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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63)화 (163/235)

163화 

[화염 저항(A)이 당신의 몸속을 휘감는 불꽃을 저지합니다.]

[열기 저항(A)이 당신의 몸속에 들끓는 열을 가라앉힙니다.]

새까만 시야에 푸른 창이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떴다. 유리한은 불길에 휘감겨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불길이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였다.

‘죽을 것 같아.’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플레이어가 된 후로 유리한은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좀비가 되어버린 부모를 제 손으로 죽인 후에 그 감정을 죽여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 고통에 몸부림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리한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만물과 천하태평이 지금 청의 기사단과 혈맹과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에 어서 합류해야 했다.

청의 기사단과 혈맹.

그들이 아무리 용맹한 플레이어라고 해도, 그레이시 아서는 멀린의 제자였다.

유리한,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위대했던 대마법사인 ‘멀린 아서’.

그는 언제나 제자에게 비장의 한 수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레이시 아서가 정말로 멀린의 제자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의 제자가 맞다면…….

‘안 돼, 다들 위험해질 거야.’

청예신도 그리고 랴오륭도.

뮤즈가 알려준 소식을 듣고 무림으로 달려온 모두가 위험에 처하고 말 터였다.

‘그건 안 돼.’

유리한은 이 탑에서만큼은 죄 없는 목숨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얼마나 많은 생명이 몬스터의 앞에서 꺼졌는가? 그리고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자신 또한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던가?

‘정신 차리자.’

이대로 몸 안에서 날뛰는 화마와 열기에 집어삼켜질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 유리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유지한,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아니, 그가 남긴 두 조카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살아남아야 했다.

유리한이 그렇게 약의 부작용에 발버둥 칠 때.

‘…시원해.’

아이스크림을 이마에 곧장 댄 것만 같은 시원함이 몰려왔다. 다만, 그 시원함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다.

“윽……!”

유리한은 결국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오, 정신을 차렸느냐?”

“니르로르?”

“그래, 나다.”

니르로르가 유리한의 이마에 살짝 얹었던 손을 거뒀다. 유리한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그에게 물었다.

“뭐야, 그 모습은.”

“네 몸의 열을 식히려면 이 모습이 편할 것 같아서 말이다.”

“격이 낮아졌다니 어쩌니 빌빌거리더니.”

“그래도 아주 잠깐 동안은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느니라.”

“아아, 그러세요?”

유리한이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잠깐만 누워 있어라. 네 몸의 마력이 아직 진정 중에 있으니.”

니르로르에 의해 저지당했다.

유리한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였다.

그녀와는 달리 니르로르는 태평했다.

“5분, 아니면 3분 남짓. 그 시간 동안 짐을 베개라고 생각하고 누워 있도록 하거라.”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드래곤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눕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유리한이 실소를 흘렸다.

“왜 웃느냐?”

“이 상황이 웃겨서.”

니르로르를 죽이려고 했던 유리한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만나,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게 됐다.

그리고 지금,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통해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웃겼다.

“그래도 좋네, 시원해서.”

그 말에 니르로르가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물었다.

“마력은 좀 안정됐느냐?”

“응, 네가 빌려 간 내 마력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

“진작 회복됐어야 할 마력이다. 그것을…….”

자신의 마력이 막아서 유리한이 고통에 몸부림치게 됐다. 평소라면 느꼈을 리가 없는 감정.

그런 감정이 폐부를 찌르자 니르로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뺨을 유리한이 두드렸다.

“새삼스레 왜 죄책감을 느끼고 그래? 드래곤의 마력 때문에 이 사달이 나다니. 의외로 좋은 경험이었어.”

“뭐라?”

“왜, 다들 그러잖아. 죽음의 공포를 겪어봐야 제정신을 차린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항상 제정신이지 않았느냐?”

“뭐, 그렇지.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엄청 오랫동안 잊고 있었거든.”

조카의 희생으로 다시 살아난 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였다.

“그런데 그걸 이번 기회로 아주 똑똑히 느꼈네.”

유리한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꽉 주먹 쥐었다. 니르로르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말했다.

“바깥에서 청예신과 랴오륭이란 녀석이 네가 싫어하는 것들과 대면 중이다.”

“대면 중이라니, 너무 부드러운 말을 쓰는 거 아니야?”

유리한이 픽 웃었다.

“대면 중이 아니라, 싸움 중이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 싸움에 끼어들 작정이냐?”

“응, 몸은 이제 완전히 회복된 것 같거든. 그리고.”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내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잖아?”

