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디에스, 니르로르랑 요한은?”
“천천히 돌아올 거다.”
디에스 라고가 문을 닫고 들어서며 말했다. 언짢아 보이는 듯한 그의 얼굴에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
“없었다.”
“있었던 것 같은데?”
크흠, 디에스 라고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이렇게 주제를 돌리는 거야?”
“유리.”
나지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픽 웃었다.
“알았어, 그만 놀릴게.”
“제로 바니스타는 어디 갔나?”
“조금 전에 나갔어. 만나지 못했어?”
“만나지 못했다만.”
“그래?”
유리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도대체 그 양반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 거래?”
“공간계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만?”
“나도 그럴 것 같기는 해. 정확하게 어떤 힘인지 몰라서 문제지. 어쨌든 간에 자리에 앉아봐. 할 이야기가 있어.”
디에스 라고가 맞은편에 앉기 무섭게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제로 바니스타의 말로는 천하태평과 만물이 70층을 공략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해. 잘만 하면, 우리가 ‘무림’에 진입할 때까지 69층의 문지기를 처치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
“이유는?”
“44층에서 만년빙정을 얻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하더라고. 69층은 화염 저항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용암 지대래.”
그런 환경을 얼려버리고자 만물은 만년빙정을 얻고자 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만년빙정을 부서뜨렸으니, 뭐.”
유리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만년빙정과 함께 숨을 거뒀던 설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엘리아룸을 벗어나는 거야.”
“하지만 유리, 이 세계를 벗어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
50층 이후의 시험은 그 전과는 다르게 치러졌다.
다른 세계, 즉, 60층 이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존재의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곳, 엘리아룸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는 물, 불, 대지, 바람의 정령왕들이었다.
“다행히도 제로 바니스타가 정령왕들이 어떤 과제를 내리는지 잘 알고 있더라고. 덕분에 그 과제는 쉽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만, 다른 문제가 있나 보군.”
“정답!”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69층의 문지기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용암 지대를 정복하는 것이 필요해.”
하지만 그를 위한 도구인 만년빙정은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고 말았다.
“그런데 제로 바니스타의 말로는 만년빙정 못지않은 아이템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정말인가?”
“응. 물의 정령왕이 불의 정령왕과 함께 만든 아이템으로, 어떤 화마도 잠재울 수 있다고 해.”
“그거 잘됐군.”
“글쎄, 안타깝게도 그렇게 잘된 일은 아니야.”
“흐음?”
디에스 라고가 무슨 뜻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그녀가 애매하게 웃었다.
“먼저, 정령왕은 단 두 번만 만날 수 있다고 해.”
과제가 내려질 때 한 번, 그리고 과제를 끝마쳤을 때 한 번.
“과제를 끝마친 후, 무림의 세계에 진입한 이후에는 절대로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고.”
처음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로부터 정령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물었다.
‘백작님께서 물의 정령왕님을 찾아가 부탁하면 되지 않나요?’
제로 바니스타에게 ‘백작’의 지위를 내린 존재가 다름 아닌 정령왕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엘리아룸의 정령왕들은 단 두 번만 플레이어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백작’의 지위를 얻은 것이, 과제를 끝마치고 그들을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라고.
그 때문에 70층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천하태평과 만물도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등바등 싸우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들 역시 물의 정령왕에게 그런 아이템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무림의 세계에 발을 들인 후 다시는 정령왕들을 만날 수 없게 돼서 문제였지.
“어쨌든, 그래서 제로 바니스타의 도움을 얻기는 힘들어.”
“그러니까 오직 우리의 힘으로만 백작이 말한 아이템을 얻어야 한다는 거군.”
“응,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발생하지.”
“무슨 문제?”
디에스 라고가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유리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아룸의 정령왕들께서 우리 같은 플레이어를 엄청나게 싫어한다고 하더라고.”
얼마나 싫어하는지, 직접 ‘백작’의 지위를 내려줬던 제로 바니스타와도 다섯 마디 이상 말을 나눠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제대로 부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않나?”
디에스 라고가 비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디에스!”
유리한이 빼액 소리 질렀다.
