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백명, 아니, 리신이 꿀꺽 침을 삼켰다. 들려온 목소리에는 살기가 실려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비틀고, 베어버릴 듯한 살기가.
리신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협객께서는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저는 정말로.”
“사색을 즐기고 계셨나 보네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살기가 순식간에 거둬졌다.
리신은 자신도 모르게 제 목을 한 번 어루만지고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만 화산으로 출발해 볼까요? 사제들도 준비를 끝마쳤을 겁니다.”
“안 그래도 다들 백명 님을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하하, ‘님’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저보다 훨씬 높으신 분께서 제게 존칭이라니요.”
그 말에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이쪽이 편해서 그런 거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리신은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유리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회를 엿봐서 죽여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유리한은 강했다. 어쩌면 존경해 마지 않는 수장, 그레이시 아서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가 유리한일 터였다.
‘그런 그녀를 내가 죽인다고?’
하지만 그래야만 제가 살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 북해빙궁의 그 마법사란 걸 알아차리는 순간 유리한은 제 목을 날릴 게 뻔했다.
그러니까…….
리신이 제게서 몸을 돌려 앞서 나가는 유리한을 쳐다봤다. 손에 암기를 든 순간.
“아, 맞다.”
유리한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리신이 흠칫 놀라 앞을 쳐다봤다.
유리한이 살짝 고개를 돌려 예쁘장하게 웃었다.
“화산의 검은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기대되네요.”
“하하, 그렇지요.”
리신이 꿀꺽 침을 삼키며 손에 들려있던 암기를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법사가 암기라니. 하지만 애초에 리신은 어떤 모습이든 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마법사라고 해도 암기를 다루는 건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더욱이.
‘이번 몸은 분신이 아니란 말이야! 유리한이 나를 알아차리고 죽이려 들면 피할 구석 따위 없다!’
북해빙궁 때와 달리, 리신은 지금 직접 자신의 몸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만물의 수장인 그레이시 아서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고, 리신 역시 작전에 있어서 그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리신이 속으로 이를 으득 갈며 유리한을 쳐다봤다. 차마 노려보지는 못했다.
그 순간, 두 눈이 멀게 될까 싶어서였다.
“자, 그럼. 백명 님 어서 가볼까요? ‘화산’이란 곳이 너무 궁금한 거 있죠?”
“하하, 마음에 드실 겁니다.”
리신은 유리한과 함께 웃는 낯으로 길을 나섰다.
한 가지 확실해졌다. 제힘으로 유리한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탑 바깥, 여느 소녀와 같이 두 뺨을 붉게 물들이며 ‘화산’이란 곳을 궁금해하고 설레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리신의 추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찾았다, 빌어먹을 마법사.’
유리한이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백명’이라고 했던가? 범상치 않은 녀석인 줄은 알았는데, 설마 저 껍데기가 거짓인 줄은 몰랐다.
‘북해빙궁의 그 망할 새끼가 저 안에 있는 거겠지.’
유리한이 으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빨을 숨겨야 할 때였다.
이름 모를 마법사의 목을 여기서 베는 것보다는, 그의 목적을 알아낸 후 죽이는 것이 좋았다.
그 때문에 유리한은 마법사에게 유예 시간을 주기로 했다. 마법사로서는 알 리가 없는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리신, 아니, 백명과 함께 객잔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화산의 제자들와 유리한의 동료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 오셨습니까?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했다. 조금 전의 전투로 지쳤을 텐데 어서 출발하자꾸나.”
“아닙니다, 사형. 이분들 도움으로 다친 사람이 몇 없잖습니까? 더욱이 다친 녀석들도 저분 덕분에 다 치료가 되었고요.”
화산의 제자들이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을 향해 인사했다.
“저희와 함께 움직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디에스 라고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고 고요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화산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이유야 뻔했다. 유리한이 그들과 움직이기로 했기에.
- 유리한아.
“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네?”
- 인간의 다리로 움직이기에는 위험한 곳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원래의 모습을 취했도다.
그러니까 걷는 게 싫어서 날아다니는 걸 선택했다는 말이었다.
유리한이 픽 웃고는 옆에 있는 백명에게 물었다.
“놀라지 않네요?”
“네?”
“다들 이 녀석을 보면 놀라거든요. 드래곤을 아는 녀석도, 드래곤을 모르는 녀석도.”
유리한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백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 그게 사파에 그런 놈을 부리는 녀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아무래도 무림 세계에 있는 만물의 마법사들 중, 패밀리어를 부리는 녀석이 있는 모양이다.
패밀리어(Familiar).
쉽게 말해, 이성이 없는 것에 혼을 불어넣어 주인을 지키게끔 만든 인위적인 생명체였다.
유리한은 백명의 말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녀석은 저도 본 적 있죠. 그런데 걔들이 부리는 녀석들은 얘처럼 말을 하지 못할 텐데요?”
“안 그래도 그래서 놀라던 참이었습니다. 다른 녀석도 마찬가지인 듯하고요.”
백명의 말대로 화산의 다른 제자들 모두 당황한 얼굴로 두 눈을 데굴 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암만 많은 협객이 이곳 무림을 찾았지만 저런 걸 달고 온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날아다니고 있는 저 생명체는 분명 인간이었다. 그것도 어린아이.