비록, 청예신은 만물의 수장에게 원한이 있었지마는 말이다.

유리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니르로르가 형성한 검은 공간을 순식간에 부숴버렸다.

‘오, 생각보다 쉽게 부서지네.’

“오, 생각보다 쉽게 부서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유리한이 흠칫 놀라 물었다.

“뭐야, 너 남의 생각도 읽을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너한테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거다.”

“하긴.”

유리한이 피식 웃었다. 그때 니르로르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네가 내 힘을 더욱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것이다.”

“뭐?”

니르로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제 네 조카란 녀석이 깨어날 일만 남았겠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렇게 묻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유리!”

디에스 라고였다.

그는 유리한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그녀를 있는 힘껏 안았다.

“디, 디에스, 숨 막혀!”

유리한이 그의 힘에 버둥거렸으나 디에스 라고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야! 디에스 라고! 숨 막힌다니까?! 나 좀 놔줘!!”

그렇게 말해도 더욱 꼭 끌어안는 디에스 라고였다. 유리한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뺨을 적시는 물기가 느껴져서.

유리한은 잠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디에스, 나 걱정했어?”

“당연하지.”

디에스 라고가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피를 토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지?”

유리한이 배시시 웃었다. 디에스 라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 너무 오랜만이었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유리한은 그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몬스터를 학살하던 플레이어였다.

그렇기에 상처를 입는 일이 많았다. 암만 멀린 아서가 치료해 줘도 그랬다.

그런 그녀가 쓰러졌던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수중 싸움에서 독에 당했을 때, 그녀는 심한 내상에 몇 날 며칠을 일어나지 못하고 앓아누웠었다.

그때, 그녀가 토해내던 붉은 피는 디에스 라고의 뇌리에 깊게 박혀 지워지지가 않았다.

“디에스, 나 이제 괜찮아.”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어느새 어린아이의 모습을 취한 니르로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이 빌어먹을 드래곤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보다시피 멀쩡해졌어.”

“니르로르 님만 칭찬해 주시는 겁니까, 유리한 님?”

“제로 바니스타.”

유리한이 그에게 싱긋 웃어줬다.

“고마워요. 주셨던 약, 정말 효과가 좋네요.”

“그만큼 부작용도 심하죠. 때문에, 저는 항상 조심한답니다.”

“마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요?”

제로 바니스타가 정답이라는 듯 방긋 웃었다.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덕분에 멀쩡해졌네요.”

화산에 들어선 후, 줄곧 좋지 않던 몸이었다. 만물과 천하태평과의 싸움부터는 급격히 나빠져 어쩌면 좋을까 했는데.

‘설마 뮤즈의 백작께서 이렇게 나타나 주실 줄이야.’

물론, 청의 기사단장인 청예신과 혈맹의 맹주인 랴오륭이 제 앞에 나타난 것도 의외이기는 했다.

그리고.

“서문기율 씨.”

서문기율, 그도 랴오륭과 함께 나타날 줄은 몰랐다. 유리한의 부름에 그가 각 잡힌 모습으로 대답했다.

“네, 유리한 님.”

자신이 ‘님’ 자 붙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고지식한 남자다 싶었다.

그래서 좋았다.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많이 성장하셨네요.”

서문기율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칭찬. 그는 거세게 울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유리한 님이야말로 상태가 좋아지신 것 같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요. 아마, 요한 덕분에 더 빠르게 회복한 것 같아요.”

“제 덕분에요?”

고요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눈가는 마치 운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유리한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가 그토록 자책했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유리한이 고요한에게 다가가 앞에 섰다.

“요한.”

유리한은 고요한의 붉어진 눈가를 다정하게 어루만져 줬다.

“요한이 저한테 힐을 시전하지 않았다면 저는 뮤즈의 백작님도 만나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거예요. 정말로요.”

“그, 그런……!”

고요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죽었을 거란 소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유리한 씨께서 그대로 돌아가셨다면, 저는.”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을 테다.

유리한은 제게 있어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던 리스체가스의 삶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준 사람.

고요한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유리한이 고요한의 눈물에 당황할 때.

“자자, 눈물겨운 상봉은 다들 끝내셨습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유리한 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싱긋 웃으며 던진 물음에 유리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야죠. 몸도 정신도 멀쩡한데,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곧, 그녀의 아래로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전보다 더욱 짙어진 색깔에 제로 바니스타는 생각했다.

‘오광 중 한 곳은 이 탑에서 완전히 사라지겠군.’

이라고.

아주 즐거운 얼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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