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22. 맹세가 끝나기 전에 】
[맹세가 종료되기까지 앞으로 ‘7’일 남았습니다.]
금방 깨어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니르로르는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사이, 유리한은 성장의 문을 혼자 열어젖혀, 여섯 번째 문과 일곱 번째 문의 보스 몬스터를 처치했다.
‘힘들었었지.’
어둠의 힘을 제대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곱 번째 문의 보스 몬스터에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이제 남은 건, 세 가지의 문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니르로르, 네가 없어도 나는 잘만 네 힘을 다루고 있어!’라고 말했겠지만, 상황이 영 그렇지 못했다.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레어 한쪽에 깔린 이부자리에 곤히 잠들어 있는 니르로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잠만보.’
니르로르가 저렇게 잠이 많은 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자면서 에덴이라 불렸던 그 아이의 격(格)을 흡수하고 있는 걸 수도.’
그랬다면 저렇게 잠만 계속 자는 것이 이해가 됐다.
“걱정되느냐?”
“네?”
“니르로르가 이대로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되느냐고 물었다, 유리한.”
유리한은 아리아텐의 말에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되네요. 아리아텐 님은 어떠신가요?”
“글쎄.”
아리아텐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단잠에 빠져 있는 제 아들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이 아이는 깨어나는 순간, 너와 함께 떠나게 되겠지. 밖에서 리아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두 인간 녀석과 함께 말이다.”
리아그는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마법보다는 검술에 재능이 있었다. 물론, 마법이 그에 못 미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검술에 한해서는 디에스 라고를 손쉽게 제압할 정도로 꽤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디에스 라고는 자존심을 굽히며 리아그에게 청했다.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기를 말이다.
‘디에스는 검보다는 창을 다루는 걸 선호했으니까 말이지.’
물론, 그 역시 검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러일으키는 뛰어난 실력자였다.
하지만 리아그에 못 미친다는 게 문제였다.
‘뭐, 디에스는 멀린한테도 검술로는 안 됐었지?’
위대한 마법사, 멀린 아서.
그는 마법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마검사였다. 마법과, 검술. 그 어느 것 하나 뒤처지지 않는 위대한 플레이어.
그런 그를 죽인 것이 바로 니르로르였지만.
‘어째서인지 화가 안 나네.’
분노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려고 들었던 것이 몇 번이던가? 그 다짐이 종속 계약에 가로막혀 무너졌던 것이 또한 몇 번이던가?
‘어쨌든 간에.’
유리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니르로르가 분명 깨어날 거라고 믿어요. 안 되면, 억지로라도 깨우죠.”
“어떻게?”
“당연히 때려야죠.”
유리한이 활짝 웃으며 한 손을 펼쳐 보였다. 그에 아리아텐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유리한은 괜히 머쓱해져 말했다.
“장난이었어요.”
“장난삼아 한 말이 아닌 것 같았는데?”
“크흠, 흠! 아이고, 안에서 니르로르가 자는 것만 보니까 좀이 쑤시네요! 잠시 바깥 좀 살펴보고 올게요!”
유리한이 괜히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텐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유리한, 장로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거다.”
“물론, 제가 있는 한은 그러겠죠.”
“네가 이 아이와 떠난 후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리아텐이 미소를 그렸다.
“화이트 드래곤의 장로께서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셨지 않느냐? 더욱이 너희가 이곳을 떠나면…….”
아리아텐, 그녀 역시 리아그와 함께 이곳을 떠날 것임을 유리한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했다.
“탑에 살고 있는 드래곤들은 모두 오만하다고 하더니 역시 틀린 정보였나 봐요.”
“그렇게 틀린 정보도 아니다. 블루 드래곤 장로와 레드 드래곤 장로가 하는 짓을 봤을 텐데?”
“네, 그리고 두 분 다 저한테 크게 얻어맞았죠.”
유리한이 짓궂게 웃었다. 아리아텐 역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저는 바깥을 좀 돌아다니고 올게요.”
“너무 오랫동안 밖을 돌아다니는 말거라. 블루와 레드의 장로들이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
“소문일 뿐이잖아요? 그리고 설사 그 소문이 사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한번, 덤비러 오라고 하세요. 떼로 몰려와도 기꺼이 상대해 주겠다고요.”
그런 유리한의 말에 아리아텐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유리한은 배시시 웃고는 아리아텐의 레어를 박차고 나갔다.
* * *
아리아텐의 레어를 나선 그녀는 곧장 ‘어둠을 지배하는 자(S)’를 사용해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아리아텐의 레어 앞에서 검술 훈련 중인 드래곤과 두 인간 역시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유리한은 웃는 낯으로 그들의 훈련을 구경하며 걸음을 옮겼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한 번 더 대련을 부탁하지.”
“리아그 씨, 봐주지 마세요. 디에스 씨의 몸은 튼튼해서 그렇게 봐주지 않아도 되거든요.”
“저 봐준 거 아닌데…….”
리아그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모습에서 유리한은 니르로르가 엿보여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망할 드래곤.’
에덴이 받았어야 할 격을 흡수하느라 그렇게 오랫동안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부디 좋은 꿈을 꾸고 있기를 유리한은 진심으로 바랐다.
“고요한, 너도 함께 대련할 것이 아니면 그 입을 좀 다물어줬으면 하는군.”
“네, 다물게요.”
