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백명은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 화산은 찢긴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합니다.”
“종남이나 다른 세력과 힘을 합쳐 사파와 마교를 해치우고 싶다는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백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놈들은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하고 그 재산을 취하고 있는 녀석들입니다.”
“그래요?”
유리한이 놀라 물었다. 마교, 그러니까 ‘천하태평(天下泰平)’의 종주인 구천하는 힘에 미친 자였다.
유리한 역시 그건 알고 있었지만, 그 힘으로 남을 해한다거나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디에스 라고가 말했다.
“유리, 네가 죽고 나서… 아니, 사라지고 나서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사람 하나 바뀌는 건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란 말씀.
유리한은 쓰게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구천하, 그 빌어먹을 아저씨는 변하고 말았구나.
그것도 꽤 안 좋은 쪽으로.
입안이 썼다. 그때, 니르로르가 말했다.
“유리한아, 짐과의 대화를 잊지 말아라.”
“안 잊어.”
어떻게 잊을까? 또한, 니르로르와의 대화에서 유리한은 자신의 결심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 탑을 부순다.
탑의 주인인지 뭔지, 그와 거래하여 계약된 세상인지 뭔지, 아무 상관 않고 이 탑을 부술 테다.
생각을 정리한 유리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네?”
백명이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에 유리한이 웃으며 답했다.
“화산으로 가자고요.”
유리한의 말에 백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다친 사람도 있지 않나요?”
“아, 그분들은 협객님께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백명이 말한 협객은 고요한이었다. 유리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요한, 자신의 힘을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에요.”
“죄송해요, 유리한 씨. 하지만 다친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이 가서요.”
고요한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그들은 백명과 함께 화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리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물의 마법사들과 천하태평의 무인들이 함께 이곳을 공격했다고 했지?’
그 공격은 화산과 종남, 무림의 거주민들을 노리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협객, 즉, 플레이어인 자신들을 노린 게 확실했다.
‘누굴까?’
유리한이 백명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누가 우리의 존재를 알린 걸까?’
화산이든 종남이든, 유리한이 만난 두 세력 중 한 곳에 그들의 끄나풀이 있다.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어.’
더욱이 그 끄나풀의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가는 유리한이었다.
44층, 북해빙궁에서 놓쳤던 만물의 마법사.
그 빌어먹을 녀석이 화산과 종남, 이 두 세력 중에 누군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유리한의 두 눈이 매섭게 빛을 냈다.
* * *
유리한이 찾고 있는 마법사는 지금 벌벌 떨고 있는 중이었다.
백명, 아니, 그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만물의 마법사 리신은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강해졌어!’
44층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스탯 능력치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소망의 탑에서 그들과 견줄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수장님도…….’
그렇게 생각하던 리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자신의 수장, 그레이시 아서는 그 위대한 마법사인 멀린 아서의 하나뿐이자 마지막 제자였다고 한다.
멀린 아서의 모든 마법을 받아들인 유일한 마법사.
이 탑, 최강의 마법사인 그를 그 누가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리신은 제 얼굴 가죽을 괜히 어루만지고는 웃는 낯으로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채비가 끝나면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천천히 준비하세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백명, 아니, 그로 위장한 리신 역시 웃고는 몸을 돌렸다.
“사형!”
유리한이 있던 곳에서 내려오자마자 화산의 제자들이 리신에게 달려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저희와 함께 간다고 합니까?”
“그래, 간다고 하더구나.”
“다행이다……!”
제자들의 얼굴에 활짝 꽃이 피었다. 리신은 흐뭇하게 웃었다.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겨우 50층에 진입했지만, 그 위의 세계인 이곳에 올라오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마법사들.
‘내려가면 좀 예뻐해 줘야겠어.’
리신이 그렇게 음흉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와 어깨 위에 앉았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리신이 제 어깨 위에 앉은 것을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너희, 곧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들 하거라.”
“네, 사형!”
화산의 제자들이 허리 굽혀 대답하고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명은 2대 제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였다. 또한, 현재 3대 제자를 이끌고 있는 유일한 그들의 사형이었다.
화산 내에서도 인품이 훌륭하여 따르는 자가 많은 백명에게 반기를 드는 자라고는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편리했다.
이, 몸이.
리신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는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동시에 투명한 막이 그를 감쌌다.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차단하는 마법이었다.