그런데, 왜…….
“이 녀석은 말할 줄 아는 패밀리어예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음, 그래. 사파에 있는 녀석이 부리는 것보다 조금 더 똑똑한 녀석으로 생각하는 게 편하겠네요.”
“네?”
백명이 놀란 눈을 보였다.
‘드래곤을 한낱 패밀리어로 취급한다고?!’
백명, 아니, 리신이 남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다면 미친 것 아니냐며 펄쩍 뛰었을 거다. 유리한은 무슨 문제 있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명으로 위장 중인 리신이 주먹을 꽉 쥐며 억지로 웃었다.
“자, 그럼 화산으로 가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다들 협객분들을 잘 모시도록 해라.”
“네, 사형!”
화산의 3대 제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은 그렇게 그들 사이에 껴서 이동하게 됐다.
“전투가 꽤 치열했나 보네. 암벽 곳곳이 파헤쳐져 있어.”
“날아다니는 녀석들이 많았거든.”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녀석들 잡는다고 날뛰다 보니 저렇게 됐다.”
“그래도 무너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제가 유리한 씨는 꼭 지켜드릴게요.”
누가 누구를 지켜준다는 건지.
유리한은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고요한이 귀여워 픽 웃었다.
유지한 역시 어릴 적, 자신을 지켜주겠다느니 마니 그런 소리를 하곤 했었다.
‘꼬맹이가 말이야.’
그 꼬맹이가 자신이 죽은 사이에 훌쩍 자라 두 남매의 아버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또한 몰랐다.
‘지한아.’
믿었던 사람에 의해 온갖 실험을 당하며 죽어갈 줄 말이다.
유리한이 사색에 잠겼을 때.
“잠깐, 멈춘다.”
앞장서던 백명이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디에스 라고가 얼굴을 굳혔다. 유리한 역시 그랬다. 그때, 그녀의 어때 위에 앉아 있던 니르로르가 말했다.
- 유리한아,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느니라.
“그래, 나도 알아.”
발달한 청각 덕분에 전투 소리가 가감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서로 죽이라는 둥, 살려두지 말라는 둥.
‘요란하게도 싸우네.’
싸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무림.
9파 1방이니, 사파니, 마교니 해도 약육강식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세계였다.
‘백명, 아니, 빌어처먹을 마법사가 얌전히 있는 걸 보니 사파나 마교가 싸우고 있는 건 아니야.’
다만, 문제라면 그들의 싸움이 너무 치열하다는 거였다.
즉,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9파 1방 중, 어느 세력 간의 다툼이라는 말씀.
‘무림이 갈가리 찢겨 있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
유리한이 혀를 찼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물고 뜯고 맛보고 씹는 상태라니. 개판이네.’
백명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마법사는 화산이 정파가 다시 모일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지만, 글쎄였다.
‘내가 보기에는 저 새끼, 9파 1방의 모든 세력을 모아놓은 후 뒤통수칠 것 같단 말이지.’
그럴 것 같아서 화산을 따라가기로 한 거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에.
“백명 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네?”
“그야, 이곳은 협곡이잖아요. 그것도 사파와 마교의 싸움으로 엉망진창이 된 협곡.”
그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협곡이 무너진다면 분명 깔려 죽을 것이다.
어떤 무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백명은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협객님, 죄송하지만 다른 세력 간의 다툼에는 함부로 끼어들 수 없습니다.”
“왜요?”
“그것이 강호의 도리니까요.”
강호의 도리 좋아하시네.
유리한이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혀, 협객님?”
백명이, 아니, 리신이 당황하여 그녀를 불렀다. 유리한은 그런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저는 강호의 사람이 아니니 싸움에 마음껏 끼어들어도 되죠?”
“그, 그건!”
“더욱이 백명 님, 당신이 말했잖아요.”
휙, 유리한의 창이 백명의 목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헛숨을 들이켜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화산의 3대 제자 중 몇은 당장에라도 무기를 꺼내 들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무기를 꺼내지는 못했다. 유리한의 양옆으로 서 있는 두 남자 때문이었다.
유리한은 백명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백명 님께서는 말씀하셨죠. 화산이 갈가리 찢긴 무림의 세력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게 할 거라고. 아니, 그렇게 될 거라고요.”
그렇게까지 말한 기억은 없지만 백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말려야죠. 아군이 될 사람들이잖아요?”
휘익, 유리한이 백명의 목에서 무기를 거두고는 땅을 박찼다.
백명은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그의 눈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보였다.
백명은, 아니, 리신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따라가지 않습니까?”
“누구를? 유리를?”
“네, 혼자서 싸움을 말리기는 힘들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디에스 라고가 물었다. 백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유리한이 북해빙궁에서 보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는 그를 향해 디에스 라고가 말했다.
“걱정할 거면 차라리 유리한과 함께 가버린 덜떨어진 도마뱀을 걱정해라.”
“맞아요, 니르로르 씨는 저한테 맡기라고 할 걸 그랬네요.”
고요한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신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을 보며 다시 한번 더 꿀꺽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