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제로 바니스타는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다시 묻죠.”
성큼, 그의 앞에 다가선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로 바니스타. 우리를, 아니, 나를 도와준 이유가 뭐지?”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뮤즈의 백작은 꿀꺽 침을 삼켰다. 유리한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70층으로 올라가기를 원하잖아.”
그런데 아래 세계로 다시 내려가 니르로르를 치료할 방법을 알려줬다. 유리한의 의심 섞인 눈초리에 제로 바니스타가 입을 열었다.
“유리한 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70층에 올라가기를 원하고 있죠.”
트라이, 그에게 있어 하나뿐이었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려면 유리한 님의 힘이 필요하죠.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당신은 저 용이 죽으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 테지요.”
그 말에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로 바니스타가 자신과 니르로르 간의 ‘종속 계약’에 대해 알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놀란 눈에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혹시나 해서 던져본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맞았나 봅니다.”
유리한은 얼굴을 찌푸렸다.
‘당했다.’
어쨌거나 제로 바니스타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 용이 정신을 차려야만 하니까요.”
“언제는 니르로르 ‘님’이라면서 살갑게 대하더니.”
“하하, 처세술 아니겠습니까?”
살아남고자 배운 처세술.
뮤즈의 백작은 소망의 탑 내에서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는 플레이어였다.
“그러니 당신을 도와드리는 겁니다. 답이 됐습니까?”
“네, 충분히요.”
유리한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니르로르를 치료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늦어도 한 달, 그 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죠.”
“약속이 아닌, 맹세.”
들린 말에 유리한이 우뚝 멈춰 섰다. 제로 바니스타가 멈춰선 그녀를 향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트라이를 만나러 가고 싶거든요. 그러니 맹세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 달이 넘기 전,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입니다.”
맹세란, 말 그대로 서로의 심장을 담보로 삼는 계약.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네요.”
제로 바니스타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곧 그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대답부터 해주시죠. 저와 맹세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유리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죠, 맹세.”
“유리!”
맹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디에스 라고가 그녀를 만류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리한은 괜찮다는 듯 그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제로 바니스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한은 한 달, 그 안으로 니르로르를 치료한 후 당신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어요.”
“좋습니다. 저는 그 시간 동안 청의 기사단과 혈맹을 도와 무림을 안정시키도록 하죠.”
제로 바니스타가 유리한의 손을 맞잡았다. 동시에 환하게 빛이 터졌다.
서로의 심장을 담보로 하는 맹세가 이뤄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광경을 랴오륭이 보면 질색하겠네.’
그와도 비슷한 맹세를 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말했다.
“청의 기사단과 혈맹을 도와 무림을 안정시키겠다는 그 약속, 잘 지켜야 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맹세에 따라 심장이 멈추게 될 터.
제로 바니스타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리한 님. 제가 약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남자라서 말입니다.”
유리한이 픽 웃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품 안에 안긴 드래곤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한 달 후에 뵙죠.”
“그보다 더 빨리 돌아오시면 더더욱 좋을 것 같고요.”
“노력해 볼게요.”
유리한은 그 말을 끝으로 동료들과 함께 무림의 세계를 벗어났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엘리아룸.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건물인 황궁이었다.
“멈춰라!”
황궁 안으로 들어가려던 유리한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소속을 밝혀라!”
소속을 밝히라니, 처음 찾아왔을 때는 이러지 않았었는데?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말했다.
“지나가는 플레이어로, 황제 폐하의 명령을 잘 수행했다고 보고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폐하를 뵈었다는 말이냐?”
“네, 폐하께서 물과 불, 대지와 바람의 정령왕님들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하셨죠.”
유리한은 그만 자신들을 들여보내 줬으면 했다.
쌕쌕, 숨이 미약해지는 드래곤 때문에 불안감이 스물스물 올라온 탓이다.
하지만 황실 기사들은 황제에게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
‘망할.’
유리한이 이를 으득 갈았다.
원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던 곳 아닌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유리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였다.
“유리.”
