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 *
유리한이 화산파의 3대 제자, 청하연에게 인사를 받고 있던 그때.
“그래, 그렇단 말이지요?”
천하태평의 종주, 구천하가 제 앞에 앉아 있는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실망입니다, 수장.”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 그레이시 아서가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실망이라니? 애초에 그대들이 69층의 문지기를 진작 격파했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요.”
“하하, 그건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구천하가 능글맞게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유리한의 위협이 무섭다면서 우리와 손을 잡을 때는 언제고 왜 저희 탓을 하는지 모르겠소만?”
그레이시 아서가 그 말에 이를 으득 깨물었다가 웃으며 말했다.
“무림의 판도를 뒤집어 놓겠답시고 올라간 것은 천하태평, 그쪽이요. 하지만 실상은 어떻소?”
그레이시 아서가 재차 물었다.
“판도를 뒤집기는 무슨, 아홉의 문파가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고 있지. 그중에서 천하태평은 무엇을 하고 있소?”
그러고는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냥 두 손 놓고 구경 중이지. 그들 모두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런, 수장.”
이번엔 구천하가 끌끌 혀를 찼다.
“우리는 와해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뭐라?”
묻는 말에 구천하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장의 말대로 아홉의 문파는 서로를 물고 뜯으며 싸우고 있지. 바로 우리가 뿌려놓은 불화의 씨앗 덕분에.”
“불화의 씨앗이 아이템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소.”
그레이시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우리 천하태평은 각 문파에 섞여 들어가 맑은 물이 탁해지게끔 먹물을 하나씩 뿌렸소이다.”
그 말에 그레이시 아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종주, 알기 쉽게 좀 말해주게.”
“나 참, 수장.”
구천하가 쯧쯧 혀를 찼다.
“당신은 이 탑의 가장 위대한 마법사이면서 어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요?”
“자네가 말을 너무 추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나 보군.”
“그거야 우리는 문학적 민족인지라 말이오.”
대한민국 국적의 구천하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레이시 아서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구천하는 그런 그를 향해 사람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각 문파에 사람을 한 명씩 심었소이다. 그리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지.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잖소? 서로를 믿지 못하는 순간 끝이다.”
“그게 맑은 물에 먹물을 뿌렸다는 거였군.”
“그렇소.”
구천하가 싱긋 웃고는 물었다.
“어쨌든 그래서 가지고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아이템은 결국 가지고 오지 못했다는 것인지?”
“그렇다네.”
그레이시 아서가 당당히 말했다. 구천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제 손으로 얻어 오겠다고 아주 장담을 하더니.
“이제 어쩔 셈이오?”
“어쩔 셈이기는?”
그레이시 아서가 씨익 웃었다.
“우리가 필요로 했던 보물은 유리한이 가지고 있다. 그녀가 괜히 그 아이템을 가진 건 아닐 테지.”
유리한이라면 분명 저 높은 곳을 노릴 터. 그리고 그곳을 향하기 위해서라면 탑을 올라가야 했다.
“유리한이 가진 아이템을 69층에서 빼앗는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오, 종주.”
구천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그를 향해 그레이시 아서가 히죽거렸다.
“이제 와서 빠지겠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뭐, 그래도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런다고 유리한이 자네를 용서할까?”
구천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망칠 구석이란 없다.
결국 구천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구천하가 그레이시 아서와 함께 저를 노리는 줄도 모르고 유리한은 태평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대종남파의 3대 제자, 이룡이 협객을 뵙습니다!”
화산파에 이어 종남파라.
‘뭔데, 그거.’
유리한이 어릴 적, 무협 소설을 꽤 좋아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화산과 종남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단다.’
묻지도 않았던 것을 아버지는 즐거워하며 그렇게 말해주고는 했었다. 그 싸움을 보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면서.
‘아버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좋아하셨겠네.’
유리한이 픽 웃고는 말했다.
“네네, 그래서 대화산파의…….”
“청하연이라고 합니다.”
“네에, 청하연 님과 대종남파의 이룡 님? 두 분께서는 왜들 그렇게 싸우고 계셨던 건가요?”
“그거야 섬서 지방의 우두머리를 가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섬서요?”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디에스 라고가 그녀에게 속닥거렸다.
“저 두 문파가 있는 지역이 ‘섬서’라 불리고 있는 모양이군.”
“아하.”
무림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은 T-Network에도 알려져 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50층에 진입하는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100명 중 열 명 남짓할 정도로 적었다.
그들 중에서 또 탑을 오르는 숫자는 열에 한 명일 정도였고.
