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 *
유리한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좋은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아니, 아예 그녀를 맞이했다.
“유리한아!”
“니르로르?”
유리한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황급히 어린아이에게 달려가 물었다.
“너 정말 니르로르야? 니르로르 맞아?”
“그럼, 짐이 아닌 다른 ‘니르로르’가 있느냐?”
“아니, 그건 아닌데…….”
얼떨떨했다.
매일 아침, 아니, 하루가 멀다 하고 깨어나기를 바랐던 니르로르이지 않나?
더욱이 바랐었다.
그가 좋은 꿈을 꾸기를.
“니르로르.”
“그래, 유리한아.”
유리한이 파르르 입술을 떨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은 꿈… 꿨어……?”
니르로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말했다.
“모르겠지만, 굉장히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곳에서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곳?”
“그래, 솜사탕같이 말이다! 그러니까 유리한아, 솜사탕을 사다오. 배가 고프다.”
“그래, 배가 많이 고프겠지.”
무려 한 달 가까이 잠들어 있었던 니르로르였다.
“하지만 솜사탕은 안 돼.”
“그럼?”
“사슴을 사냥해 와 수프를 끓여주도록 하마.”
그렇게 말한 사람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던 아리아텐이었다.
“어머니, 저도 같이 나가요.”
리아그가 아리아텐과 함께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들을 향해 니르로르가 두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묻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유리한아, 저 녀석들은 누구냐? 네가 이번에 부하로 삼은 녀석들이냐?”
유리한이 픽 웃고는 니르로르의 입을 찰싹 때렸다.
“부하는 무슨 부하야?”
“하지만 유리한아, 너는 고요한도 그리고 그 음흉한 자식도 부하로 부리고 있지 않느냐?”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걔들은 부하가 아니라 동료야, 동료! 그리고 저분들은…….”
유리한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아리아텐이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유리한아?”
“저분들은 우리를 도와주고 계신 분들이야.”
이렇게 저들을 니르로르에게 소개해 줘도 되는 걸까?
유리한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아리아텐은 니르로르의 어머니였다. 리아그는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그러나 어쩌랴?
아리아텐도, 그리고 리아그도 자신들의 정체를 니르로르에게 밝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유리한아?”
자신의 옷깃을 끌어당기는 작은 손에 유리한이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어쨌든, 저분들이 네가 깨어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셨으니까 부하니 뭐니 그런 소리 하지 마. 알겠지?”
니르로르가 뚱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유리한이 그 뺨을 콕콕 누르며 말했다.
“니르로르, 대답.”
“알았느니라,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한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뭐야? 안아달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에 유리한이 질색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싫어.”
“하지만 유리한아, 꿈에서는 누군가 계속 안아줬단 말이다!”
“무슨 꿈을 꿨는지 잘 모르겠다며?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곳이었던 것만 기억한다던 드래곤이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유리한아…….”
니르로르의 붉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리한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디에스 라고가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암만 어린아이의 모습을 취했어도 지성은 그대로일 텐데, 왜 진짜 애라도 된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군.”
“네가 알 바 아니다, 음흉한 인간 녀석아.”
불퉁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니르로르는 그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어 주었다.
명백하게 자신을 놀리는 행위.
디에스 라고의 이마에 선명하게 핏줄이 섰다.
‘저 빌어먹을 드래곤 새끼를 아주 그냥!’
처리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더는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분하지만 그랬다.
디에스 라고는 작게 숨을 내쉬며 분노를 다스렸다.
유리한이 그런 그가 대견하다는 듯 눈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요한, 니르로르의 상태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요한이 어련히 봐줬겠지만.”
“네, 그래도 눈앞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마음 편할 테니까요.”
고요한이 선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보이고는 유리한한테서 니르로르를 받아 안았다.
곧, 은은하게 빛나는 빛이 니르로르를 감쌌다.
그의 상태를 살핀 후, 고요한이 걱정 말라는 듯 유리한에게 말했다.
“니르로르 씨는 멀쩡해요.”
“아니다, 고요한아.”
그 말에 고요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안 보이는데…….”
“그렇지만 짐은 멀쩡하지 않도다. 짐이 부리는 힘이 없어졌다.”
“아.”
얼빠진 소리를 낸 건 유리한이었다.
니르로르가 부리던 힘.
그건 바로 어둠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이트 일족의 에덴을 대신해서 새로운 격(格)을 받게 되었다.
“니르로르.”
유리한이 고요한한테서 다시 니르로르를 받아 안고는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힘을 사용해 볼 수 있어?”
“짐의 힘을 말이냐?”
“그래.”
“하지만 유리한아. 아까 네가 없는 걸 확인하고 바로 힘을 부리려 했지만.”
“안 될 거야.”
“안 될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유리한아?”
“그야, 너는 이제 어둠의 드래곤이 아니니까.”
니르로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유리한아? 짐이 어둠의 드래곤이 아니라니? 물론, 짐은 어둠의 드래곤이 아니긴 했다만!”