디에스 라고가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부숴주겠다.”
“뭐, 뭐를?”
“이 철문을.”
디에스 라고가 가리킨 것은 황궁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황금색으로 칠해진 철문이었다.
유리한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유리, 나는 진지하다.”
“알아, 그래서 웃는 거야.”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고마워서.”
디에스 라고, 자신의 소중한 친구 덕에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철문을 부쉈으리라.
그때, 고요한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유리한 씨, 저도 이깟 철문은 쉽게 부술 수 있어요.”
“네, 그러겠죠. 이제 이 탑에서 요한의 마법을 이길 사람은 몇 없을걸요?”
아니, 아무도 없을 거다.
고요한은 무한의 마력을 지녔지만,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던 자신과는 달랐다.
마법에 뛰어난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습득 역시 남들보다 빨랐다. 더욱이 검술 실력은 어떻고.
‘디에스가 지나가는 말로 가르칠 맛이 난다고 했었지.’
사실 고요한의 자세를 이것저것 고쳐주면서 때리는 맛이 느껴져 내뱉은 말이었었지마는.
어쨌거나 고요한은 잠재력이 뛰어난 플레이어였다.
‘서문기율 씨보다 잠재력 면에서는 더 뛰어나겠지.’
무한의 마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와의 비교 따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문득, 고요한이 43층에서 사토 하루나에 의해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한 씨?”
고요한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유리한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고는 말했다.
“요한, 언제나 고마워요.”
“네?”
고요한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저야말로 계속 데리고 다녀주셔서 너무 감사한걸요.”
“데리고 다니고 있다니요?”
유리한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동료잖아요?”
동료는 언제 어디서든 함께하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면서 유리한이 고요한의 손을 꼭 잡는 순간.
“유리한 님!”
황제, 레이지 시안 디엔드 엘리아룸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그는 어린아이가 아닌, 장성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마법으로 변장 중인가 보지.’
유리한이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유리한 님은 제 은인이니까요!”
레이지가 그렇게 말하고는 버럭 소리 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분들을 모셔라!”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막았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그들에게 문을 열어줬다.
레이지는 직접 유리한의 안내를 자처하며 말했다.
“기사들이 막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최근 엘리아룸의 분위기가 흉흉해져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을 열었다.
“도시의 치안에 별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던데요?”
날 선 목소리에 레이지가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네, 그렇기는 하죠. 문제는 다른 것 때문입니다.”
“다른 것 때문이라니…….”
유리한이 목소리의 끝을 흐리던 그때.
쿠르릉―!
하늘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듯, 애처롭게 우는 목소리 같았다.
유리한이 그 소리에 미간을 좁히던 찰나 황제가 말했다.
“일단 어서 가죠. 유리한 님과 동료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네?”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유리한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황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어떤 설명도 없이 바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결국, 유리한은 동료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는.
“야! 아쿠아! 그렇게 함부로 힘을 사용하면 안 된다니까?! 나처럼 이런 식으로……!”
“아니야! 이그니스 이 바보야!”
“저게 누구보고 바보래?!”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와 함께 온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쿠아와 이그니스, 두 이름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름뿐만이 아니라 눈앞에서 싸우고 있는 장면도 말이다.
유리한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다가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아쿠아 님? 이그니스 님?”
그 소리에 아쿠아와 이그니스가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멈췄다.
아쿠아는 눈앞의 여자가 진짜인지 알아보려는 듯 두 눈을 비볐고, 이그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다정한 목소리가 성스러운 공간을 울렸다.
“어머, 아쿠아. 네가 보고 싶다던 손님이 오셨네.”
“그러게. 나도 보고 싶던 손님인데 말이야.”
유리한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아우라 님과…….”
유리한이 바람의 정령왕 옆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테라 님?”
“맞아, 정답.”
테라가 유쾌하게 말했다.
유리한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아니, 플레이어들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에게 얼굴을 내비치지 않기로 유명한 정령왕들이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유리한이 황당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유리한, 안녕!”
아쿠아가 명랑하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