‘하지만 천하태평이라면 다를 것 같은데.’
그들은 60층, 그러니까 무림의 세계를 장악 중인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평판은 완전 최악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에게 질문이 날아들었다.
“협객이시여, 송구하오나 혹시 마교의 끄나풀은 아닌지요?”
“마교요?”
“구천하라고 하는 천마가 세운 빌어먹을 집단입니다.”
구천하는 유리한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야,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에 몇 번이고 힘을 겨뤘던 플레이어였으니.
‘그런데 마교라니?’
그가 세운 집단의 이름은 천하태평일 텐데?
유리한이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디에스 라고가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들의 사람이 아니다.”
“역시 다행입니다! 저, 청하연이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군요!”
“멍청한 놈! 저들이 거짓을 말하는 걸 수도 있지 않는가! 이래서 화산 놈들이란!”
“뭣이?! 지금 말 다 했는가!”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다시금 검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을 붙잡아 싸움판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 생각보다 무림은 살벌한 곳인 것 같아.”
“그러게요.”
디에스 라고가 곳곳에서 끙끙 앓아대는 무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제 말이 그거예요.”
유리한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소리와 함께 싸움이 끝났다.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디에스 라고가 날린 돌덩이에 청하연과 이룡, 화산과 종남의 어린 용이라고 불리는 두 남자가 그대로 나자빠졌기 때문이다.
“오, 이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 디에스!”
유리한이 빼액 소리 질렀다.
“기절시키면 어떻게 해?”
“하지만 유리, 그대로 뒀으면 해 지는 줄 모르고 계속 싸워댔을 거다. 그리고 우리는 갈 길이 바쁘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유리한은 한시라도 빨리 69층을 향해 올라가야 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엘리베이터가 더는 위로 움직이지 않아.’
정확히는 60층, 엘리베이터에 표시되어 있는 숫자는 그것이 끝이었다.
60층보다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말씀.
유리한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됐을 텐데.”
“아서라, 그렇다면 자신들이 먼저 말해주겠답시고 싸웠을 거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유리한은 결국 기절한 무인들을 그림자 아래로 끌고 와 눕히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지? 마을을 찾아볼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우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십의 장정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두 무리가 달려오고 있다는 거였다.
고요한이 황급히 쓰러져 있는, 수십은 되는 듯한 무인들을 보고는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죠? 오해받기 좋은 상황인데요?”
그 말대로였다. 유리한은 고민하다가 계책을 냈다.
“일단 나무 위로 올라가서 상황 좀 봐요!”
괜찮다 싶으면 모습을 드러내고, 그러지 않으면 정보만 얻고 도망가는 거지!
유리한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무 위로 올라갔다.
* * *
그녀가 일행들과 함께 나무 위에 올라서자마자 도착한 여럿의 장정들이 서로를 향해 빽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우 시끄러.’
유리한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네놈이 기어코 잠자고 있던 우리 화산을 건드리는구나!”
“너희야말로 감히 겁도 없이 우리 종남을 건드려?! 오늘이야말로 본때를 보여주마!”
우렁찬 고함 소리가 곳곳에서 튀어 나왔다.
곧 검이 맞부딪치고 주먹이 날아들고 창이 허공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태평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화산파의 2대 제자, 백명.
그는 싸움판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상황을 관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이름을 날릴 거라고 소문이 자자한 그였지만 백명은 기쁘지가 않았다.
‘참으로 위태롭도다.’
화산도, 그리고 자신들과 부딪치고 있는 종남도. 무림의 모든 문파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교.’
수십의 협객이 세운 그 빌어먹을 곳에 의해서 말이다. 다른 협객의 말로는 ‘천하태평’으로 불린다고 하던가?
‘웃기는 소리를.’
그들 때문에 무림은 아주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으아악!”
백명의 옆으로 3대 제자가 나뒹굴었다. 백명도 꽤 아끼는 아이였던지라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검을 꺼내 들었다.
화산의 검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다. 그중 백명의 검은 무림 내에서도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당장 그가 검을 꺼내 들자 곳곳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들 하지.”
나지막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서로 검을 맞대던 무인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싸움을 먼저 시작한 건 너희 화산파다! 그런데 그만하자니?! 누구 마음대로 그만하자는 거냐!”
종남파의 무인이 검을 치켜들었다. 백명이 작게 숨을 내쉬고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읏차!”
나무 위에서 내려온 유리한이 백명을 노리던 검을 가볍게 쳐냈다.
“안녕하세요?”
유리한과 시선이 마주친 백명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유리한은 그를 보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지나가던 협객, 유리한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