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유리한이, 아리아텐의 시선에 한껏 눈웃음을 짓고 있을 때 디에스 라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해결됐군.”
“해결된 건 아니지.”
유리한의 시선이 아리아텐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니르로르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두 눈에 음울한 음영이 드리웠다.
“니르로르가 무사히 그 ‘광명’이라고 불리는 격을 잘 받아들였는가를 봐야지.”
혹시나 그가 그 이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생각하기도 싫어.’
유리한이 두 손을 꽉 주먹 쥘 때였다.
“아리아텐 님?”
“이제 네가 안도록 해라.”
언제 유리한의 앞에 다가왔는지 모를 아리아텐이 그녀에게 아들을 넘겼다.
그에 유리한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시드니 님과 엘리아데스 님을 말리느라 팔을 다쳐서요. 아리아텐 님이 그 자식이 깨어나기 전까지 계속 안아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고요한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다치셨다고요?!”
그가 황급히 유리한의 상처를 살피고자 달려왔다.
“아, 요한.”
유리한이 자신의 팔을 잡고서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이는 고요한에게 소곤거렸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아리아텐 님이 니르로르를 계속 안고 있어 줬으면 해서요.”
“아…….”
고요한이 얼빠진 표정을 보이다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치료하는 척 힐을 사용해 드릴게요.”
“그래 주면 고맙죠.”
유리한의 고요한의 말에 활짝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봐, 유리한. 다 들린다만?”
드래곤의 청력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아하.”
유리한이 머쓱하게 웃었다.
“어쨌든 니르로르, 깨어날 때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요?”
유리한이 아리아텐의 말을 끊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잖아요. 그리고 그러고 싶어 하잖아요.”
“하지만, 나는.”
“아리아텐 님.”
유리한이 아리아텐의 말을 다시 한번 더 끊고는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은 기억하고 있잖아요.”
아리아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유리한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니르로르를 안고 있어도 되는 이유는 충분해요. 무엇보다.”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말을 끝마쳤다.
“어미 품이 자식에게 제일 안정을 준다고 하잖아요? 니르로르가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부탁드릴게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요망하게 구는 모습에 아리아텐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드니가 손자를 안고서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아리아텐, 고맙다는 인사를 미처 하지 못했군.”
“그 인사는 제가 아니라 유리한에게 하도록 하십시오.”
“오, 괜찮아요. 감사 인사는 충분히 받았으니까요.”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그보다 아리아텐 님, 니르로르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기꺼이.”
“우와, 감사해요!”
유리한이 활짝 웃었다. 아리아텐은 그녀의 웃음을 물끄러미 보다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밖에 나가시려고요?”
“그래, 계속 이렇게 안에 있는 것보다는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 네 오라비에게도 좋겠지.”
더군다나 레어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 사납다면서 아리아텐은 괜히 눈가를 찡그렸다.
그 말에 시드니가 황급히 손자를 안은 채, 제 딸아이와 함께 아리아텐의 레어를 떠났다.
“고마웠다네.”
라는 인사를 남겨두고 말이다.
그렇게 레어 안에 사람이 줄어들어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아리아텐은 바깥으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말릴 수 없음을 안 리아그가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그래.”
그렇게 아리아텐이 니르로르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리, 리아그?”
리아그가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해요.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리고 어머니께 오라버니를 되찾아주셔서요.”
“말은 똑바로 하지. 네 어머니는 니르로르를, 읍!”
유리한이 황급히 디에스 라고의 입을 틀어막고는 말했다.
“괜찮아요, 리아그. 저희한테 그런 식으로 고개를 숙일 필요 없어요. 더욱이 고맙다는 인사는 넘칠 정도로 충분히 받았으니까요.”
그 말에 리아그가 잔잔히 미소를 그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한 님께서는 오라버니가 깨어나자마자 이곳을 떠날 거지요? 오라버니와 함께요.”
유리한 ‘님’이라니.
유리한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정정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에이, 편한 대로 부르라지.’
였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리아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죄송하지만요.”
“아니요, 죄송할 것 없어요.”
리아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살아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기쁘니까요. 어머니도 그러실 거예요.”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유리한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그렇지만 네 어머니는 니르로르를 버리, 우웁!”
유리한이 다시 다급하게 디에스 라고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하하, 디에스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얘가 조금 매정한 구석이 있어서요.”
“괜찮아요, 어쨌든 사실이니까요.”
리아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라버니가 태어났을 때, 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요.”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 않았나?
리아그는 먼 옛날의 일을 떠올리듯 애달프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알을 깨고 난 후,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하게 되고 나서야 알게 됐죠. 저한테 오라버니가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오라버니가 세상에 배척당해 죽어버렸다는 것 또한 리아그는 알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리아그는 비로소 어머니인 아리아텐이 왜 일족을 벗어나 자신과 함께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지를 알았다.
