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사파 놈들이 쳐들어왔다!”
“죽여라! 저 빌어먹을 사파 놈들을 모두 죽여!”
객잔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목소리들에 유리한이 물었다.
“으음, 저희도 도와야 할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백명이 향을 피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파는 저희들의 적. 모든 정파의 적이지요.”
그 정파란 건 ‘화산’과 ‘종남’을 말하는 게 분명할 터.
‘그런데 조금 전까지 서로 싸우고 있었잖아?’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사파든 마교든 정파란 세력의 공통된 적인 것 같았다.
‘다행이네.’
유리한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정의로운 도사님께 편하게 안전을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백명이 꾸벅 인사하고는 객잔 밖으로 나갔다.
콰광, 그가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순간에도 요란한 폭음은 계속됐다.
“괜찮을까요?”
“괜찮겠죠.”
유리한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요, 유리한 씨. 저분들 말고 니르로르 씨요.”
고요한의 품에는 어린아이의 모습인 니르로르가 안겨 있었다. 여전히 기절한 채로 말이다.
유리한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별 이상이 없으니 자신이 이렇게 멀쩡한 걸 테다. 니르로르는 분명 말했었다.
- 짐의 죽음으로 느끼게 될 허탈감과 박탈감, 공허감. 그 모든 감정을 말이다.
허탈감과 박탈감, 공허감.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감정.
니르로르가 죽는다면 유리한은 그것들에 좀먹히게 될 거라고 했다. 그거야 무섭지 않았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에 많이 느꼈으니까.’
부모를 제 손으로 죽였다. 같이 웃으며 등교하던 친구가 몬스터에 먹히는 걸 그냥 지켜만 봐야 했다.
그러니 그런 감정들이야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왜 불안하지?’
유리한은 한동안 니르로르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
“유리한 씨?”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유리한은 말없이 고요한에게 다가가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았다.
“방에 데려다 놓을게요. 두 사람 다 천천히 먹고 와요.”
“잠깐만, 유리.”
니르로르는 유리한을 죽였었다. 정확히는, 유리한이 그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어쨌거나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과 니르로르를 단둘이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어나려고 했건만.
“디에스 씨, 저대로 두죠.”
고요한이 앞을 막았다. 디에스 라고가 불쾌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고요한은 예쁘장하게 웃었다.
“유리한 씨도 생각이 있으니까 저러신 거겠죠. 그보다 저희는 배나 좀 채워요.”
“이게 맛있나 보군.”
디에스 라고가 가리킨 것은 벽곡단이었다. 듀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몇 번이고 먹었던 더럽게 맛없는 음식.
고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요. 리스체가스성에 있을 때는 이것보다 더 맛없는 것도 먹었었거든요.”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으로부터 고요한의 과거를 얼핏 들었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벽곡단을 우물거렸다.
콰앙!
가까이에서 울린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는 접시 위의 벽곡단을 모두 해치웠을 거다.
“크흑, 피, 피하십시오!”
객잔 안으로 백명과 함께 길을 떠났던 화산의 제자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사파들이 침입한 것 아니었나!”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파 놈들이 마교 놈들과 힘을 합쳤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사파와 마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서로 눈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파는 ‘만물’이고 마교는 ‘천하태평’이었다. 두 세력 모두 유리한의 적.
“유리가 나서기 전에 정리하도록 하지.”
“네, 디에스 씨.”
두 협객이, 아니, 플레이어가 각자의 무기를 챙겨 들고 객잔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콰과광―!
“요란하네.”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침대 위에 눕히고는 중얼거렸다.
객잔 가까이에서 들리는 폭음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백명이란 사람, 설마 밀리고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만물의 고위 마법사들이 날뛰고 있는 거라면 말이다.
“야, 니르로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니르로르는 말이 없었다. 그는 57층, 정령들의 세계에서 기절한 채로 쭉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고요한이 혹시 몰라 힐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니르로르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자는 공주도 아니고. 아, 수컷이니 왕자님인가?”
어쨌든 간에.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
유리한은 두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아니,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지한.
꼭 제 동생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상하단 말이야.’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는, 그러니까 니르로르는 어린 시절의 유지한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망할 드래곤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되다니.
“야, 빨리 일어나.”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평소의 그였다면 무엄하다면서 펄쩍 뛰었을 테다. 그리고 자신은 무시했을 테지.
“생각해 보면 웃기지 않냐?”
눈앞의 아이는 자신을,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세계의 모든 빛을 앗아 갔던 드래곤이다.
그리고 저는 그런 드래곤을 물리쳤던 위대한 영웅.
서로 함께할 수 없는 사이인데 이토록 가까워져 버렸다.
