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아리아텐은 물끄러미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은 감정이란 게 존재할까 싶은 무표정한 그녀의 눈에 괜히 꿀꺽 침을 삼켰다.
“유리한.”
“네, 아리아텐 님.”
그럼에도 유리한은 자신을 왜 불렀는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리아텐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니르로르는 어떤 아이였느냐?”
“으음, 탑 바깥에서요? 아님, 탑 안에서요?”
“두 곳, 모두 다.”
그 말에 유리한은 고민했다. 탑 안에서의 그라면 몰라도, 탑 밖에서의 그는…….
‘재앙이었으니까.’
그걸 눈앞의 여자에게 알려줘도 되는 걸까?
하지만 아리아텐은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이겠다는 듯 결연한 얼굴이었다.
결국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먼저, 탑 바깥에서 니르로르는 재앙이었어요. 당신들이 이곳에서 그를 재앙으로 몬 것처럼요.”
아리아텐이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보였다. 죄책감이 서린 얼굴. 하지만 유리한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니르로르에게 빛 속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힘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세상에는 어둠만이 찾아왔죠.”
유리한이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를 그렸다.
“니르로르를 죽이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할 판이었어요.”
“그래서 죽였느냐?”
“네, 죽였죠. 세상을 위해서요.”
“어떻게?”
아리아텐이 두 눈을 빛내며 유리한에게 물었다.
“니르로르는 세상에 어둠이 있는 한 죽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탑의 주인과 거래를 한 것이거늘.”
“그게 말이죠.”
유리한이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어둠 따위 존재하지 못하도록 가장 밝은 빛으로 죽였어요.”
“뭐?”
“그러니까 자폭했다고요. 제가 가지고 있던 마력을 터트려서요.”
다른 말로는 동반 자살.
니르로르와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아리아텐이 미간을 좁혔다.
“고요한, 그 인간이라면 몰라도 네가 그랬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아리아텐은 고요한이 드래곤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말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지금의 저는 지극히 평범한 플레이어니까요.”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극히 평범한 플레이어.
무한의 마력이 사라진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칭했지만, 다른 플레이어에게는 아니었다. 유리한은 여전히 경외의 대상이었다.
어쨌거나 아리아텐은 유리한과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니르로르와 함께 죽었던 너인데, 내 눈앞에 멀쩡히 살아 있구나?”
“아아, 그게 말이죠.”
유리한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곧,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물었다.
“아리아텐 님, 혹시 자신의 영혼을 바쳐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마법을 들어보셨어요?”
“들어봤다. 하지만 그건 사멸된 마법이다.”
사멸된 마법.
즉,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뭐?”
놀라 묻는 말에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 조카가 있어요. 유시우랑 유서아라고, 하나뿐인 동생이 남긴 아이들인데…….”
유리한이 목소리의 끝이 흐려졌다가 이내 선명해졌다.
“그 아이들 중, 서아가. 우리 서아가 저를 살리겠답시고 자신을 제물로 바쳤지 뭐예요?”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띠며 유리한이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 있어요. 니르로르는 탑을 오르는 과정에서 만났고요. 엘프와 드워프가 사는 곳에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곳에서 정령석을 섭취한 모양이군.”
유리한이 뜨끔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느껴지니까.”
아리아텐이 유리한을 고요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정령은 우리에게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요? 하지만…….”
“멍청한 블루 일족의 장로와 레드 일족의 장르는 분노에 눈이 멀어 그것을 느끼지 못했겠지.”
“아하.”
유리한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드 일족의 장로는 아리아텐 님의 장로이기도 한데 멍청하다고 하다니.’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님.
‘닮았어.’
오만하기 그지없는 니르로르와 닮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유리한, 갑자기 즐거워 보이는구나.”
“네? 제가요?”
“그래. 얼굴에 웃음기가 실렸어. 리아그가 기분이 좋을 때 간혹 너처럼 굴어서 말이다.”
“그렇구나.”
유리한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그냥, 아리아텐 님과 니르로르의 닮은 구석을 봐서요. 붉은 눈 말고요.”
“그럼 뭐지?”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싸가지 없는 점이요?”
“뭐……?”
아리아텐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가 곧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아하하!”
한참을 웃던 그녀가 웃음을 멈추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유리한, 너는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다. 감히 드래곤에게 싸가지가 없다느니 그런 말을 내뱉다니.”
“불쾌했다면 죄송해요.”
유리한이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얼굴로 사과했다. 아리아텐은 그 모습에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네가 니르로르와 함께라서 다행이다.”
“저는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지금에야 동료로 받아들였지만, 종속 계약만 아니었다면 진작 죽였을 그였다.
유리한이 뚱하게 말하자 아리아텐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하마.”
“저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데요, 아리아텐 님?”
“그렇다고 해도 너는 진심으로 니르로르, 그 아이를 걱정했지.”
유리한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인지라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리아텐이 그녀를 보며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탑 안에서 만난 그 아이는 어땠느냐? 여전히 재앙이었느냐?”
“아니요.”
유리한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하찮고 같잖은 새끼 드래곤이었어요. 그러면서 쫑알쫑알 말은 얼마나 많던지.”
그러고는 아리아텐에게 물었다.
“솜사탕이라고 아세요?”
“안단다, 인간들이 축제마다 먹는 간식거리이지 않니?”
“그걸 엄청 좋아해요.”
“니르로르가?”
