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린 목소리에 시드니가 쯧, 혀를 차고는 말했다.
“눈앞에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는군.”
- 너라면 믿을 수 있겠느냐, 시드니! 분명 재앙이었던 녀석이다! 그런데 저 꼴은 뭐란 말이냐!
“뭐기는.”
시드니가 픽 웃고는 에이런한테서 제 손주를 안아 들었다.
“엄연한 우리 일족의 모습이지.”
- 우움!
시드니의 품 안에서 그녀의 손주, 에덴이 맞다는 듯 칭얼거렸다.
알케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리아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장로님께서 제게 그러셨죠. 그 재앙을 낳았으니 어떻게든 제 손으로 죽이라고요.”
아리아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이 어미가 된 도리라고 말입니다.”
제 가슴에 비수를 꽂는 목소리를, 아리아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맞는 말이라면서, 장로의 뜻에 따랐었다.
“장로님께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재앙을, 아니, 니르로르를 낳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됐었는데.
제 아들을 재앙이라면서 세상에서 몰아내지 않을 방법을 찾았어도 됐었는데 말이다.
아리아텐의 말에 알케나는 입을 열었다.
- 당연히……!
그렇게 말했을 거다.
일족을, 더 나아가 세상의 안전을 위해 그리했을 거다. 그런데 왜 말이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알케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쩌억 아가리를 벌렸다.
- 어쨌든, 그 재앙이 살아 숨 쉬는 꼴은 볼 수 없다! 아리아텐!
레드 드래곤은 호전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들을 이끄는 장로, 알케나의 성격이 유하면 얼마나 유하겠는가?
‘저렇게 나올 줄 알았지.’
아리아텐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장로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퍼억―!
자신과 아들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 장로의 얼굴이 웬 인간의 손에 옆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크악……!
나무에 처박힌 알케나가 비명을 지른 건 그때였다. 그 목소리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린 아리아텐이 입을 열었다.
“유리한?”
레드 드래곤의 장로, 알케나의 얼굴에 시원하게 주먹을 꽂아 넣은 유리한이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아리아텐 님. 본의 아니게 니르로르와의 산책을 방해하게 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 으윽……! 너는……!
“유리한이라고 합니다, 레드 일족의 장로님.”
유리한이 눈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블루 드래곤의 장로님께서 말해주지 않았나 봐요. 자신이 웬 인간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걸요.”
유리한의 손에 창이 들렸다. 그녀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시드니 님, 아리아텐 님을 보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시드니가 니르로르를 소중하다는 듯 꼭 끌어안고 있는 아리아텐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에 알케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 시드니! 재앙을 안고 있는 녀석을 감히 보호하겠다는 거냐!
“너희와 블루 일족이 우리 화이트 일족과 왜 싸웠는지 그새 까먹었나 보군.”
화이트 일족, 그중에서도 자신의 소중한 늦둥이 딸한테서 태어난 손주 녀석을 재앙이라면서 죽이려고 들지 않았나.
“또한, 알케나. 아리아텐의 품에 안겨 있는 녀석은 더 이상 재앙이 아니다. 너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텐데?”
시드니가 비아냥거리며 알케나를 도발했다.
알케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제 일족의 품에 안겨 있는 재앙을 노려봤다.
시드니의 말대로, 먼 옛날에 저를 오싹하게 했던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죽여야 한다!’
재앙은 재앙.
알케나는 아가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유리한이 키득거렸다.
“아닌가 본데요?”
“이것 참, 같은 드래곤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군.”
시드니가 짧게 혀를 차고는 자신의 딸아이와 아리아텐을 제 뒤로 숨겼다.
유리한은 그들 앞에 서서는 창을 휘둘렀다.
- 그깟 창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알케나가 우습다는 듯 유리한을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들었다.
그리고 유리한, 그녀는.
끼기긱―!
참 가볍게도 알케나의 공격을 막았다. 드래곤을 상대하고 있는데도 전혀 밀려나지 않는 힘.
알케나가 놀란 눈을 보였다.
유리한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아주 잘 막아지는데요?”
- 이런, 주제도 모르는 인간이!
알케나가 까드득, 이를 갈고는 유리한의 창을 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 크아악!
“아이고, 이런.”
도리어 그녀의 창을 막고 있던 알케나의 날카로운 손톱이 부러지고 말았다.
철철 피가 흐르는 상황에 유리한이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얼굴로 ‘어쩜 좋아’를 연신 외쳐대며 입을 열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제 창이 조금 특수한 광물로 만들어진 거라서요.”
사실 만들어진 게 아니라,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에 얻은 무기였다.
세상을 폐허로 만든 게이트를 닫은 후에는 꼭 아이템 한두 가지를 얻었으니.
유리한이 지닌 무기 또한 게이트를 닫으면서 얻은 아이템이었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창이라고 하던가? 혹시, 35층 아세요? 그곳에 사는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보다 더 단단할 거예요.”