또한, 이따금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며 그리움에 잠긴 미소를 보이는 이유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
“그보다 춥지 않으세요? 불을 더 지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다만, 배가 조금 배고프네요.”
“그거라면 잠시만요.”
리아그가 황급히 레어 안쪽의 창고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저랑 어머니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자주 먹는 거예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도마뱀 구이였다.
유리한과 고요한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디에스 라고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들의 모습에 리아그가 멋쩍게 웃었다.
“으음, 별로인가요? 맛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쩌랴?
“별로인지 아닌지는 직접 먹고 난 후에 판단해야죠! 맛있게 먹을게요, 리아그!”
유리한이 활짝 웃으며 도마뱀 구이를 받아 들었다. 그에 고요한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와 똑같이 도마뱀 구이를 한 손에 쥐었다.
디에스 라고는 죽어도 먹지 않겠다는 얼굴이었으나.
“디에스, 우리 튜토리얼이 이뤄졌을 때 이것보다 더한 음식들 먹은 거 기억하지?”
난데없이 추억을 회상하는 목소리에 그들과 똑같이 도마뱀 구이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옛날, 자신이 무엇을 먹고 토악질을 했는지 유리한이 하나씩 읊어줄 것 같아서.
그렇게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들이 리아그가 내민 도마뱀 구이를 씹어 먹고 있을 때.
“엘리아데스의 말이 사실이었군, 아리아텐.”
레어를 찾아온 레드 드래곤의 장로, 알케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 * *
쏴아아―!
들이닥친 바람에 온 숲이 울렸다. 아리아텐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제 앞을 막아선 동족의 장로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내가 무슨 일로 너를 찾아왔을 것 같으냐?”
차디찬 질문이 돌아왔다.
아리아텐은 가만히 제 품 속에서 고이 잠든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무심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아리아텐, 그걸 말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말이라고 한 겁니다.”
아리아텐은 레드 일족들과 거리를 둔 지 오래였다.
재앙이라 불리었던 ‘니르로르’가 탑의 주인과의 계약으로 세상에서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딸아이와 모습을 감췄다.
그 당시에도 레드 일족을 이끌고 있던 알케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동족.
어디에서 제 딸아이와 가만히 숨죽이고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 순간, 화르륵, 불길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거대한 몸집의 레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폴리모프를 푼 알케나가 고함을 내질렀다.
- 당장 그 빌어먹을 재앙을 죽여라, 아리아텐! 그러지 않으면 너 역시 죽을 것이다!
온 숲이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리아텐은 담담했다.
그저, 제 품 속의 아들이 조금 전의 소란으로 앓는 소리를 내어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눈앞의 알케나가 아니라 제 아들에게 말이다.
- 아리아텐!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잘 들립니다.”
아리아텐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블루 드래곤의 장로님께 이야기를 들었다면, 화이트 드래곤에게서 태어난 재앙이 어떻게 됐는지도 아시겠죠?”
- 그 재앙이 어떻게 됐는지 내 알 바 아니다.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저를 찾아왔겠죠.”
아리아텐이 미소를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 재앙은 완전히 화이트 일족이 되었습니다.”
- 뭐?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가능하더군.”
- 시드니!
아리아텐의 레어를 떠난 줄 알았던 화이트 드래곤의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알케나가 이를 드러냈다.
- 뻔뻔하게 잘도 죽고 싶어서 내 앞에 찾아왔구나! 그것도 네 딸이며 빌어먹을 재앙과 함께!
“알케나.”
시드니가 고요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한 번 더 내 아이들을 그딴 식으로 말하면 그 방정맞은 입을 찢어놓을 줄 알게.”
경고성 짙은 목소리에 알케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시드니는 한심하다는 듯, 눈앞의 레드 드래곤을 쳐다보며 제 딸아이에게 말했다.
“에이런, 저 생각 없는 녀석에게 아이를 보여주렴.”
“그래도 될까요?”
“된단다.”
화이트 드래곤의 장로, 시드니의 늦둥이 딸이 재앙을 낳은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유명하기만 할까?
그것 때문에 동면 중이던 모든 드래곤이 깨어났다.
레드 드래곤과 블루 드래곤은 그 재앙을 죽이기 위해, 화이트 드래곤은 그 재앙을 지키기 위해서.
에이런은 꿀꺽 침을 삼킨 후 눈앞의 알케나에게 제 아이를 보여줬다.
누가 봐도 화이트 드래곤인, 제 아들 에덴을 말이다.
알케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 거짓말…….
알케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