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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32)화 (132/235)

132화 

【 17. 엘리아룸 】

유리한은 날이 밝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물과 불, 바람과 대지의 정령왕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는 제로 바니스타에게 이야기를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황궁에 입궁해서 정령왕들에게 과제를 받기 위해 왔다고 하면 된댔지?”

엘리아룸에는 황가가 존재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건 귀족들이라고 했어.’

탑의 바깥으로 따지자면 입헌군주제의 왕실과 같은 처지로, 실질적인 권력은 가지지 못한 상태라고 제로 바니스타는 설명했었다.

‘귀족들이 있는 것에서부터 예상은 했지만 황가라니.’

탑을 오르면서 황제와 같은 높으신 분을 만나본 적이 없는 유리한이었다.

‘뭐, 직접 만날 일은 없겠지.’

황궁에 방문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정령왕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유리한은 그렇게 동료들과 다 같이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을 찾는 것은 쉬웠다.

엘리아룸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 바로 황궁이었으니까.

“멈추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입구에 다다르자 문지기가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막아섰다. 유리한이 제 앞을 가로막은 창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정령왕들의 과제를 받고자 찾아왔는데요.”

“플레이어셨군, 들어가시오. 안쪽에서 안내인이 나올 거요.”

“네, 감사합니다.”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기 무섭게 백발의 노인이 그들 앞에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플레이어 여러분. 여러분을 안내할 크리스티안이라고 합니다. 다들 저를 따라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뚜벅뚜벅, 대리석 바닥에 구두 소리가 울렸다. 유리한은 잠자코 노인을 따라갔다.

그때, 고요한이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유리한 씨.”

“네, 요한.”

“저분, 단순한 황실 고용인이 아니에요.”

유리한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고요한은 크리스티안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단순한 고용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품 있어요.”

“흐음.”

그러고 보니 단순한 고용인이라고 하기에는 걸음걸이마저 절제되어 있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유리한은 속 편하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신성스러운 공간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촤르륵―!

쇠창살이 내려와 공간의 입구를 전부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짓이죠?”

유리한이 날 선 목소리로 크리스티안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플레이어 여러분.”

그렇게 말한 사람은 크리스티안이 아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티안 옆으로 아무리 많게 잡아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은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레이지 시안 디엔드 엘리아룸입니다.”

“엘리아룸……?”

유리한이 두 눈을 끔벅이다가 황급히 고개 숙였다.

“황실의 일원을 뵙습니다.”

유리한을 따라 모두가 인사했다. 물론, 니르로르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였다.

그 머리를 유리한이 꾹 눌렀다.

- 유리한아, 이게 무슨 짓이냐!

“시끄러, 어서 인사나 해.”

“하하, 괜찮습니다.”

레이지가 손사래를 쳤다.

“용은 엘리아룸에 있어서 신성한 존재죠. 그런 위대한 분께서 제게 인사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 들었느냐,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것이 꼭 ‘내가 이렇게 위대한 드래곤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유리한은 꼴 보기가 싫었다.

그때, 디에스 라고가 물었다.

“보안에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이란 것이 뭡니까?”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맞아요, 전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희를 이렇게 가둔 거죠?”

“먼저, 저는 ‘전하’가 아닙니다.”

레이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유리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실의 일원이지 않나? 그럼, 전하로 불리는 것이 분명할 터.

‘뭐지? 황족을 사칭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리한이 레이지를 향해 의문에 찬 시선을 보낼 때, 그가 말했다.

“저는 엘리아룸의 황제입니다. 그러니 전하가 아닌 폐하지요.”

유리한이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그런! 하지만 엘리아룸의 황제는 분명…….”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익히 알려져 있죠.”

레이지가 씁쓸하게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변장을 했습니다. 저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알거든요.”

딱, 손가락을 맞부딪치기 무섭게 레이지의 모습이 바뀌었다. 유리한이 T-Network를 통해 본 모습이었다.

“이렇게 모습을 바꾸는 것이 고작이지만요.”

레이지가 곧장 원래의 어린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어쨌든, 저는 엘리아룸의 17대 황제인 레이지 시안 디엔드 엘리아룸입니다. 황궁을 방문해 주신 플레이어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또한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니?

유리한을 비롯한 모두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정령왕님들을 찾아주십시오.”

