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 *
콰과광―!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노인이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굉음에 귀를 쫑긋 세웠다.
“종주,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상관 말고 수련에 힘쓰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천하태평의 종주, 구천하에게 차를 따라준 어린 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곧 그림자 하나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형체를 갖췄다. 구천하가 찻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 소란은 무엇이더냐?”
“무당과 소림의 차기 제일 검들이 웬 여자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여자?”
“네, 협객으로 보였습니다.”
협객은 무림의 세상에서 ‘플레이어’를 칭하는 말이었다.
마교, 천하태평(天下泰平)의 종주인 구천하가 웃는 낯으로 제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뭘 말인가?”
“무당과 소림의 차기 제일 검들과 싸우고 있는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냔 말이오.”
그 물음에 구천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만물의 수장, 그레이시 아서가 픽 웃었다.
“당연히 유리한이 아니겠소? 정말이지 무서운 여자란 말이지.”
빠른 속도로 탑을 오른 것도 모자라 제 마탑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럴 작정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마탑에 있던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녀와 그 일당에게 당해버렸다.
‘빌어먹을!’
조금만 더 시간을 들였으면 물의 정령왕에게서 보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을!
그레이시 아서가 이를 으득 갈며 구천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소?”
“무엇을?”
“유리한을 막으려면 지금밖에 답이 없소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그녀와 싸워야 하오.”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유리한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 필요했다.
물의 정령왕, 아쿠아가 그녀에게 직접 건네준 보물.
북해빙궁의 만년빙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해 70층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유리한, 그자를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듯한데 종주는 어떻게 생각하오?”
“큭, 크하하하!”
구천하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리한을 쓰러뜨린다고?”
그레이시 아서는 잘못된 것이라도 있느냐는 듯이 구천하를 쳐다봤다.
구천하는 히죽거렸다.
“그래, 수장. 자네는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유리한을 본 적이 없다고 했지.”
구천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둘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소. 혈맹, 혹은 청의 기사단. 두 곳 중 한 곳의 힘이 더 필요하오.”
하지만 혈맹의 맹주는 49층을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췄다. 청의 기사단의 단장 역시 마찬가지.
즉,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유리한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더욱이 유리한도 그렇지만, 그 옆의 떨거지들도 문제이지 않소?”
떨거지라 하면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을 말했다. 물론, 니르로르도.
“그자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특히 디에스 라고, 그자는 이전에도 잡은 적 있는 놈이지.”
“잡으려다가 아주 골로 갈 뻔했다고 들었소만?”
구천하의 빈정거림에 그레이시 아서가 으득 이를 갈았다. 구천하가 그에 킬킬거리고는 말했다.
“혈맹과 청의 기사단에게 전갈을 보내놨소.”
그레이시 아서의 미간이 좁혀지며 주름을 만들어냈다.
“혈맹의 맹주도, 청의 기사단의 단장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소만?”
“그렇다고 해도 그 아랫것들이 있잖소?”
구천하가 씨익 웃었다.
“내 전갈은 어련히 알아서 그 우두머리들에게 전달될 것이오.”
“그들이 무시하면?”
“그러지 못할 것이오.”
구천하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뮤즈의 백작에게 거금을 주고 정보를 사들였거든. 그들을 움직일 만한 정보를.”
그렇기에 혈맹의 맹주도, 청의 기사단장도 이곳에 오게 될 거다.
“우리는 다 함께 유리한을 처치하면 된다오.”
“지난날 그녀의 동생을 처리했던 것처럼 말이지.”
그레이시 아서의 말에 구천하가 멈칫했다.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그레이시 아서가 그에게 물었다.
“종주, 자네는 유지한의 실험에서 언제나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지. 그렇다고 막아서거나 그러지도 않았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자네는 정말 유리한을 처리하고 싶은 것이 맞는가?”
날카로운 질문에 구천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리한을 처리하고 싶으냐고 물었소이까? 물론, 그렇소. 나는 그녀와 싸워 이기고 싶소. 자네들의 힘을 모두 빌려서라도 말이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절부터 바라던 것, 그것은 바로 유리한의 추락이었다.
모두가 영웅이라며 치켜세우는 그녀가 무너지는 꼴을 구천하는 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건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발치에 미치지 못했다.
‘아저씨,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냥 그 힘으로 우리와 함께 움직이자고.’
굴욕적인 말만 들었을 뿐이다.
옛일을 떠올린 구천하가 이를 으득 갈고는 그레이시 아서를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혈맹의 맹주와 청의 기사단장, 그 두 사람이 무림에 도착하는 즉시 유리한을 처단하는 게 어떻소?”
“좋소이다. 유리한이 어디에 있을지는 내가 알고 있으니 손쉽게 움직일 수 있겠지.”
유리한이라면 화산으로 향하고 있을 터. 그레이시 아서가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유리한.
줄곧 자신의 계획을 모두 방해해 온 성가신 존재.
‘드디어 죽일 수 있겠군.’
무척 기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 * *
“엣취!”
유리한이 작게 재채기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코가 근질거리네.’
유리한은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진창의 검을 막아냈다. 맞부딪친 검에 손이 떨렸다.
