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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36)화 (136/235)

136화 

【 18. 정령왕 】

“고기! 고기!!”

“우왓!”

아이는 안톤 리오스가 들고 있는 고기를 향해 돌진했다. 화들짝 놀란 안톤이 고기를 떨어뜨렸다. 아이는 그것을 잡아 허겁지겁 뜯어 먹기 시작했다.

“야! 땅에 떨어진 거 주워 먹는 거 아니야! 지지야, 지지!”

안톤이 아이한테서 고기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리한 님.”

안톤 리오스가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이 유리한을 불렀다.

“잠깐만요.”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아이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천천히 먹어, 아무도 네 거 안 뺏어 갈 테니까.”

“짐의 것은 안 된다.”

“니르로르, 양보 좀 하지 그래?”

“싫으니라.”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말했다. 그때, 고기를 먹느라 여념이 없던 아이가 올망졸망한 두 눈을 뜨며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뭘 보느냐?”

“못생긴 거!”

“뭐라?”

“못된 거!”

니르로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유리한아, 들었느냐?! 저 어린것이 지금 짐에게……!”

“쉿.”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입을 틀어막고는 아이에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

아이가 어색하게 유리한의 말을 따라 하자 그녀가 물었다.

“어디서 왔니? 탑의 거주민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나 탑의 거주민 아니야.”

“그럼?”

“정령왕.”

아이가 냠냠 고기를 뜯어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 물의 정령왕.”

느닷없는 말에 유리한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고요한도 디에스 라고도, 그리고 만물을 배신한 안톤 리오스도 그녀와 같은 얼굴이었다.

* * *

“아우라, 큰일 났어.”

“이그니스.”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흰 눈보다 하얀 머리칼을 지닌 여자가 불과도 같은 남자를 반겼다.

남자가 초조하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아쿠아가 사라졌어.”

“테라가 잡혀간 건 신경도 안 쓰는구나?”

“그딴 자식 잡혀가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불의 정령왕인 이그니스가 사납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지? 아쿠아가 이대로 그 미친 인간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면…….”

“아쿠아의 보물은 꼼짝없이 늙은 인간에게 넘어가겠지.”

바람의 정령왕, 아우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 금방 찾을 수 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아우라가 허공을 향해 손을 들었다. 내리던 눈이 그 손에 점점이 모여들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우라는 손을 내렸다가 번쩍 치켜떴다.

“인간들이랑 같이 있다고 하네?”

“뭐?!”

이그니스가 놀라 외쳤다.

“이런 미친! 벌써 잡혔단 말이야?! 안 되겠어, 지금 당장……!”

“잠깐만, 이그니스.”

아우라가 당장에라도 마탑을 향해 쳐들어갈 듯이 구는 이그니스를 붙잡았다.

“이곳에 사는 마법사들이랑은 다른 인간들이야. 아쿠아를 위협할 생각은 없는 것 같대. 고기를 먹이고 있다고 하는데…….”

“고기?!”

“응, 고기.”

정령왕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허기를 느낄 수 있었고 끊임없이 뭔가를 먹기를 원했다.

안 그래도 정령왕으로서 자각이 없는 몸인지라 그러지 못하게 몇 번이고 막았었는데 그것이 결국 이 사달을 만든 모양이었다.

“젠장, 정령왕이 고기라니! 육식을 하다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아쿠아를 찾았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우라가 싱긋 웃고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곁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이 있는 것 같네?”

“뭐?”

이그니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으르렁거렸다.

“설마, 그 미친 늙은이가 아쿠아랑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응, 그건 아니야.”

아우라가 여상하게 웃으며 이그니스에게 물었다.

“한번 가볼까?”

“뭐?”

이그니스가 제정신이냐는 듯한 얼굴로 아우라를 쳐다봤다.

“혹시 모르잖아.”

아우라가 싱긋 웃었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플레이어들일지도.”

“하지만 아우라, 네가 말했잖아. 아쿠아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이 있는 것 같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가봐야 하지 않겠어? 그 녀석이 어떤 식으로 아쿠아를 위협할지 모르잖아. 그렇지?”

이그니스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곧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좋아! 죽기야 하겠어?! 한번 가보자고!”

버럭 외치는 그를 보며 아우라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그 시각.

“물의 정령왕님, 천천히 드세요. 아무도 안 뺏어 가니까요.”

“우움.”

물의 정령왕, 아쿠아는 한껏 고기 섭취 중이었다.

* * *

“유리, 저 꼬마 녀석이 정말 물의 정령왕이 맞나? 아무리 봐도 길 잃은 꼬맹이 같은데.”

“스스로 물의 정령왕이라고 했으니까 맞겠지.”

유리한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니어도 돌봐줘야지. 이런 눈 속에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얼어 죽고 말걸?”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멎었지만 그래도 움직이기에는 추운 날씨였다. 그때, 사슴 고기를 다 먹은 아쿠아가 고요한을 보고는 외쳤다.

