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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55)화 (155/235)

155화 

“뭐라고……?”

“그 백명이란 자가 마법사라고 했느니라.”

디에스 라고가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감쌌다. 화산에 같이 들어온 무인들 중 불순물이 섞여 있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 자식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백명이라니! 자신들을 가장 앞장서서 안내한 그 인간이라니!

“유리는 알고 있었나?”

“그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덕분에 엄청 혼이 났느니라.”

니르로르가 뚱하게 말했다. 디에스 라고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괜찮으냐, 음흉한 인간아?”

라고 니르로르가 물어볼 정도였으니 그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디에스 라고가 창을 꺼내 들었다.

“이봐, 인간!”

니르로르가 자신도 모르게 디에스 라고를 붙잡았다.

유리한이 잠에서 깰까,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몸짓으로 말이다.

“뭐지, 도마뱀?”

디에스 라고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니르로르가 말했다.

“그 인간, 죽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그에 디에스 라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물의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나? 그쪽 인간들은 죽이는 편이 좋다는 걸 너도 알 텐데?”

“짐은 모른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있지.”

니르로르가 디에스 라고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서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었다.

“네가 지금 그 인간을 죽이면, 유리한은 분명 너를 원망할 거란 것을 말이다.”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움찔거렸다. 유리한의 원망이라니,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유리한은 백명이 진작 마법사인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단순한 마법사가 아닌, 만물 소속의 마법사란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유리한은 그를 그대로 뒀다. 그러기만 했을까? 이것저것 도와주기도 했다.

결국 디에스 라고는 꺼내 든 창을 인벤토리에 도로 집어넣고는 니르로르에게 물었다.

“그래서? 유리는 뭘 원했지?”

“그 인간에 대한 처우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니라. 유리한은 원래 그러지 않느냐?”

무슨 일이든 제 손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유리한이었다. 그러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끝에 가서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디에스 라고가 이를 갈려던 찰나, 드르륵 문이 열렸다.

“아, 다들 모여 계셨네요? 유리한 씨는 여전히 주무시고 있네요. 니르로르 씨의 옆에서요.”

말끝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니르로르는 고요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영양제 제조가 모두 끝났나 보구나, 고요한아.”

“네, 다 끝났어요.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여러 개를 만들었더니 시간이 너무 걸렸네요.”

고요한이 협탁 위에 이끼가 낀 듯한, 썩은 물 같은 색을 띤 음료를 가지런히 놓았다.

니르로르도 디에스 라고도 고요한이 만든 영양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시면 죽는다.’

죽으면 다행이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되리라.

고요한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선한 얼굴로 물었다.

“니르로르 씨랑 디에스 씨도 마셔볼래요? 양은 넉넉해요.”

“짐은 괜찮다.”

“거절한다.”

니르로르와 디에스 라고가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대답했다. 고요한은 뺨을 긁적였다.

“저렇게 보여도 맛있어요.”

“전혀 맛있어 보이지 않느니라.”

“아니에요, 니르로르 씨. 한번 드셔보세요. 아님, 제가 먼저 마셔볼게요.”

고요한이 그렇게 말하고는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병 중 하나를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에 니르로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고요한은 병을 말끔하게 비워내고는 방긋 웃었다.

“괜찮다니까요?”

“네가 그렇다면야.”

니르로르는 속는 셈 치고 고요한이 만든 영양제를 먹어보기로 했다.

‘유리한, 이 녀석이 먹어도 괜찮은지 확인도 해봐야 하니까.’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니르로르는 어쨌거나 고요한이 만든 영양제를 삼켰다.

그리고.

“크허억!”

비명을 토해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유리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처절한 목소리였다.

“뭐, 뭐야?”

침대에서 떨어지려던 유리한을 안전히 붙잡은 디에스 라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유리,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단지 고요한이 독살을 시도했을 뿐.”

“독살? 독살이라니?”

유리한이 멍한 정신으로 묻자 고요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리한 씨를 위한 영양제를 만들었는데 니르로르 씨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나 봐요.”

영 맞지 않는 수준이 아닐 텐데요, 요한.

유리한은 순간 튀어 나가려는 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그보다 영양제라니!’

유리한이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바로잡고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영양제를 쳐다봤다.

척 봐도 마시기 껄끄러운 빛깔의 음료들이었다. 유리한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망할, 큰일 났네.’

