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아리아텐이 니르로르를 품에 안아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블랙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의 본질이 섞인 존재라는 걸 알자마자, 레드 일족들이 아이를 죽이려고 들었던 탓이다.
‘필시 재앙이 될 거다!’
‘그래, 섞인 녀석이라니! 그것도 블랙 드래곤과 이렇게 섞인 녀석이 태어나다니!’
‘죽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일족에도, 이 세상에도 멸망을 불러올 것이다.’
‘그래, 아리아텐! 죽여야 한다!’
아리아텐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아이를 구한 것이 바로 블랙 드래곤 중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했던 남편이었다.
니르로르의 아버지이자 그녀의 남편이었던 블랙 드래곤은 일족의 공격을 염려해 아이를 대피시켰다.
숨겼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반면 레드 드래곤인 아리아텐,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아이가 니르로르란 이름으로 이 세상에 재앙으로 나타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아이를 일족의 손에서 구출해 낸 남편을 죽여버렸을 뿐이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를 레드 일족으로부터 대피시킨 후, 남편은 다른 블랙 드래곤과 같이 오염되어 미쳐버렸으니 말이다.
알에서 태어나지 못한 다른 아이라도 지켜야 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이런.”
다르다.
아리아텐이 제 품에 안긴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저와 비슷한 처지의 여자를 불렀다.
“네? 제 이름은 어떻게…….”
“시드니가 그렇게 싸고도는 딸아이의 이름을 내가 모를까 봐?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이름이다.”
그 말에 에이런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시드니가 자신을 아낀다는 소문이 다른 일족에게까지 이렇게 퍼져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아리아텐이 물었다.
“네 아이는 눈을 떴느냐?”
“네? 네, 제 눈과 똑같이 금빛이에요.”
“그렇구나.”
화이트 드래곤들이 그토록 아이를 감싸는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아리아텐이었다.
태어난 아이가 아비를 따라 붉은 눈이었다면 곧장 죽여버렸을 것이다. ‘니르로르’를 연상하게 만드는 외모였을 테니.
‘그리고 화이트 드래곤들은 이런 식으로 에이런의 아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겠지.’
에이런에게 아이를 포기하도록 종용했을 거다. 아리아텐의 두 눈이 잔잔히 가라앉았을 때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에이런 님의 아드님은 아직 이름을 받지 못했어요.”
“이름이라면, 격(格)을 말하는 거겠지.”
“네.”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이런에게 물었다.
“에이런 님, 편히 부르는 이름이라면 있죠?”
“네! 있어요!”
에이런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면서 수줍게 두 뺨을 붉혔다.
“에덴이라고 지었어요. 바깥세상에서는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걸 어떻게…….”
“동면에 들어가기 전 만났던 인간에게서 들은 이야기예요.”
유리한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엘리아룸의 드래곤들이 동면에 들어간 건 꽤 옛날 일임이 분명할 터.
‘그런데 누가 에덴의 동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 거지?’
하지만 유리한의 의문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줄 아느냐?”
“네? 그건 아직 못 해요.”
그때, 소란 속에서도 에이런의 품에 잠들어 있던 에덴이 두 눈을 떴다.
- 우우, 우.
“그래, 아가.”
에이런이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랬다.
“엄마 여기 있어, 에덴.”
에이런이 해츨링을 보듬어 안으며 토닥거릴 때였다.
“으음.”
아리아텐의 품에 안겨 있던 니르로르가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곧 그는 아리아텐과 눈을 마주치고는 비명을 질렀다.
“유리한아!”
“나 여기 있어, 니르로르.”
유리한이 황급히 아리아텐으로부터 니르로르를 안아 들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유리한아, 저 여자는 누구냐? 나를 정말 죽이려는 것이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네가 죽으면 나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왜 죽이려고 들겠냐면서 유리한이 아이를 토닥거렸다.
“일단 진정해, 니르로르. 한숨 더 자거나.”
“아니.”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아리아텐이었다. 아리아텐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니르로르.”
그가 두 눈을 샐쭉하게 뜨며 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날이 선 목소리.
아리아텐은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네게 ‘죽음의 드래곤’이란 격이 내려진 건 언제였지?”
“네 녀석한테 말해줄 이유는 없다만?”
니르로르가 이를 드러내며 눈앞의 여자를 경계했다.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아프니라, 유리한아!”
“아프라고 때린 거야. 그보다 질문에 어서 대답이나 해. ‘죽음의 드래곤’이란 격을 도대체 언제 받은 거야?”
니르로르가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처음 인간의 모습을 취했을 때다.”
“그때?”
“그래, 그리고 엘리아룸의 존재라면 아마 저 여자도 알 거다. 내게 ‘죽음의 드래곤’이란 격이 내려졌을 때, 온 대지가 울렸으니.”
니르로르가 두 눈을 더욱 샐쭉하게 뜨며 아리아텐을 향해 말했다. 그에 유리한이 물었다.
“정말이에요?”
아리아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르로르는 더 이상 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힘든지 유리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때, 온 대지가 울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내게 ‘죽음의 드래곤’이란 이름을 선사하겠다고.”
우르르―!