리신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이런 식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 나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그딴 식으로 일을 망치지만 않았다면!
쨍하니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명이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내가 언제 일을 망쳤다고 그래? 나는 분명히 말했어. 유리한을 이곳에서 치는 건 미친 짓이라고.”
- 암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유리한과 함께 우리와 싸울 수 있어? 우리 쪽 사상자가 얼마나 나온 줄 알아?
“페트라.”
리신이 앓듯이 제게 연락한 마법사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리신’이 아니라 화산의 2대 제자, ‘백명’이야. 그 상황에서 너희에게 붙었다가는 어떻게 됐겠어?”
분명 죽었을 거다.
디에스 라고의 창에 찔렸을 테고, 언제 그렇게 성장했는지 모르겠지만 고요한의 검에도 당했을 거다.
“머리 좀 굴려, 페트라. 그리고 유리한은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았어. 우리와 싸운 건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그녀의 동료들이었지.”
그런데도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리신이 쯧,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한심하다는 듯한 어투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괜히 움직이지 말라고.”
- 하지만 절호의 기회였다고! 이곳은……!
“도망칠 구석이라고는 없는 협곡이지. 그나마 도망칠 구석이라고 하면 하늘이랄까?”
리신이 창밖의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유리한은 잘 도망갔을 거야.”
- 뭐?
“그야, 드래곤이 있잖아.”
그것도 죽음의 드래곤, 니르로르.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플레이어들은 모두 알아차린 상태였다.
니르로르,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드래곤이 유리한의 옆에 있다.
‘북해빙궁에서 똑똑히 봤었지.’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었다.
니르로르, 그가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 드래곤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어쨌거나 이 세상을, 그러니까 탑 밖의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존재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존경해 마지않는 수장께서는 니르로르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리신은 말했다.
“앞으로 내가 연락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
- 싫어! 천하태평 놈들이 얼마나 막무가내인 줄 알아?!
“알지. 하지만 걔들이랑 움직이기로 한 건 너잖아.”
리신이 뚱하게 말했다.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화산으로 데리고 갈 거야. 다음 기습은 화산에서 펼치도록 해.”
- 뭐? 너 미쳤어? 화산의 장문인이 어디 호락호락한 양반이야?
“괜찮아, 그 인간은 제 사람을 아주 잘 믿거든.”
그것도 재능이 출중한 인간을.
그리고 백명은 장문인이 가장 아끼는 그의 사람이었다. 리신이 제 얼굴 가죽을 쓰다듬으며 히죽거렸다.
“장문인은 내가 처리할게.”
자신이 가장 믿던 사람에게 찔리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리신은 간혹 그것이 궁금해졌다.
‘뭐, 생각해 봤자 내가 어떻게 알겠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가볍게 지운 리신이 입을 열었다.
“페트라, 너는 내가 신호를 줄 때 화산을 기습해. 천하태평의 무인들과 괜히 싸우지 말고.”
- 젠장, 수장님은 왜 너를 이곳의 우두머리로 앉힌 거야!
“그야 내가 너희 중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리고 실력도 있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날아 들어왔다. 리신은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나비를 주먹 쥐어 부서뜨려 버렸다.
“하여튼 간에 시끄럽기는.”
리신이 쯧, 혀를 차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흡……!”
그는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꾹 깨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한이 생글 웃는 낯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거지? 내가 나눴던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그러지는 않았을 거다. 혹시 몰라 소리 차단 마법을 주변에 펼쳐 뒀었으니.
리신이 마법을 거두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협객, 무슨 일입니까?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네, 다 끝났어요. 어차피 챙길 짐도 별로 없었거든요. 모두 인벤토리에 집어넣었으니.”
“인벤토리라…….”
리신이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치고는 말했다.
“협객들이 가지고 다니는 수상한 보물 주머니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온갖 무기와 식량 등등을 보관한다죠?”
“협객을 만난 게 처음인가 봐요, 백명.”
“네, 부끄럽게도요.”
백명, 아니, 리신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협객께서는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오신 겁니까? 사색에 잠겨 있느라 오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군요.”
“아하, 사색에 잠겨 계셨구나.”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저기요, 백명.”
성큼, 그의 앞에 다가선 유리한이 예쁘장하게 웃으며 날 선 목소리를 뱉어냈다.
“나는 거짓말하는 새끼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해. 뒤통수 맞은 적이 꽤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