“다문다면서 말하는군.”
“말하고 나면 조용히 있으려고 했어요.”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티격태격 여느 날과 똑같이 다투는 것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숲 안쪽으로 향했다.
아리아텐에게 바깥 좀 살펴보고 오겠다고 한 건 변명이었다. 유리한이 이렇게 바깥으로 나온 이유는.
[여덟 번째 성장의 문을 여시겠습니까?]
성장의 문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유리한은 니르로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오판이었다.
결국, 유리한은 니르로르가 깨어날 때까지 그동안 미뤄뒀던 성장의 문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기르기로 했다.
그렇게 차례대로 성장의 문을 격파한 끝에 여덟 번째 문에 도달하게 됐다.
“사실, 여덟 번째 문에 도달한 건 처음이 아니지만…….”
도중에 포기하기를 수차례였다.
여덟 번째 성장의 문, 그 안쪽의 환경 때문이기도 했고 보스 몬스터와의 상성도 최악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어쨌든 해보자.”
유리한이 여덟 번째 성장의 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혔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이었다.
거울은 온갖 것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나도 눈부셔 유리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되는 환경이란 말이야?’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어둠을 지배하는 자(S)’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피어오르는 어둠을 온몸에 둘러싸도 몬스터들이 금방 알아차렸다. 겨우겨우 그것들을 처치했다 싶으면.
- 우우……!
온몸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는 보스 몬스터가 등장해 유리한을 괴롭혔다.
“아휴, 이번에도 똑같이 등장하셨네, 등장하셨어.”
유리한이, 온몸이 백색으로 칠해진 몬스터의 목에서 창을 빼낸 후 구시렁거렸다.
‘저 망할 자식을 어떻게 공략해야 한담?’
줄곧 ‘어둠을 지배하는 자(S)’가 지닌 칭호의 효과를 이용해 성장의 문을 격파했던 유리한이었다.
그런데 그 칭호가 가진 힘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아주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칭호의 효과가 없어도 유리한은 보스 몬스터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문제는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80Lv)’이란 이름을 지닌 몬스터가 지닌 힘이었다.
유리한의 모든 것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물론, 겨우 잡았다 싶으면 빛을 뿜어내며 모든 상처를 말끔하게 치유했다.
그래도 이전, 똑같은 힘을 지니고 있던 보스 몬스터가 있었기에 유리한은 단번에 숨을 끊고자 눈앞의 몬스터에게 달려들었었다.
그런데, 웬걸?
“아오, 진짜!”
그러려고 할 때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빛을 뿜어내는 보스 몬스터였다.
그것은 마치 유리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짜증 나게 구는 녀석이네!”
유리한이 촤아악, 바닥에 겨우 착지하고는 으르렁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의 모든 거울을 깨버렸을 거다. 눈앞의 보스 몬스터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거울을 암만 깨부숴도 저 몬스터가 빛을 뿜어내면 그것들도 회복됐다.
‘잠깐만.’
유리한이 여덟 번째 문을 격파하기 위해 애썼던 과거를 떠올리며 두 눈을 번뜩였다.
‘거울은 왜 회복을 시킨 거지?’
그냥 자신의 몸만 회복시키면 될 텐데 말이다.
‘혹시…….’
유리한이 가까이 있는 거울 중 하나를 깨부쉈다.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80Lv)’은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볼 뿐이었다.
유리한은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다른 거울을 깨뜨렸다.
이번에도 여덟 번째 문의 보스 몬스터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에 들어섰을 때.
- 우우……! 우아……!
보스 몬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쩍, 몸을 빛내면서 말이다.
유리한은 두 눈을 감는 순간 알아차렸다.
그녀가 세 번째로 거울을 부쉈을 때,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80Lv)’에 새겨진 금을 말이다.
빛이 수그러든 후, 유리한은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내며 활짝 웃었다.
“하하! 이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나도 참, 한물갔어.”
지나가던 플레이어가 들었다면 경악했을 말이었다.
유리한은 날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착실하게 곳곳에 세워진 거울을 깨부쉈다.
그럴 때마다 여덟 번째 문의 보스 몬스터가 몸을 빛내며 그것들을 회복시켰지만.
“야, 그거 알아?”
유리한은 땅을 박차고 오르며 보스 몬스터와 눈을 마주했다.
“네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만 말할게.”
유리한이 씨익 웃고는 창을 고쳐 잡았다.
“너라면 몰라도, 이곳의 모든 거울은 아주 가볍게 깨뜨려 버릴 수 있어.”
모두.
자신만만하게 뒷말을 덧붙이며, 유리한은 있는 힘껏 창을 휘둘렀다.
광풍이 불며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80Lv)’의 몸이 휘청거리며 넘어갔다.
안 그래도 와창창, 깨져가던 거울이 그로 인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박살 나고 말았다.
그에 따라, 보스 몬스터의 몸도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빛을 번쩍일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인지라,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80Lv)’는 처절하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유리한은 가볍게 땅에 착지한 후 작게 숨을 내쉬었다.
[성장의 문을 여는 여덟 번째 문의 주인,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80Lv)이 처치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여덟 번째 성장을 축하드립니다!]
눈앞에 나타난 푸른 시스템 창을 보며 유리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고생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리한은 곧, 성장의 문을 벗어난 후 숲으로 돌아왔다.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이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마치, 좋은 소식이라도 들려올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