‘역시.’
유리한이 두 눈이 낮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창을 휘둘러 진창의 검을 튕겨냈다. 진창의 몸 역시 멀리 날려버렸다.
“크윽!”
수풀에 처박힌 진창이 곧장 일어나 다시 유리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리한은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는 주먹을 한껏 쥐었다.
퍼억!
진창의 복부에 내려꽂힌 주먹에 그가 쿨럭거리며 또 한 번 수풀에 처박혔다.
유리한은 휘둘렀던 주먹을 가볍게 털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거기 계시는 소협께서는 가만히 있을 건가요?”
“다수가 한 사람을 공격하는 건 강호의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아하, 그래서 저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 거군요? 상냥하시기도 하지.”
유리한이 방긋 웃고는 제 어깨에 창을 걸쳤다.
“자, 이제 편하게 오시죠.”
“그럼, 갑니다!”
기합 한번 좋았다.
파밧!
소협이 발 빠르게 움직여 단번에 유리한의 앞에 도달했다.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 하지만 유리한은 싱긋 웃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소협은.
“어, 어엇……?”
비틀거리며 제 눈을 어루만졌다. 세상이 온통 흑색이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시각을 단숨에 잃어버린 것이다. 소협은 당황했으나 곧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마녀가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구나!’
아까의 싸움에서도 신묘한 힘으로 자신들을 제압했던 그녀다.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힘이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군.’
협객이란 자들은 모두 그랬다.
소협은 크게 숨을 들이켜 마시고는 자신의 감(感)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기운에 유리한은 입술을 오므렸다.
‘귀찮게 됐네. 이곳에서도 기감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하긴, 리스체가스에서도 그렇고 곳곳에서 많이 만나기는 했지?’
유리한이 짧게 혀를 차고는 저를 향해 주먹을 찌르는 소협을 피해냈다.
“이크.”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으면 목이 꿰뚫렸을 거다.
‘이 인간 진심이잖아?’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가 진심이면 이쪽도 어쩔 수 없다.
유리한은 창을 고쳐 잡고는 땅을 박찼다. 후웅, 하늘을 그녀가 곧장 소협을 향해 창을 내리쳤다.
소협은 가까스로 유리한의 창을 피했다.
“헉, 허억…….”
소협은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데굴 굴렸다.
자신이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는 건지, 잘 상대하고 있는 건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이제는 다리가 달려있다는 감각도 없었지만, 소협은 어떻게든 일어났다.
유리한은 그를 향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근성 한번 죽여주네요.”
땅에 꽂혀있던 창을 뽑아 든 유리한이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소협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세상이 다시 휘황찬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세상이란 것이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소협은 그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안 할 거예요?”
묻는 말만 아니었다면 소협은 그대로 주저앉아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을 거다.
소협이 저를 향해 태연하게 묻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오, 정말요?”
“네, 당신을 인정합니다. 또한, 마녀라고 부르는 등 당신께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뱉어냈던 것 역시 사과드립니다.”
“그렇다면야, 뭐.”
유리한이 인벤토리 안으로 창을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진창이 빠른 속도로 그녀 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진창! 비겁하게 무슨 짓을!”
소협이 소리 질렀고.
“유리!”
“유리한 씨!”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뒤늦게 반응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리한은.
“아, 정말.”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고는 ‘어둠을 지배하는 자(S)’의 칭호 효과를 발동했다.
끈질긴 것과 근성이 있는 건 한 끗 차이였다. 참고로 무당의 진창은 유리한에게 있어 끈질기다 못해 질린 인간으로 낙점됐다.
“어라?”
진창이 자신을 감싼 어둠에 혼란스러워하던 찰나.
“컥!”
머리를 내리치는 고통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어둠이 흩어졌다.
진창을 쓰러뜨린 유리한은 손을 탈탈 털어내고는 활짝 웃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백명을 흉내 내고 있는 리신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소협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스, 요한. 나는 괜찮아. 보다시피.”
“그래도요!”
고요한이 황급히 유리한에게 다가왔다. 디에스 라고 역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진창을 은근슬쩍 발로 차면서 말이다.
“유리, 괜찮나?”
“괜찮다니까?”
유리한이 태연하게 웃었다. 그럼에도 고요한은 안절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유리한을 살폈다.
“요한도 디에스도 이렇게 걱정이 많아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
그 말에 고요한이 뚱하게 입을 열었다.
“유리한 씨와 함께 잘만 살아갈 거예요.”
유리한이 그 대답에 픽 웃었다.
그때, 고요한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니르로르가 그녀의 어깨 위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 유리한아, 저 녀석들은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먹을 거냐?
“먹기는 뭘 먹어?”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동그란 이마에 딱밤을 날리고는 말했다.
“서로 왜 싸우고 있었는지 물어봐야지. 백명, 맡겨도 되겠죠?”
“네? 네, 물론이지요.”
리신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유리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희도 그 이유를 같이 들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왜요, 안 되나요?”
질문과 함께 유리한과 고요한, 그리고 디에스 라고의 시선이 백명에게로 향했다.
백명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됩니다.”
되고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