저걸 마셨다가는 또 기절하고 말 거다. 유리한은 고요한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요한, 저를 위해 영양제를 만들어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보다시피 저는 아주 멀쩡해졌어요!”

“정말요?”

“네!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요한의 영양제는.”

“필요 없어졌군요…….”

고요한이 유리한의 말을 끊고는 음울하게 말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유리한 씨께 필요가 없어졌다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것들 모두 버리고 올게요.”

고요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애써 만든 것들을 처분하려고 들었다.

“잘 생각했다, 고요한아!”

그의 영양제를 먹은 니르로르가 두 팔 들고 환영했다. 하지만 유리한은.

“요한! 자, 잠깐만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고요한을 붙잡았다. 고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유리한 씨?”

“생각해 보니 하나쯤은 마셔도 될 것 같아서요. 괜찮죠?”

“네! 당연히 괜찮죠!”

고요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유리한은 그가 보여주는 미소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디에스 라고가 그런 그녀를 보고 소곤거렸다.

“유리,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디에스. 요한을 지한이라고 생각해 봐. 너는 지한이가 너를 위해 만들어준 영양제를 버릴 수 있어?”

디에스 라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유지한이 ‘형을 생각해서 만든 음식’이랍시고 준 음식물 쓰레기도 기꺼이 먹어봤던 그였다.

어쨌든 유지한을 떠올린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을 말리는 걸 포기했다.

그러는 사이 유리한은 고요한한테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아니, 가장 맛이 끔찍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양제를 받아 들었다.

디에스 라고는 쯧, 속으로 혀를 찼다.

‘유리가 저 자식한테서 지한이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고 있는 건 알았지만.’

절로 한숨이 나오는 디에스 라고였다.

‘지한이와 고요한은 다른데.’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도 왜 유리한은 그를 ‘유지한’에 대입하면서 그토록 아끼는지 디에스 라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유리한이 아끼는 녀석을 함부로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이미 그러려고 했다가 그녀에게 경고까지 들었던 몸.

그는 유리한과 고요한의 관계를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어찌 됐든 유리한은 고요한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영양제를 한 번에 삼켰고.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고요한은 그것이 미미(美味)를 표현하는 몸짓인 줄 알고 좋다고 환하게 웃었다.

디에스 라고는 그 순간, 고요한을 진심으로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순간, 문이 열렸다.

“아, 다들 여기 계셨군요.”

들어온 사람은 백명이었다. 유리한이 몸부림치다 말고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디에스 라고는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듯이 백명을 노려봤다.

백명, 아니, 리신은 한순간 날 선 분위기에 꿀꺽 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장문인이라면 이미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눴을 텐데?”

디에스 라고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옆에서 고요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장문인과 저희의 볼일은 끝나지 않았나요?”

“그게 말입니다…….”

리신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장문인께서 유리한 님의 명성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바로 아래 세계에서 말이죠.”

“아래 세계라면…….”

“엘리아룸.”

리신이 유리한의 말을 끊고는 방긋 웃었다.

“유리한 님을 비롯한 협객처럼 신비한 힘을 다루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죠. 저희와 교류가 자주는 아니지만 오가고는 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장문인께서 유리한 님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 같다면서 리신은 덧붙였다.

‘아하, 50층 밑의 태양교 사제들과 비슷한 관계인가 보군.’

태양교의 사제들은 탑의 거주민인데도 탑을 자유자재로 오갔다.

사실, 탑의 거주민이라면 누구든 탑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었다.

플레이어가 다니는 길과 다르게 햇빛이라고는 들지 않는 어두운 길을 말이다.

‘하지만 50층 이후의 세계는 그런 것 같지 않았어.’

유리한은 엘리베이터를 떠올렸다.

그때,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던 리신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니 유리한 님, 동료분들과 함께 장문인을 만나주실 수 있을까요?”

유리한은 무척 피곤했다. 그러니까 장문인이란 사람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장문인이라고 하면 한 문파의 가장 윗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사람에게 벌써부터 밉보이는 건 곤란했다.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하는 데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화산의 장문인이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진작 70층의 세계가 열렸을 테니까.

어쨌든 유리한은 말했다.

“좋아요, 가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환하게 웃으면서.

“안 그래도 장문인께 저만 인사를 못 드려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잘됐네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백명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빌어먹을 만물의 마법사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리신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안내를 해주겠다는 몸짓이었다.

“아, 잠깐만요.”

유리한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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