유리한이 픽 웃었다.
“멀린이 지금 우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펄쩍 뛰겠지.”
유리한이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굉음은 몇 번이고 울렸다.
“후우,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네. 그 백명이란 사람, 우리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더니.”
유리한이 귀찮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덥석,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 *
“니르로르?”
불린 이름에 니르로르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어느새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그리고 짙은 붉은 눈.
“야, 갑자기 왜 이래?”
짜증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르로르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저를 부른 여자를 쳐다봤다.
유리한.
스스로를 희생해 자신을 죽였던 미친 인간.
그리고 종속 계약으로 묶여버린 영혼의 짝.
니르로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유리한.”
“왜.”
“짐은 긴 꿈을 꾸었느니라.”
“그렇겠지.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한 상태였는 줄 알아?”
“모른다.”
관심 또한 없었다.
니르로르, 그는 기나긴 꿈을 꿨다. 바로 태어날 적의 꿈이었다.
어둠의 드래곤, 그 본명은 블랙 드래곤이었다.
물과 불, 바람과 대지.
드래곤은 네 자연과 맞춰 종족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은 블루 드래곤, 불은 레드 드래곤, 바람은 화이트 드래곤, 그리고 대지는.
‘블랙 드래곤.’
니르로르의 눈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본디 블랙 드래곤은 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개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오염됐고 결국 땅이 아닌 어둠을 지니게 됐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니르로르.
모든 빛을 잡아먹는 어둠의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본디 두 눈 역시 새까맣게 물들어 있어야 하건만 어째서인지 그의 눈만큼은 무엇보다도 붉었다.
니르로르는 레드 드래곤이었다는 어미의 영향력이겠거니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는 꿈을 꿨다.
드래곤과 정령들이 사는 세상. 그 세상은 오염된 블랙 드래곤이라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평화로웠다.
그래, ‘탑의 주인’이라 자칭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던 남자만 아니었다면, 니르로르의 세상은 줄곧 평화로웠을 테다.
“나는 계약했다.”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차렸으면 어서 일어나. 아님, 드래곤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든가.”
“유리한.”
“왜.”
니르로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어어?!”
유리한은 그대로 그 품에 풀썩 안기게 됐다. 디에스 라고 못지않은 탄탄한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화르륵, 얼굴이 불타올랐다.
유리한은 어떻게든 니르로르의 품에서 빠져나가고자 발버둥 쳤다.
“야! 이 빌어먹을 드래곤 새끼야! 이거 안 놔?!”
“잠깐만.”
니르로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짐의 이야기를 들어다오. 아니, 들어줘.”
그답게 명령했으면 좋았을 것을, 니르로르는 유리한에게 부탁했다.
그 부탁을 유리한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지 들어보자.”
바깥의 굉음은 조금 전보다 줄어들었다.
‘디에스와 고요한이 결국 나섰나 보네.’
그렇다면 상황은 빠르게 정리될 터. 유리한은 그때까지 니르로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가 얌전히 있기로 하자 니르로르가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짐은 드래곤이다.”
“알아.”
“짐의 세상에 남아 있던, 아니, 나의 세상에 남아 있던 마지막 블랙 드래곤이었지.”
“뭐?”
유리한이 슬쩍 고개를 들어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그의 붉은 눈이 유리한에게 향했다.
“그것 아느냐? 녀석은, 그 빌어먹을 녀석은 거래를 했다. 드래곤과 정령들, 그리고 인간. 그러니까 짐이 살던 세상과 말이다.”
유리한은 니르로르가 말한 세상이 바로 아래층, 정확히는 아래에 있던 세계인 ‘엘리아룸’인 것을 알아차렸다.
“정령왕들은 그 녀석에게 부탁했지. 이 세상을 위협하는 블랙 드래곤을 없애달라고. 그 대가로 그 녀석은 말했다.”
니르로르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나오는 말이라곤 없었다. 그가 예상했다는 듯 픽 웃고는 말을 이었다.
“짐은 그래서 너희의 앞에 나타나게 됐다. 너희가 파괴해야 하는 대상으로, 그리고 너희를 파괴해야 하는 존재로.”
이야기 도중 많은 것이 생략됐지만 유리한은 깨달았다.
“그 녀석, 탑의 주인이지?”
니르로르가 말없이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말했다.
“탑에 들어오고 나서 꾸준히 들었거든. 그 ‘주인’이란 녀석을.”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그 자식이 원흉이구나?”
나의 세상에 ‘튜토리얼’이란 명목 아래 ‘플레이어’가 나타난 것도.
튜토리얼이 끝난 후, ‘소망의 탑’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도.
“모두 그 녀석 때문이구나?”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