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 *
오광(五光).
만물과 천하태평, 청의 기사단과 혈맹, 그리고 뮤즈.
탑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다섯 세력을 플레이어들은 ‘오광’이라 불렀다.
탑을 떠받치는 다섯 개의 기둥이란 뜻도 있었고, 탑을 환하게 밝히는 다섯 개의 빛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둥이, 그 빛이 지금 막 꺼지려고 했다.
“유리한! 빌어먹을 유리한!!”
구시대의 영웅, 스스로를 희생해 튜토리얼을 끝냈던 위대한 플레이어에 의해서 말이다.
그레이시 아서는 추한 몰골로 몇 번이고 유리한의 이름을 내질렀다. 그 이름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려는 듯 말이다.
그런 그를 유리한은.
“끄읍, 윽……!”
박살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그레이시 아서의 아래턱을 잡아 으스러뜨릴 듯이 힘을 줬다. 실제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살벌한 소리에도 유리한은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멀린이 나에 대해서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나 보네?”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나는 입만 산 놈을 제일 싫어해, 그레이시 아서.”
그녀는 잡고 있던 턱을 놓으며 가볍게 창을 들었다.
“멀린에게 안부 전해줘. 아, 전해줄 수 없겠구나? 너는 지옥에 떨어질 테니.”
그레이시 아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유리한, 그녀가 자신을 정말 죽일 거란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턱이 부서진 채 줄줄 침만 흘릴 뿐. 그렇게 그레이시 아서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
“잠깐!!”
예기치 못한 도움을 받게 됐다.
“잠깐만 기다려보게, 유리한.”
바로, 천하태평(天下泰平)의 구천하로부터 말이다. 유리한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웃는 낯으로 그를 쳐다봤다.
강자가 약자에게 기꺼이 행하는 배려였다.
구천하가 꿀꺽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유지한이 남긴 아이들이 있었지? 유서아와 유시우.”
유서아와 유시우.
난데없이 튀어나온 조카들의 이름에 유리한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구천하가 옳거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들의 어미가 궁금하지 않나?”
유리한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구천하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레이시 아서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유리한이 웃음을 멈출 때까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즉시, 그녀에 의해 목이 달아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유리한은 한참 후에야 웃음을 멈췄다.
“아, 정말 웃겼어.”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리던 유리한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슥 닦아냈다.
그러고는.
“애들 엄마, 지한이가 그토록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던 이름 모를 우리 올케.”
유리한이 창을 쥔 손으로 구천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론, 그는 유리한이 제 앞에 당도하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너희가 죽였잖아?”
“커헉……!”
유리한은 손쉽게 구천하의 속도를 따라잡고는 그의 어깨에 창을 꽂아 넣었다.
꿰뚫린 어깨에 구천하가 괴롭다는 얼굴을 보였다. 유리한,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아저씨도 참, 너무 오랜만에 나를 봐서 까먹었나 보네. 내가 입만 산 놈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거짓말하는 놈도 싫어한다는 걸.”
그녀는 그대로 구천하의 어깨를 꿰뚫고 있던 창을 빙그르르 돌리고는 빼내었다.
“끄아악!”
살과 근육이 헤집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에 구천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유리한은 쓰러진 그를 벌레 보듯 쳐다보고는 말했다.
“청예신 씨, 만물의 수장은 당신께 맡길게요.”
유리한의 전투를 멍하니 구경하던 청예신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이 사람은 유리한 씨의 원수잖아요.”
“분은 다 풀었으니까요. 하지만 청예신 씨는 저처럼 시원하게 분을 풀지 못한 것 같아서요.”
유리한의 말에 청예신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다가 그녀를 향해 고개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청예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크윽… 내가, 이렇게 죽을 성싶으냐……!”
어느새 으스러졌던 턱을 치료한 그레이시 아서가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예신은 그를 향해 다가가며 싱긋 웃었다. 당장에라도 죽여버릴 듯, 한 손에 검을 든 채로 말이다.
“만물의 수장님, 유리한 씨가 그러셨잖아요? 입만 산 놈은 딱 질색이라고요. 그거, 저도 그렇거든요.”
그레이시 아서의 앞에 선 청예신은 싱긋 웃고는 검을 휘둘렀다.
“가시는 길 평안하시기를.”