“네.”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달고나’라고, 솜사탕처럼 단맛의 간식거리가 있는데 그것도 엄청 좋아해요.”
좋아하기만 할까? 아주 환장을 한다면서 유리한이 혀를 찼다.
“이가 썩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요?”
“니르로르가 그렇게 단 음식을 좋아한단 말이니?”
“네.”
“그렇군…….”
아리아텐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자.”
“이, 이건.”
귀걸이였다.
“아리아텐 님, 이걸 왜…….”
제게 주느냐고, 유리한이 묻기도 전에 아리아텐이 말했다.
“너는 곧 동료들과 떠나겠지, 그리고 그 동료엔 니르로르도 포함이 될 것이고.”
“네, 그렇기는 한데.”
“그 귀걸이를 돈으로 바꿔 니르로르에게 간식거리를 사주렴.”
그 말에 유리한이 입을 벌렸다.
“경매에 부치면 돈을 엄청나게 받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되나요?”
“그래도 되니까 너한테 줬겠지.”
아리아텐이 그렇게 말하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부담 갖지 말고 니르로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사줬으면 하는구나.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유리한은 아리아텐이 삼킨 뒷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아리아텐이 건넨 귀걸이를 두 손에 꼭 끌어 쥐며 말했다.
“네, 알겠어요. 니르로르한테 맛있는 음식 많이 사줄게요.”
그 말에 아리아텐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고맙구나. 참 고마워.”
유리한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때였다.
“유리한아, 여기 있느냐?”
“니르로르? 밥은 어쩌고 왜 나온 거야?”
“네가 하도 돌아오지 않아서 나왔느니라. 음흉한 인간이 나오려고 한 것을 내가 대신 왔으니 고마워하거라.”
“얼씨구.”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말려도 듣지를 않아서요.”
니르로르와 함께 온 리아그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순간, 유리한은 보고 말았다.
리아그의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아리아텐이 자신의 손에 쥐여준 것과 똑같은 것을 말이다.
유리한이 입술을 살짝 벌리고는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리아텐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 귀걸이를 선물할 생각이었을 거다.
태어날 아이가 블랙 드래곤이든, 레드 드래곤이든 아무런 상관도 않고.
자신의 아이란 증거로 이 귀걸이를 선물할 생각이었을 테지.
하지만 니르로르에게는 선물해 주지 못했다. 그는 재앙이라면서 태어나자마자 모든 드래곤에게 쫓기게 되었으니.
“유리한아? 왜 그러느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들어가자. 아리아텐 님, 리아그 님, 저희 먼저 들어갈게요.”
아리아텐이 리아그와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그들과 멀어지자 유리한이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를 니르로르에게 내밀었다.
“자.”
“이게 무엇이냐?”
“보면 몰라? 귀걸이잖아.”
“짐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 따위 하지 않는다.”
아리아텐의 귀걸이는 거추장스러운 장신구 따위가 아니었다. 붉은 마력을 진주처럼 둥글게 응축시킨 단조로운 디자인.
그게 바로 아리아텐이 유리한에게 건네준 귀걸이였다.
니르로르의 말에 유리한은 상처받았다는 듯 음울하게 말했다.
“그래? 나는 너한테 무척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건데…….”
유리한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데 네가 필요 없다니, 이건 그냥 버려야겠다.”
“잠깐만,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다급히 유리한을 붙잡았다.
“누가 필요 없다고 했느냐! 다시 보니 거추장스럽거나 그런 장신구가 아니구나!”
그러고는 유리한의 손에서 귀걸이를 빼앗고는 귀를 그대로 뚫어버렸다.
유리한이 놀라 외쳤다.
“야! 그렇다고 귀를 그렇게 뚫어버리면 어떻게 해!”
“괜찮으니라. 상처 따위 바로 낫는 것이 바로 짐이니까.”
“웃기시네!”
그렇다면 그렇게 길게 잠을 잘 필요가 있었겠냐면서 니르로르를 닦달했다.
그런 소동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아리아텐의 레어로 무사히 돌아왔다.
“유리한 씨, 오셨어요? 니르로르 씨랑 무사히 만났네요.”
“리아그 님 덕분이죠. 디에스는 어디 갔어요?”
“유리한 씨를 찾으러 나갔어요. 오는 길에 서로 엇갈렸나 보네요.”
고요한이 쌤통이라는 듯 웃는 낯으로 말했다. 유리한은 픽 웃었다.
“나 참, 내가 니르로르처럼 어린아이도 아니고. 뭘 그렇게 걱정해서 찾으러 갔나 몰라?”
“그거야, 너를 걱정했으니까 그러지.”
“으악! 깜짝이야!”
유리한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외쳤다.
“저 빌어먹을 드래곤이 새로 얻은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지금 말 다 했느냐, 음흉하기 짝이 없는 인간아?”
“아직 덜 했다만. 내가 분명 같이 나가자고 했을 텐데? 그런데 감히 나를 버리고 갔겠다?”
“혼자서 간 거 아니다. 너도 봤지 않느냐? 리아그란 녀석과 함께 나가는 것을.”
“그렇다고 해도!”
디에스 라고가 빼액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
“자자, 둘 다 그만.”
유리한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니르로르도 이제 깨어났겠다. 슬슬 올라갈 준비를 해보자고.”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맹세가 종료되기까지 앞으로 ‘7’일 남았습니다.]
맹세가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일주일.
니르로르도 이제 깨어났으니, 일주일이 되기 전에 빌어먹을 뮤즈의 백작을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