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21. 드래곤이란 생명체 】
유리한을 부른 디에스 라고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에스? 갑자기 왜 그래?”
디에스 라고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뭐?”
유리한이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고 물으려던 찰나.
“맞아요, 유리한 씨.”
고요한이 디에스 라고와 똑같은 말을 전했다.
유리한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요한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고요한이 우물쭈물 말했다.
“유리한 씨 혼자서 모든 일을 떠맡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요. 조금 전에 정령왕님들과 대화할 때도 그렇고요.”
그러면서 고요한은 유리한의 품에서 니르로르를 안아 들었다. 그는 곧장 니르로르에게 힐(Heal)을 시전하며 말했다.
“유리한 씨가 그랬잖아요. 우리는 동료라고. 그러니까 혼자서 다 하려 하지 말고 함께 가게 해주세요.”
“고요한의 말이 맞다, 유리.”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너는 정령왕들과의 대화에서 모든 짐을 짊어진 것처럼 굴었지.”
그리고 그건 튜토리얼이 이뤄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가장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었었다.
자신이 다치든, 목숨에 위협을 받든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유리한은 두 남자의 말에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다가 고개 숙였다.
“미안해.”
그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
“유리한 씨?”
유리한은 고개를 들고선 그대로 두 남자를 끌어안았다.
“너희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두 사람이 없었다면 자신은 진작 이성을 잃어버렸을 거다.
니르로르가 잘못되어 불안감과 초조,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들이닥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면서 이성을 잃어버렸겠지.
‘망할 드래곤 같으니라고.’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의 머리칼을 각기 다른 두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깨어나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줘야지.’
유리한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두 남자를 놓아줬다.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두 사람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유리한은 그런 둘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쿠르릉―!
하늘이 비명을 지르듯 울린 건 그때였다.
“자, 그럼 드래곤들을 만나러 가볼까?”
유리한이 활짝 웃고는 앞서 걸어 나갔다. 두 남자는 멍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고요한이 말했다.
“디에스 씨.”
“왜 그러지?”
“조금 전에 꿈 아니었죠?”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의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갑자기 왜 꼬집으세요?”
“네가 아픔을 느낀 걸 보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디에스 라고가 픽 웃고는 유리한의 뒤를 따랐다.
“가지, 요한. 그 망할 날개 달린 도마뱀 녀석 잘 챙기고 따라오도록 해라.”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거든요?”
고요한이 뚱한 얼굴로 디에스 라고의 뒤를 쫓았다. 아니, 그는 유리한의 뒤를 쫓아 달렸다.
자신의 품 안에서 쌕쌕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니르로르를 유리처럼 다루면서 말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드래곤들을 찾아 나섰다.
* * *
드래곤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낸 것은 엘리아룸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가 된 탓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을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지?”
유리한의 말에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은 서로 연합하여 화이트 드래곤 무리를 공격 중이라고 했으니, 그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왜 싸우는 걸까? 블랙 드래곤이 세상에 얼마나 큰 위험을 가져온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고요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제 품 안에서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새끼 드래곤을 살폈다.
“니르로르 님을 보면 그렇게 위험한 것 같지 않은데 말이에요.”
그 말에 디에스 라고와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겠지?”
“맞아요, 요한. 니르로르가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뺨을 콕콕 찍으며 불퉁하게 말했다.
“이 자식은 우리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고요. 그러니까, 탑 밖의 세상을 말이죠.”
그것 때문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뭐, 이 녀석한테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요.”
그렇다고 해도 니르로르가 많은 플레이어의 목숨을 앗아 간 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동료로 받아들였다.
종속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묶이게 된 원수가 아닌, 서로 진심을 나누는 동료로.
“니르로르, 이 멍청아. 내 목소리 들려?”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너 깨어나면 한 대 쥐어박아 줄 거야. 알겠지?”
끄응, 새끼 드래곤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요한의 품을 파고들었다. 유리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어쨌든 화이트 드래곤들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봐야겠네요.”
“그건 제가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건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자였다.
가슴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가진 여성의 등장에 디에스 라고가 경계했다.
“너는 누구지?”
“아, 저는…….”
여성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자신을 소개했다.
“51층에 살고 있는 리아그라고 해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리아그가 황급히 자신이 무해함을 어필하며 덧붙여 말했다.
“우연히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유리한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화이트 드래곤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나 보네요?”