하지만 또한 고통받기를, 나의 딸아이가 당신의 욕심에 의해 고통을 받은 만큼.
탑을 떠받치고 있던 다섯 개의 기둥, 그중 하나가 부서지는 건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래,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그레이시 아서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다.
파아앗―!
하늘을 채우는 거대한 마법진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저건 뭐죠?”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마법진인데.”
유리한이 목 언저리를 긁적일 때였다.
“끄아악!”
“아악!”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통 어린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산파가 자리 잡은 곳.
그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모두들 그 즉시 이동했다.
디에스 라고는 혹여나 구천하가 이때를 틈타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 그를 붙잡고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유리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화산의 무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장님!”
“라이.”
부단장, 라이 에스페란도가 급히 청예신에게 달려왔다. 청예신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만물의 마법사들이 갑자기 말라 죽고 있습니다.”
“말라 죽고 있다니요?”
라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제 어휘 실력에 화가 치밀어 오르던 찰나.
“라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이렇게 보여드려야지.”
청의 기사단에 속해 있는 유일한 마법사, 엘레나 리본이 말라 죽은 만물의 마법사를 끌고 나타났다.
“엘레나, 그건 대체…….”
“만물의 마법사예요.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이렇게 되더군요.”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단장님, 만물의 수장을 기어코 쓰러트리신 모양이네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만물의 수장을 쓰러뜨린 사람은 유리한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지부진한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졌을 거다.
둘 중 한 명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이다.
청예신이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꺅……!”
갑자기 들이닥친 바람에 엘레나 리본이 비명을 질렀다. 라이 에스페란도도 황급히 그녀를 보호하며 소리 질렀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청예신은 당황했고 뒤에 있던 랴오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답을 알려준 사람은 디에스 라고였다.
“유리, 구천하가 도망갔다.”
하늘에 펼쳐진 마법진에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천하태평의 종주가 도망치고 말았다.
명령만 내리면 바로 잡아 오겠다는 듯 디에스 라고가 손을 풀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내버려 둬.”
그녀는 구천하가 사라진 쪽을 보며 픽 웃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상황이 불리해지면 도망가는 버릇은 여전하네.”
어찌 됐든 구천하를 붙잡는 건 나중으로 미룰 일이었다.
지금은 하늘 위에 드리워진 저 커다란 마법진을 파훼시키는 게 먼저였으니.
“이봐, 영웅님. 저 커다란 마법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인데, 내가 잘못 짚은 건 아니겠지?”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는 유리한의 모습에 랴오륭이 물었다. 유리한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그리고 만물의 마법사분들이 왜 그 꼴이 됐는지도 알겠네요.”
처음에는 설마 싶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유리한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모두에게 물었다.
“혹시 ‘메테오(meteor)’라는 마법을 아세요?”
“아니요, 모릅니다.”
“나도 모르겠군.”
랴오륭의 말에 뒤이어 청의 부기사단장, 라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곁에 선 마법사만큼은 달랐다.
“엘레나, 당신은 아는 눈치인 것 같네요?”
엘레나 리본이 청예신의 물음에 희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알아요. 하지만, 그 마법은.”
“웬만한 마력으로는 절대로 시전할 수 없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는 멀린 아서조차 단 한 번 성공시켰던 마법을.
“죽어버린 미친 늙은이가 하려고 하고 있네요?”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크윽… 내가, 이렇게 죽을 성싶으냐……!’
죽기 직전의 헛소리일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같은 만물의 마법사들의 마력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펼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일 줄이야.
‘그냥 내가 죽일 걸 그랬나?’
유지한이 겪었던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되게 괴롭히다가 죽일 것을.
유리한은 잠깐 후회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암만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
유리한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내가 저 마법을 막을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아?”
-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니르로르가 코웃음을 치고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불가능하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하지.
그 말에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니르로르의 시선이 향한 곳에 고요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을 이용할 생각은 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 메테오를 파훼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강력한 마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고요한은 무한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
날 선 물음에 니르로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 지금 저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녀석은 고요한이 유일해서 쳐다본 것뿐이니라.
“다른 방법은?”
- 있다면 짐이 진작 알려주지 않았겠느냐?
그것도 그랬다.
“유리한 씨, 저 괜찮아요.”
“요한.”
유리한이 막으려는 듯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고요한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니르로르 씨, 알려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니르로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