.”

친구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이름을 붙였고, 마침내 그는 ‘제로 바니스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이름을 지어준 그의 친구는 분노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소망의 탑을 끝까지 올라 소원을 빌 거야.”

“무슨 소원을 빌 건데?”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고.”

아이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안심해, 너는 세상이 멸망해도 내가 지켜줄 테니.”

어린 제로 바니스타는 그저 두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친구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는 탑으로 들어가게 됐다. 아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아악! 이거 놔! 놓으라고!”

연구진이 티켓이 새겨진 손목을 도려내려 하자 아이는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다.

“제로! 제로 바니스타!!”

살려 달라는 듯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에 제로 바니스타는 벌벌 떨기만 했다.

하지만 곧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제 친구를 살리기 위해 연구진에게 달려들었다.

연구진들이 메스를 휘둘렀지만, 그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를 구하고자 발버둥 쳤다.

드디어 그의 친구는 탑으로 향하게 됐다.

“제로! 탑에서 만나, 꼭!!”

이후, 제로 바니스타 역시 친구를 따라 소망의 탑에 들어가게 됐다.

제로 바니스타는 살아남는 데 있어 선수였다.

온갖 실험을 겪으면서 몸이 강화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몸은 닳을 대로 닳아 조금만 움직여도 앓아누웠다.

원인은 몰랐다. 그저 실험의 부작용이라 생각할 뿐.

어쨌거나 운이 좋았는지 그는 계속해서 탑을 올랐고 곧 알아차리게 됐다.

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건 바로 정보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온 탑의 정보를 끌어모아 그것을 이용해 남들을 마음대로 휘젓기 시작했다.

필요하면 협박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제로 바니스타는 50층에 진입하게 됐다.

“그리고 ‘뮤즈’를 설립하셨죠.”

제이의 이야기가 끝났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제로 바니스타가 저와 함께 탑을 오르려는 목적은 그 친구분 때문인가 보네요?”

“네, 편지가 날아왔거든요.”

“편지요?”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제이는 기절한 듯 잠들어 있는 제로 바니스타를 흘긋거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위대한 마법사와 함께 악마들의 세계에 있다는 편지가요.”

“위대한 마법사……?”

유리한이 멍하니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에게 위대한 마법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멀린 아서.

니르로르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위대한 마법사이자, 유리한의 친구.

제이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재 공략된 세계는 이곳 ‘엘리아룸’과 ‘무림’뿐입니다. 그러니 악마들의 세계는 70층 이후의 세계일 게 분명하죠.”

그래서 제로 바니스타는 당신과 함께 탑을 오르고자 한 것이라고 제이가 덧붙였다.

“위대한 마법사의 정체는?”

“모릅니다.”

제이가 우물쭈물했다.

“그런데 유리한 님께서 탑에 들어온 것과 비슷한 시점에 그 편지가 왔습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이 적혀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백작님께서는 유리한 님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꼭 당신과 함께 탑을 올라가야 한다고요.”

유리한이 입매를 일자로 다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한 님?”

제이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불렀지만 유리한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유리한 님!”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제로 바니스타의 멱살을 잡아 올려 으르렁거렸다.

“이봐, 제로 바니스타. 이제 그만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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