“예쁜 거!”

“네?”

“좋아!”

아쿠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고요한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구원자를 찾았다.

“유, 유리한 씨.”

“안아주세요. 요한이 좋은가 봐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고요한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말에 따라 아쿠아를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이 꼴불견이라는 듯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말했다.

“유리한아, 저 꼬맹이의 눈이 잘못된 것 같으니라. 짐에게 못생겼다느니 못됐다느니 하더니만.”

“니르로르, 인간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있어.”

“무슨 말?”

“아이들의 눈은 솔직하다.”

그러니까 너는 못생기고 못된 것이 맞다는 말이었다. 니르로르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은 뭐 어쩌라고, 하는 듯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너 못생긴 거 맞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아쿠아였다. 니르로르가 으르렁거렸다.

“저 꼬맹이가…….”

“그리고 못된 것도 맞아!”

아쿠아가 니르로르 따위 무섭지도 않다는 듯 재잘거렸다.

“너, 드래곤! 드래곤은 정령들의 친구! 하지만 너는 못된 드래곤!”

그 말에 니르로르의 붉은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정령왕이 맞기는 한가 보군.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아서 긴가민가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유리한에게 니르로르가 말했다.

“말 그대로다. 이 녀석은 정령왕이 맞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녀석들과는 다르게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그래?”

니르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은 본디 순환하는 존재들이다. 때가 되면 잠들었다가 어린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정령왕으로서 가져야 할 지식과 힘을 모두 깨우친 채로 말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쿠아! 나는 아쿠아!”

“그래, 아쿠아는 다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의 정령왕으로서 아무런 자각이 없는 것 같군.”

니르로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아쿠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아이는 곧 손가락을 들고 외쳤다.

“자각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알아! 너는 못된 드래곤! 못생긴 드래곤!”

“자꾸 못생겼다고 하지 마라, 이 빌어먹을 꼬맹이야.”

니르로르가 아쿠아의 머리에 딱밤을 날렸다.

“애한테 괜한 화풀이를 하는군.”

디에스 라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쿠아는 우는 소리를 내며 유리한의 품을 파고들었다.

“으앙! 저게 나 때렸어!”

유리한이 아이를 보듬어 안고는 말했다.

“아쿠아 님의 말씀대로 니르로르는 못생기고 못된 드래곤이니까요. 아쿠아 님이 너그럽게 참아주세요.”

“응!”

유리한이 달래자 아쿠아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르로르는 마뜩잖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표정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으니.

“왜 그렇게 봐요, 요한?”

그건 바로 고요한의 시선이었다.

제 시선을 유리한이 알아차릴 거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인지 고요한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아이를 돌보는 데 도가 튼 것 같아서요! 저는 아이가 조금 어렵거든요.”

“그래요? 시우를 잘 돌봐줬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고요한이 두 뺨을 붉히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유리한이 픽 웃고는 말했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에,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동생이 엄청나게 어렸었거든요.”

세 살이었을 것이다. 혼자서도 생존하기 벅찬 시절, 유리한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아득바득 살아남았었다.

“그래서 그런가? 제가 좀 육아를 잘해요.”

유리한이 아쿠아를 부둥부둥 안아주며 웃었다. 아쿠아 역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맞아! 육아 잘해!”

“고마워요.”

아이의 순수한 칭찬에 유리한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불기둥이 날아온 건 그때였다.

“당장 아쿠아를 내려놔!”

어둠이 내려앉은 수풀 안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그니스!”

아쿠아가 유리한의 품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그니스에게 달려가 안겼다.

“이그니스! 이그니스, 아우라는? 아우라는 어디 있어?”

“여기 있어, 아쿠아.”

하얀 머리칼을 지닌 아우라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녀를 보고서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우라는 인간들을 향해 눈인사를 보내고는 말했다.

“이그니스, 다짜고짜 인간들을 향해 불을 쏘아버리면 어떻게 해? 저 인간이 피하지 않았으면 아쿠아가 맞았을걸?”

“내가 어련히 그것 하나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들을 공격했을까 봐?”

“그래, 어련하시겠지.”

아우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쿠아에게 인사했다.

“아쿠아, 잘 있었어? 성역을 나가버리면 어떻게 해? 이그니스가 엄청 걱정했어.”

“나 잘못 없어! 배고파서 나갔을 뿐이야!”

“그래, 아쿠아는 잘못 없어.”

아우라가 싱긋 웃고는 얼어붙어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이그니스를 대신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게. 나는 바람의 정령왕인 아우라.”

“불의 정령왕인 이그니스다. 그런데 인간.”

화르륵, 불꽃이 튀더니 이그니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유리한의 코앞에 나타났다.

“너, 이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있는 거지?”

니르로르의 목덜미를 잡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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