니르로르, 그는 원래 죽음의 드래곤이었다. 유리한에 의해 처치되면서 어둠의 드래곤으로 격이 떨어졌을 뿐.
“니르로르.”
유리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는 이제 어둠의 드래곤이 아니라, 광명의 드래곤이야.”
“…무슨 명?”
“광명(光明).”
확인 사살하듯, 내뱉은 목소리에 니르로르가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짐은 어둠의 드래곤이다! 그런데 빛이라니! 왜 그렇게 된 것이냐! 짐은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러니까!”
유리한이 씩씩거리며 니르로르를 향해 화를 쏟아냈다.
“왜 그렇게 무리를 했던 거야! 그냥 빌어먹을 그레이시 아서의 마법진을 흉내 낸 것뿐이라면서! 사실 아니었지?!”
니르로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유리한이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그 마법진을 그대로 구현한 거였지, 너!”
니르로르가 입을 다물었다. 유리한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도대체 왜 그랬어? 네가 죽으면 나는…….”
험악하게 구겨졌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나는 어쩌라고 그런 거야? 너를 잃고 폐인이 되라고?”
“유리한아.”
유리한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폐인이 되길 바라서 그런 거였어?”
“아니다.”
“그럼 왜 그런 건데! 네가 그딴 짓 벌이지 않았어도 내가 처리했을 거야!”
“그게 싫어서 그런 거다!”
니르로르가 빼액 소리 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소리인 듯, 그가 당황한 얼굴을 보이더니 곧 말했다.
“유리한아, 너는 언제나 모든 짐을 떠안으려고 하지 않느냐?”
니르로르의 말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도 맞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유리한이 외쳤다.
“디에스, 요한! 얘 말에 동의해 주지 마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마음에 손을 얹고 그런 적 없다고 할 수 있느냐?”
“당연히……!”
그랬다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한은 남에게 자신의 뒤를 맡길지언정, 앞은 맡기지 않았다.
앞에서 밀려 닥쳐오는 적은 모두 자신이 처리해야 할 것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무한의 마력 덕분에 끝없이 플레이어로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유리한은 그랬다.
“나는 그게 싫었다.”
니르로르가 말했다.
“그래서 그런 거다.”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걸었다고?”
“네 녀석도 별 같잖은 이유로 목숨을 거는 순간이 많지 않느냐?”
“아니야, 나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려고 했을 뿐, 너처럼 죽으려고 한 적은 없었어.”
“그래? 저 음흉한 인간과 고요한도 너와 똑같이 생각할까?”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니르로르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유리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둘을 쳐다봤다.
“유리한아.”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니르로르를 보았다. 그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목숨을 걸지 않겠다. 너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겠으니 너 역시 약속해 다오.”
“무슨 약속?”
그러자 니르로르가 유리한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함부로 목숨을 걸지 말아다오. 이 약속을 어기면 나 역시 목숨을 걸 것이다. 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 한 명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을 살게 될 것이니.
덧붙인 말에 유리한이 울컥, 감정을 쏟아내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해.”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약속한 김에 너도 받아들여.”
“무엇을 말이냐?”
“네가 더는 어둠의 드래곤이 아니란 것.”
그 말에 니르로르가 벼락같이 놀라며 소리 질렀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 짐은 태어날 때부터 항상 어둠과 함께해 왔단 말이다!”
“아닐걸?”
유리한이 픽 웃었다.
니르로르는 블랙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 사이에서 태어난 변종.
그러니 분명 니르로르는 ‘광명의 드래곤’이란 격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광명이라고 해서 빛을 말하는 건 아니니까.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앙증맞은 두 손을 모으고선 말했다.
“두 손 중심에 힘을 집중해 봐.”
“힘을?”
“그래, 너는 태어날 때부터 어둠과 함께해 왔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게 아닐 테니까.”
어둠과 함께, 밝은 빛과도 같은 불꽃이 활활 타올랐을 것이다.
니르로르는 유리한의 말을 미심쩍어하면서도 두 눈을 감고선 그녀가 끌어 쥔 자신의 손 가운데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 우와아……!”
니르로르가 정말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유리한아, 보거라! 짐의 손에서 빛이 나고 있도다!”
“빛이 아니라 불꽃이지.”
“시끄럽도다, 음흉한 인간아. 짐이 빛이라면 빛인 거다.”
어련하시겠냐며 디에스 라고가 픽 비웃음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르로르는 정말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유리한에게 재잘거렸다.
“빛이다, 빛!”
“그래, 잘 다루네.”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두 손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밝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니르로르한테서 어둠의 힘을 다루는 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겠지.’
그래도 좋았다.
니르로르가 깨어났으니까, 그가 죽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니르로르, 같이 올라가자. 그래 줄 거지?”
“물론이다,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당탕,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동굴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리아텐 님?”
아리아텐이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니르로르를, 아니, 그의 두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