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 *
마법이 검에 부딪혀 파훼 되고, 날아오는 주먹을 가까스로 피해야 하는 한 치의 긴장도 놓을 수 없는 전투의 한복판.
청예신이 빠르게 다가온 인기척에 웃으며 말했다.
“오, 그대로 날아가서는 영영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시 왔네요?”
“오, 단장님. 지금 내 걱정 해준 거야? 이것 참 고마운데. 그보다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어.”
랴오륭이 청예신에게 들러붙으려던 구천하를 주먹으로 휘두르며 막아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또 한 번 등을 맞대게 됐다.
청예신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랴오륭에게 물었다.
“무슨 소식이요? 저 늙은이들이 힘에 부쳐 얼마 못 가 쓰러질 거란 소식이었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아, 그건 아니야. 내가 말한 좋은 소식이란 건.”
랴오륭이 말을 멈췄다. 그만이 아니라 전투 현장의 모두가 싸움을 멈췄다.
“그레이시 아서!!”
하늘 위에서 나타난 흉흉한 기를 내뿜는 유리한이, 만물의 수장을.
그레이시 아서의 정수리를 쪼개버릴 듯 다리로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 하나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순식간에 말이다.
“커…헉……!”
그레이시 아서가 피를 토하며 땅에 처박혔다. 그 앞에 선 유리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일어나. 이대로 쓰러지면 내가 섭섭하지 않겠어?”
청예신이 유리한의 등장에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말했다.
“유리한 씨가 랴오륭, 당신이 말하려던 좋은 소식이에요?”
“그래, 아주 든든한 아군이지?”
청예신이 멍하니 유리한의 뒷모습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네, 아주 든든한 아군이네요.”
청예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쿨럭……!”
땅에 처박혔던 그레이시 아서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완벽하게 계획을 짰다.
구천하와 함께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하면 무림은 천하태평(天下泰平)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그리고 70층 이후의 세계는 우리 만물이 가지고자 했건만!’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레이시 아서는 곧 모든 사태의 원흉을 향해 소리 질렀다
“유리한!!”
아니, 원흉을 넘어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레이시 아서의 고함과 함께 무지막지한 마력이 폭발하듯 그로부터 내뿜어져 나왔다.
그에 유리한이 작게 손뼉 쳤다.
“우와, 무지막지한 마력. 감히 ‘아서’의 이름을 붙여 멀린의 제자를 자처할 만도 해.”
그러나 칭찬 어린 목소리는 순식간에 낮아졌다.
“하지만 그뿐이네?”
유리한이 그레이시 아서의 마력을 가볍게 지워버리고는 말했다.
“마력을 다루는 실력은 멀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만물의 마법사들 실력이 고만고만한 건 알았지만 수장도 그렇다니.”
그 말을 끝으로 유리한이 사라졌다. 그레이시 아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기척을 좇았다.
‘어디지? 어디에 숨은 거냐!!’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가까이에 있는데. 그레이시 아서의 어깨가 유리한의 창에 꿰뚫린 것은 그때였다.
“크흑……!”
그레이시 아서가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아파?”
그레이시 아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마법을 시전하고자 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너로 인해 피눈물을 흘린 내 동생도 무지 아팠을 거야. 이렇게.”
유리한이 그레이시 아서의 어깨를 꿰뚫은 창을 비틀었다.
“크아악!”
그레이시 아서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유리한은 픽 웃고는 창을 그대로 빼내었다.
허공에 튄 핏물이 유리한의 뺨에 묻었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닦아내고는 그레이시 아서를 내려다봤다. 어깨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은, 하찮기 그지없는 몰골의 마법사를 말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싸울 맛이 안 나잖아.”
유리한이 입매를 비틀었다.
뒤늦게 싸움의 현장에 도착한 고요한과 서문기율은 쉽사리 다가올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자신들이 낄 자리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탓이다.
유리한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그레이시 아서가 피를 토해내며 소리 질렀다.
“얕보지 마라, 유리한!”
파아앗!
여러 개의 불꽃이 유리한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유리한은 가만히 그것을 보다가 픽 웃었다.
“이거 어째?”
따악, 맞부딪치는 손가락과 함께 피어오른 어둠이 불꽃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레이시 아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유리한은 마법은 문외한으로 유명한 플레이어였다.
무한의 마력을 지녔음에도 그것을 마법으로 전혀 활용할 수가 없는 플레이어.
그게 바로 유리한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그건 뭐지?’
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레이시 아서의 마법을 가볍게 어둠 속으로 삼켜버린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얕볼 수밖에 없잖아? 응? 그렇지 않겠어, 그레이시 아서?”
묻는 목소리에 그레이시 아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벼랑 끝에 내몰린다면 이런 심정일까?