니르로르가 웅얼거렸다.
“그래, 지금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유리한이 멍하니 입술을 벌리려던 찰나.
- 화이트 드래곤 에이런과 레드 드래곤 스칼렛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블랙 드래곤.
그녀의 귓가에 성별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리한만 들은 것이 아닌지, 모두가 놀란 얼굴이었다.
- 에덴에게 격이 내려집니다.
“잠깐!”
유리한, 그녀 자신도 모르게 외친 소리였다. 그런다고 멈출 녀석일까 싶었지만.
- 인간이여, 그리 외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통했다.
유리한이 예기치 못한 기회에 꿀꺽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에덴에게 내려질 그 격, 우리 드래곤이 대신 받을 수 있을까?”
유리한이 아리아텐의 레어 밖으로 달려 나가며 말했다. 곧,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어린 해츨링에게 내려질 격을 니르로르한테 내려달라고.”
- 니르로르?
감정 없던 목소리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 그에게는 이미 ‘죽음의 드래곤’이란 이름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어둠의 드래곤’으로 격이 떨어져 버렸지.”
-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직접 보고 판단해 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잔잔한 바람이 일었다.
곧, 유리한은 푸른빛이 감도는 투명한 두 눈을 마주 보게 됐다.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눈이었다.
마주친 시선에 오싹한 감정이 들었다. 유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눈은 유리한의 품에 잠들어 있는 니르로르를 빤히 보더니 사라졌다.
“이, 이봐?”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유리한의 재촉에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탑의 주인께서 니르로르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이면서 격을 떨어뜨린 모양이군요. 전달되지 않은 사안이라 몰랐습니다.
“뭐?”
- 당신은 알 필요 없는 사안입니다, 플레이어여.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알 필요 없는 사안이기는?’
듣기로 엘리아룸은 물과 불, 대지와 바람의 정령왕들이 통치하는 세계라고 했다.
그런데 저 목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더욱이 탑의 주인과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아리아텐.”
유리한이 그녀를 부르며 물었다.
“이곳에는 신이 있나요?”
“있었다는 기록은 있다.”
그에 유리한이 허공을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봐, 당신. 당신은 이 세상의 신인가?”
- 한때는 그렇게 불린 것 같으나 지금은 이 탑의 일부일 뿐.
자신조차 제 정체를 잘 모르겠다는 투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어째, 이 탑을 오르락내리락할수록 알아서는 안 되는 영역에 손을 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런 불쾌한 기분을 느끼거나 말거나 목소리는 이어졌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화이트 드래곤 에이런과 레드 드래곤 스칼렛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블랙 드래곤, 에덴에게 내려질 격을 회수.
또다시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회수한 이름을 ‘니르로르’에게 전하겠습니다.
유리한과 시선을 마주했던,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한 두 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니르로르를 빤히 보며 말했다.
- 니르로르, 그대는 이제부터 ‘광명의 드래곤’입니다. 그에 따라 당신의 낮춰진 격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낮춰진 격?’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죽음의 드래곤’이란 원래의 격은?”
- 그 역시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잠깐만!”
유리한이 놀라 외쳤다.
‘광명이라니?!’
니르로르는 모든 빛을 지우는 죽음의 드래곤이었다. 지금은 어둠의 드래곤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간에 그는 빛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드래곤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광명이라니!’
니르로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힘이었다.
더욱이.
“그 이름, 우리 아들이 받을 수 있는 격인가?”
그랬다.
한평생을 줄곧 어둠과 함께 살아온 니르로르가 그 이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아리아텐의 단호하면서도 분노 섞인 목소리에 답이 들려왔다.
- 그것은 니르로르에게 달려 있습니다. ‘광명의 드래곤’은 ‘죽음의 드래곤’과 비슷한 격, 그러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실치 않은 무책임한 말이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곧 제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 화이트 드래곤 에이런과 레드 드래곤 스칼렛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블랙 드래곤, 에덴에게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말도 못 하는 해츨링한테 선택지라니요?!”
에이런이 놀라 외쳤다. 그러나 고저 없는 목소리는 제 할 말을 이어갔다.
- 어미인 화이트 드래곤과 아비인 레드 드래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에이런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에덴이 목소리가 들리는 허공을 향해 금빛 두 눈을 끔뻑였다.
- 그래요, 알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화이트 드래곤 일족입니다. 그 검은 비늘은 이제 하얗게 물들게 될 겁니다.
그 말대로 에덴의 검은 비늘이 변하기 시작했다. 에이런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에덴!”
- 맘마아!
마치, 엄마라고 하는 것처럼 에덴이 웅얼거렸다.
에이런의 두 눈에 곧 눈물이 들어찼다. 유리한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허공을 향해 목소리를 내뱉었다.
“니르로르는 이제 괜찮아지는 거야? 너라면 얘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은데.”
- 그건 니르로르,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로서는 니르로르의 안위를 확신할 수 없다는 소리.
유리한이 불확실한 상황에 두 주먹을 꽉 쥘 때였다.
“잠깐.”
아리아텐이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에게도 이와 같은 상황이 주어질 수 있었나?”
말끝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