“네?”

“플레이어님들께서 아실까 모르겠지만 이곳, 황궁은 그분들의 신전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아룸의 초대 황제는 모든 정령왕의 계약자였다.

그는 정령왕들의 힘을 이용해 나라를 세웠고, 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신전을 세워 그곳에서 살아갔다.

그곳이 바로 여기, 황궁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분들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님들이 찾아오면 마뜩잖아하면서도 모습을 드러내 과제를 내려주시던 분들인데…….”

레이지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분명 그분들께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한다면서 레이지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크리스티안이 기겁하며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티안, 나는 부탁하는 입장일세. 황제라고 하더라도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도리야.”

말 한번 잘한다 싶었다.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레이지에게 물었다.

“왜 하필 저희죠?”

“여러분께서 바깥세상을 구한 영웅들이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신.”

레이지의 시선이 유리한에게로 향했다.

“유리한 님께서 말입니다.”

그녀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는 레이지에게 물었다.

“그 정보의 출처는 보나 마나 뮤즈의 백작님이겠죠?”

“정답입니다.”

그 빌어먹을 백작이!

유리한이 으득 이를 갈았다.

제로 바니스타가 정령왕들이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유리한은 그를 만나면 딱밤을 날리기로 했다.

아주 괘씸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유리한은 레이지에게 물었다.

“정령왕님들을 저희가 무슨 수로 찾죠?”

“그분들은 57층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설사, 그분들께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했거나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다만?

유리한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레이지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자연 상태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자연 상태라고 하면…….”

“물과 불, 바람과 대지. 자연 본질의 모습을 말입니다.”

유리한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그럼 저희 같은 인간이 그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레이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플레이어니까요.”

‘저기요, 플레이어도 인간이거든요? 플레이어가 무슨 인간을 초월한 제2의 존재인 줄 아나 봐!’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알겠어요, 57층에 가서 정령왕들을 찾아보도록 할게요.”

무림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령왕들을 찾아 그들의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다.

‘잠깐만.’

유리한이 고심에 잠긴 듯 아래턱을 쓸었다.

‘황제의 말대로 정령왕들한테 곤란한 일이 생겨서 연락이 끊긴 거라면.’

자신들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잘만 하면 귀찮게 과제를 수행할 일 없이 무림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수상쩍은 미소에 레이지와 크리스티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 유리한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렇게 비열하게 웃고 있는 것이냐?

“누가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고 그래?”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고는 말했다.

“혹시 57층에서 조심해야 할 게 있나요?”

“마탑을 조심하십시오.”

레이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정령왕들께서는 원래 자유롭게 이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분들이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57층에 머무르고 계시죠. 바로 마탑 때문에요.”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마탑은 만물의 근거지로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레이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말했다.

“그들을 조심하십시오. 정령왕님들과 연락이 끊긴 것도 그들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네, 알겠어요.”

유리한이 활짝 웃었다.

“조심할게요, 폐하.”

물론, 유리한은 조심할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마탑이라. 이번 기회에 싹 쓸어버릴까?’

유리한이 비릿하게 웃었다.

만물의 주요 전력은 현재 70층 공략을 위해 69층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즉, 현재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유리한에게는 그랬다.

유리한이 만물을 쳐부술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을 때, 디에스 라고가 그녀를 불렀다.

“유리.”

“지금 바로 출발할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레이지가 놀라 물었다. 유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휴식이야 지금까지 충분히 취했으니까요.”

“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 텐데요.”

“괜찮아요.”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무기도 방어구도 다른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몇 배는 좋은 것들이니까요.”

좋기만 할까? 유리한과 그녀의 동료들이 착용 중인 것들은 거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렇다면야…….”

레이지가 한발 물러났다.

“그럼,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희만 믿으세요.”

유리한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57층으로 향하게 됐다.

57층에 오르는 건 크게 힘들지 않았다.

도시의 가장 끝,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라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탑인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고요한이 점처럼 작아지는 건물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유리한과 그녀의 동료들을 실은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도착했나 봐요.”

고요한이 두 눈을 반짝였다. 유리한은 펼쳐질 세계에 설레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자, 가자.”

스르륵, 문이 열렸고.

후우웅―!

칼날과도 같은 세찬 바람이 곧장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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