그래서 유리한은 마호가니 마을의 촌장, 엘브리스크의 무기를 탈탈 털었어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경매에 부쳐버린 거였다.
자신에게는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창이 있었으니까.
“자, 어떻게 하실래요?”
유리한이 사악하게 미소를 그리며 알케나에게 물었다.
“계속 싸움을 이어 나가시겠어요? 저는 상관없어요. 오히려 몸이 근질근질하거든요.”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이 탑이 세워지기 전, 제가 살던 세상에서 드래곤은 이성도 지성도 없는 ‘몬스터’였거든요.”
그러니까 유리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랬다.
눈앞의 알케나가 바로 그 ‘몬스터’와 다를 바 없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몬스터는 마땅히 처치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유리한의 말에 담긴 뜻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알케나가 꿀꺽 침을 삼킨 후 말했다.
- 물러나도록 하지.
“노노, 그런 말로는 안 돼요.”
유리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리아텐 님을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또한, 니르로르에게 재앙이니 뭐니 그런 헛소리 또한 하지 말고요.”
니르로르는 분명 재앙이었다. 그래, 옛날에는 그랬다는 거다.
“니르로르가 암만 거슬린다고 해도 참으세요. 저 녀석이 깨어나는 순간 저는 이곳을 떠나 위로 올라갈 생각이니까요.”
유리한이 그렇게 말하고는 알케나를 보내주려고 할 때.
“아, 참.”
그녀가 알케나를 붙잡아 세우고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나 제가 니르로르와 떠난 후, 아리아텐 님께 보복한다거나 그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대로 제 손에 죽을 줄 아세요.”
유리한의 두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저한테 있어서 드래곤과의 전투는 언제나 생사가 오가는 짜릿함을 안겨주는 즐거운 오락거리였거든요.”
놀리는 듯한 말에 알케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왜지?’
눈앞의 여자가 뿜어내는 기운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알케나는 결국 꼬리를 말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너는 레드 드래곤의 장로인 바로 나, 알케나의 분노를 샀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곧 알게 해주마.
라고 입을 털면서 떠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알케나가 떠난 후, 유리한은 시드니를 비롯한 드래곤들에게 물었다.
“드래곤들은 원래 저렇게 입을 잘 터나요? 아, 물론 시드니 님과 에이런 님 그리고 아리아텐 님은 제외하고요. 리아그 님도요.”
황급히 자신의 이름을 덧붙이는 목소리에 리아그가 픽 웃었다.
“레드 드래곤의 특징이다. 아, 그래. 유리한, 네 말대로 옆의 아리아텐과 그녀의 딸은 예외로 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시드니 님.”
아리아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리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드니에게 물었다.
“그보다 레어로 돌아가신 줄 알았더니 무슨 일이세요?”
“당연히 알케나의 기운을 느껴서 급히 돌아왔지. 그 녀석이 괜히 너나 아리아텐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서 말이다.”
시드니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 옆에서 그녀의 딸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받은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는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급히 돌아왔다면서 에이런이 웃으며 말했다. 그에 유리한이 키득거렸다.
“시드니 님은 세 장로들 중에서 가장 장로다운 분이신 것 같네요.”
“칭찬으로 듣지.”
“물론, 칭찬이에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리고 아리아텐. 알케나가 너를 위협하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오마. 너 또한 내 손주의 은인이니.”
“아닙니다, 장로님. 저는 당신의 손자를 위해 한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아니.”
시드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 아들이 내 손주 녀석을 살린 거나 다름없지 않느냐?”
그 말에 아리아텐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으음…….”
아리아텐의 품에 안겨 있던 니르로르가 눈을 떴다.
“유리한아?”
묻는 목소리에 아리아텐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니르로르의 눈가를 가렸다.
“더.”
아리아텐이 파르르 입술을 떨다 목소리를 내었다.
“더 자렴, 아가.”
내뱉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니르로르는 다시 단잠에 빠졌다.
아리아텐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아이를 소중하게 안았다. 유리한은 그런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니르로르를 아리아텐의 곁에 두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종속 계약에 의해 자신과 니르로르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였다.
더욱이, 뮤즈의 백작과 한 계약도 있지 않은가?
‘보자, 남은 시간이.’
유리한이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봤다. 곧, 그녀의 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맹세가 종료되기까지 앞으로 ‘30’일 남았습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깊은 밤.
째깍, 시계가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드는가 싶더니.
[맹세가 종료되기까지 앞으로 ‘29’일 남았습니다.]
시스템 창이 바뀌었다.
유리한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니르로르는 여전히 아리아텐의 품에서 고요히 잠든 채였다.
‘언제 깨어나려나?’
유리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29일 안에는 깨어나겠지. 몸도 회복하고.’
유리한은 속 편하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