“네, 바로 위층이라고 하죠? 51층에서 둥지를 틀고 레드 드래곤과 블루 드래곤을 상대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분들을 찾아가는 것보다는…….”
리아그의 목소리 끝이 흐려지더니 낯빛 역시 어두워졌다.
“리아그 씨?”
“아, 네. 죄송해요. 어쨌든 화이트 드래곤은 51층에 있어요. 그분들을 찾아가려는 건, 품 안의 그 드래곤 때문이죠?”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이 51층이라서요. 색만 다르지, 드래곤의 형체는 모두 비슷하니까요.”
리아그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리아그, 거기서 뭐 하니? 어서 돌아가자꾸나.”
“어머니!”
그녀와 똑 닮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라고?’
유리한은 놀란 눈을 보였다.
눈앞의 여성의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무척이나 젊어 보였던 탓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장성한 딸을 둔 어머니라니.
유리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리아그가 꾸벅 고개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여러분께 정령왕들의 가호가 베풀어지기를 바랄게요.”
“아, 네. 감사해요.”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멀어지는 모녀를 바라봤다.
“유리, 왜 그러지?”
“아니, 아까 그 여자가 조금 닮은 것 같아서.”
“누구랑요?”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 녀석이 어른 모습을 하고 있을 때랑요?”
“그런가요? 저는 모르겠던데요.”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어쨌든 화이트 드래곤들이 어디 있는지도 알았고, 올라가 볼까요?”
“네, 좋아요.”
고요한이 방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에스, 너도 괜찮지?”
“물론이다.”
디에스 라고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유리한의 말에 단 한 번도 토를 달지 않는 그들이었다.
유리한은 그것이 참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어쨌거나 지금은 니르로르를 치료하는 게 우선.
“니르로르, 이 망할 녀석아. 너 때문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는 건지 알아?”
유리한이 잠든 드래곤의 뺨을 살짝 꼬집고는 두 눈을 낮게 가라앉혔다.
‘화이트 드래곤들이 부디 이 녀석을 치료해 줬으면 좋겠는데.’
유리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료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향한 곳은 위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가자.”
유리한이 망설임 없이 ‘열림’ 버튼을 눌렀다.
* * *
한편, 그 시각.
유리한에게 도움을 줬던 리아그는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리아그, 내가 인간들이랑 대화 나누는 건 자제하라고 했잖니?”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하지만?”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제 딸과 똑같이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물었다.
리아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 형제는 죽었죠?”
“죽었어.”
리아그의 어머니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블랙 드래곤이었던 네 아비가 미쳐 죽여버렸지.”
“그렇죠?”
리아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리아그를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별일이구나. 네가 갑자기 형제 이야기를 꺼내다니.”
“그게, 만난 것 같아서요.”
“누구를?”
“제 형제를요.”
그 말에 리아그의 어머니가 자리에 멈춰 섰다. 리아그는 그것도 모르고 재잘거렸다.
“인간의 품에 안겨 있는 해츨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니르로르’라고 하더라고요.”
니르로르.
그 이름에 여성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리아그는 자리에 멈춰 선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 그건 제 형제의 이름이죠?”
여성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리아그는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제 형제는 정말 죽었나요?”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딸아이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리아그, 그 인간들은 지금 어디 있지?”
“51층으로 갔을 거예요. 화이트 드래곤들을 찾아갈 모양인 것 같았어요.”
“그 녀석들은 왜?”
“품에 안고 있는 해츨링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암만 새끼 드래곤이라고 해도 제 기척을 느꼈을 텐데 미동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리아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게, 블랙 드래곤처럼 보였거든요. 비늘이 까만색이었어요. 그래서 화이트 드래곤을 찾아갈 생각인 것 같았어요.”
“눈은?”
“네?”
“눈은 무슨 색이었니?”
“어, 음. 보지 못했어요. 품에 꽁꽁 안겨 있어서.”
리아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붉은 기운을 풀기 시작했다.
“어머니?”
“우리도 51층으로 가자꾸나.”
“네? 하지만 어머니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러지 않을 거다.”
곧, 붉은 기운이 여성을 감쌌다. 이내 드러난 건 커다란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엘리아룸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돌아갔다. 여성은 그들에게 관심 주지 않고 제 딸아이에게 말했다.
-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어서 타거라.
리아그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