“먼저 대화할 생각을 해야지, 폭력부터 쓸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해!”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오묘한 시선을 보냈다.
“왜?”
“유리,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신기해서 말이다.”
“뭐라고?”
유리한이 놀란 눈을 보였다가 곧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상대가 플레이어라면 주먹이 최고의 대화 수단이기는 하지! 하지만 상대는 플레이어가 아닌 정령왕이라고!”
그것도 이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였다.
“무조건 대화로 상황을 풀어가야 해.”
“하지만 정령왕은 우리 같은 플레이어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우리와 똑같은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을 앞에 내세워야지.”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디에스 라고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고요한이 니르로르를 안은 채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니르로르 씨를 달래느라 그랬어요.”
“거짓말하지 마라, 고요한아. 네가 짐을 언제 달랬다고 그러느냐?”
“어라? 지금 제 이름 불러주신 거예요?”
“그런 적 없다.”
“거짓말! 조금 전에 저를 ‘고요한’이라고 부른 거 맞죠? 유리한 씨도 들었죠?”
고요한이 환하게 웃으며 유리한에게 물었다.
“유리한 씨?”
질문을 던졌던 고요한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였다.
유리한이 흐뭇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그건 디에스 라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에스 씨는 왜 또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
고요한이 불쾌하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디에스 라고는 간단히 그 시선을 무시하며 유리한에게 말했다.
“고요한을 이용하면 되겠군.”
“디에스, 이 경우에는 ‘이용한다’가 아니라 ‘부탁한다’고 해야 하는 거야.”
“그거나 그거나.”
디에스 라고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건가요?”
“아아, 미안해요, 요한. 디에스와 함께 70층 공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거든요. 요한은 들어서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어요.”
디에스 라고와는 다르게 유리한의 곁에서 제로 바니스타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던 고요한이었다.
“정령왕들께서는 플레이어를 싫어한다고 하셨죠?”
“네, 저희 같은 플레이어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고 했었죠.”
저희 같은 플레이어?
고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유리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건 백작님께서 떠나기 전에 말씀해 주신 건데, 물의 정령왕께서는 자신과 같은 색을 지닌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요.”
그리고 고요한은 물빛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더욱이 요한은 플레이어와 탑의 거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유리한이나 디에스 라고와 같은 플레이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이야 완전한 플레이어로 활동 중이라고 해도 요한에게 거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 때문에 유리한은 고요한에게 부탁할 작정이었다.
물의 정령왕을 어떻게든 구슬려 아이템을 얻게끔 말이다.
그 속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고요한이 말했다.
“물의 정령왕님을 만나면 따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분께서 과연 저와 이야기를 나눠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고마워요, 요한. 분명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듣기로 물의 정령왕은 가장 순수한 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플레이어를 싫어하는 거라고 했다. 어떤 플레이어든 탑을 오르는 동안 피를 묻히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요한은 달라.’
물론, 고요한 역시 손에 피를 묻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남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유리한이 고요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고요한은 그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미소를 지어줬다.
디에스 라고는 서로를 향해 웃음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물론, 그 불쾌감은 유리한이 아닌 고요한을 향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니르로르, 왜 그런 모습으로 안겨 있는 거야? 아이의 모습으로 요한의 동정심을 얻을 만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런 일 없었느니라.”
“그럼, 왜 그런 모습으로 요한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거야?”
니르로르가 물끄러미 고요한을 쳐다보며 물었다.
“고요한아, 불편하느냐?”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다지 않느냐?”
“요한이 정말 괜찮아서 그런 말을 하는 거겠어?”
유리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니르로르 씨가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안 돼요, 요한.”
유리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니르로르가 꾸물꾸물 고요한의 품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그러고는.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유리한의 품에 쏘옥 안겼다.
“야, 안 떨어져?”
유리한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니르로르는 그럴수록 그녀의 품을 더더욱 파고들기만 했다.
“요한, 얘 왜 이래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고요한이 애매하게 웃었다. 유리한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제 품에 안겨 있는 니르로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좋아, 내일 정령왕이란 분들을 어디 한번 만나러 가보자고.”
물론, 귀하신 분들 얼굴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