그레이시 아서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은 쥐고 있던 창을 버리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내 동생을 건드렸으면, 이만한 고통을 치를 각오는 했어야지. 아, 그래. 내가 살아날 줄은 몰랐겠지. 그렇지?”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커헉!”
단숨에 그레이시 아서 앞에 나타나 그의 오른쪽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그레이시 아서는 그대로 몇 바퀴 땅을 굴렀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에 구천하가 미간을 좁혔다.
‘빌어먹을.’
구천하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레이시 아서는 유리한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물러나야 한다.’
구천하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봐, 영감. 우리한테 집중해 주지 않겠어?”
“그래, 구천하. 한눈을 팔아주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랴오륭과 디에스 라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의 강렬한 기운에 구천하가 쯧, 혀를 찼다.
어쨌든 간에 그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물러날 구석이라고는 안 보였기 때문이다.
“건장한 청년 둘이서 늙은이를 이렇게 상대해 주려고 하다니. 세상 부끄럽지 않나 보군?”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그냥 조무래기 같은 악당 하나 처리하는 것뿐인데.”
“그리고 구천하.”
랴오륭에 뒤이어 디에스 라고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건장한 청년이라 불리기에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은 몸이라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디에스 라고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구천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디에스 라고, 그가 그레이시 아서에 의해 30년 동안 봉인 당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30년 전.
튜토리얼이 끝난 후 ‘영웅’이라 칭송받던 그 시절의 몸으로 봉인 당했다는 것을 말이다.
구천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릴 때,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악!”
그레이시 아서의 목소리였다.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흙먼지는 어디 가고, 유리한이 쓰러진 그의 손을 으스러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짐승을 사냥하듯, 인정사정없는 그 모습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유리한은 이 세상에 자신과 그레이시 아서, 단둘만이 남겨진 것처럼 굴었다.
“네 이름 뒤에 ‘아서’가 붙는 걸 보면 분명 멀린의 제자인데 말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약해? 그 제자 중에서 너처럼 약한 애는 처음 보는 거 알아?”
“닥…쳐라……!”
그레이시 아서가 울컥, 피를 토해내며 소리 질렀다.
“네년이 그분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그분은!”
“위대한 마법사지.”
유리한이 그레이시 아서의 말을 끊고는 싱긋 웃었다.
그뿐이랴? 그는 자신과 디에스 라고 못지않게 뛰어난 검사였다.
‘뭐, 나나 디에스는 검보다는 창을 주로 사용하지만.’
어쨌든 간에 멀린 아서는 마법 못지않게 검술 실력 역시 뛰어난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눈앞의 늙은 여우는 전혀 아니었다.
“정말 신기해.”
“으아아악!”
유리한이 기어코 그레이시 아서의 손을 으스러뜨렸다. 오른손과 왼손, 양손 모두를 말이다.
그레이시 아서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유리한은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너처럼 덜떨어진 애를 멀린이 제자로 받아들여 줬었다니. 그것도 우리 모르게. 아, 혹시.”
유리한이 무릎을 굽히고는 그레이시 아서를 보며 싱긋 웃었다.
“멀린이 네가 너무 불쌍해서 동정했나 보다. 그래서 제자로 받아들여 준 거지. 어때? 내 말 맞지?”
그레이시 아서가 파르르 입술을 떨다가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그 입 닥치라고 했다, 유리한!!”
다시 한번 마력이 폭발하듯 공기를 울렸다. 동시에 여러 곳에서 마법진이 생겨났다.
유리한은 그것들을 보며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손으로 마법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아님, 죽기 살기로 내게 대항하고 있는 건가?”
유리한이 핏발 선 두 눈을 보며 키득거렸다.
“끈기 하나는 인정해 주도록 할게. 축하해, 구시대의 영웅에게 인정받은 걸.”
“크아아악!”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그레이시 아서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질렀다. 곧, 수많은 마법진에서 그녀를 향해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한 씨!”
유리한이 등장한 후, 싸움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던 청예신이 급히 움직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나서지 마라, 인간아.
니르로르가 청예신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청예신은 제 옷자락을 붙잡은 작은 앞발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서지 말라니,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그렇게 말하려던 청예신이 입을 다물었다. 유리한을 향해 쏟아지던 마법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청예신이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니르로르는 그녀를 놓아주고는 으쓱거렸다.
- 그래서 짐이 나서지 말라고 한 것이니라.
그레이시 아서.
이 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의 마법을 모두 깔끔하게 지워버린 유리한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청예신이 그 뒷모습을 넋을 잃은 듯 쳐다봤다. 니르로르는 뿌듯하다는 듯 말했다.
- 유리한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인간아.
그 말에 청예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