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 *
‘우와, 끝났다.’
50층에 도달하자마자 유리한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리한아?”
“유리?”
“유리한 씨?”
드래곤 한 마리와 두 명의 인간이 동시에 그녀를 걱정했다.
유리한은 세 남자의 놀란 얼굴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게 말이지. 긴장이 조금 풀렸다고 해야 하나?”
그 말에 아이의 모습인 니르로르가 쯧쯧 혀를 찼다.
“긴장할 것이 뭐 있다고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
“너 때문이잖아!”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귀를 쭈욱 잡아당겼다.
“아프도다!”
“아프라고 이렇게 하는 거잖아! 나 참,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물론, 고생한 만큼 얻은 것도 있었다.
‘아니, 잠깐. 얻은 게 있었나?’
얻은 거라고는 성장의 문을 여덟 번째까지 격파한 것뿐이지만, 스탯 능력치가 크게 상승하기는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유리한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너!”
그녀는 니르로르를 향해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다시는 위험하게 나설 생각 하지 마. 알겠어?”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싫다는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으나 유리한은 단호했다.
“니르로르, 대답.”
엄한 목소리에 니르로르는 기가 죽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알겠느니라.”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는 듯, 그는 구시렁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으로 다니는 것도 되도록 그만두도록 해.”
“이유는?”
묻는 말에 유리한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고요한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 줬다.
“니르로르 씨는 아이 모습이 정말 귀여우니까요. 그 때문에 유리한 씨가 제대로 혼낼 수가 없나 봐요.”
다른 말로 하면, 니르로르의 동정심 유발 작전이 기가 막히게 잘 먹혔다는 뜻이었다.
“요한!”
유리한이 아니라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고요한의 말이 정말이냐?”
니르로르의 두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부정은 아니었다. 그에 니르로르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그럼 짐은 평생 이 모습으로 다니겠느니라!”
“다니기는 뭘 다녀!”
유리한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녀가 니르로르에게 더는 아이의 모습을 취하지 말란 또 다른 이유는 간단했다.
니르로르, 위대한 드래곤의 정신 연령이 폴리모프한 모습에 따라 어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리한이 씩씩거릴 때.
“유리.”
디에스 라고가 그녀를 불렀다.
“이곳에서 볼일을 어서 끝마치고 위로 올라가야 하지 않나?”
“아, 맞아. 그래야지.”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가 종료되기까지 앞으로 ‘7’일 남았습니다.]
제로 바니스타와 나눈 맹세가 종료되기까지 앞으로 일주일.
넉넉하다면 넉넉한 시간에 유리한이 말했다.
“그럼, 여기서 잠깐 갈라지자.”
그 말에 고요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갈라지자뇨?!”
“유리한아, 설마 우리를 버릴 생각인 것이냐!”
니르로르도 고요한과 똑같이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엉겨 붙었다.
유리한이 제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그가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버릴 생각 따위 없거든?! 그리고 요한, 뭘 그렇게 놀란 얼굴이에요? 올라가기 전에, 각자 볼일 좀 보자는 거예요.”
그리고 ‘잠깐’ 갈라지자고 하지 않았냐면서 유리한이 이어 말했다.
“저는 니르로르와 함께 갈 테니, 요한은 디에스와 함께 여기 좀 구경하고 있도록 해요.”
그 말에 니르로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쨌거나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반대로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는 죽을상이었다.
특히나 디에스 라고는 설마 유리한이 자신과 따로 움직일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디에스, 괜찮아?”
유리한이 걱정할 정도로, 그의 낯빛은 어두웠다.
유리한의 걱정에 디에스 라고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괜찮다, 유리. 안 그래도 고요한, 저 녀석에게 필요한 아이템이 있었는데 그거나 사도록 하지.”
“네? 저한테 필요한 아이템이라니요? 그게 뭔가요?”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냥 지금 가르쳐주면 안 되나요, 디에스 씨?”
“안 된다.”
안 되는 게 아니라 말해주기 싫은 거겠지.
‘아니면 귀찮거나.’
고요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두 눈은 웃지 않는 채로 말이다.
“자자, 어쨌거나 각자 볼일 본 후에 만나도록 합시다!”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안아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모습을 취하지 말라고 했지만,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는 드래곤이었다.
어쨌거나 유리한의 말에 디에스 라고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아 물었다.
“유리, 어디로 가는지만 물어도 괜찮겠나?”
“당연히 괜찮지.”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왕들 좀 만나고 오게.”
유리한이 가리킨 ‘왕들’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디에스 라고는 곧장 알아차렸다.
‘물의 정령왕과 불의 정령왕, 그리고 대지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을 말하는 거겠지.’
디에스 라고의 생각대로 유리한은 그들을 만나러 엘리아룸의 황궁으로 향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디에스 라고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니르로르는 왜 데리고 가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 디에스 라고였지만, 그는 곧 픽 웃었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저 빌어먹을 도마뱀을 데리고 정령왕들을 만나러 가는 거겠지.’
유리한은 언제나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그 목표를 입 밖으로 내뱉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허투루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디에스 라고가 곧 고요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말했다.
“자, 우리도 이만 볼일을 보러 가지.”
“네, 그러도록 하죠. 그런데 디에스 씨, 제 어깨에 걸친 팔은 좀 빼주실래요?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거든요.”
웃는 낯으로 말하는 고요한의 목소리에 디에스 라고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 자식은 꼭, 잘해주려고 해도 초를 친다면서 디에스 라고는 쯧쯧 혀를 찼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유리한은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 * *
그렇게 사라졌던 유리한과 니르로르가 나타난 곳은 황궁 문 앞이었다.
둘을 감쌌던 그림자가 사라진 직후 니르로르가 몸을 떨었다.
“으으.”
“왜 그래?”
앓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니르로르이지 않나? 더욱이, 새로운 진명을 받은 몸이었다.
‘갑자기 무슨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
그 때문에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신음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으나.
“네 힘이 불쾌하도다.”
들린 말에 기가 차 그녀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거 원래 네 힘이었거든?”
“그래도 불쾌한 건 불쾌한 거다!”
“네네, 그러시겠죠.”
아무래도 새로 받은 진명에 따른 힘이, 유리한이 가지고 있는 힘과는 반대되는 것이라 불쾌감을 느꼈나 보다.
“유난이야, 유난.”
“지금 짐을 욕하는 것이냐?”
“마음대로 생각해.”
유리한이 픽 웃으며 니르로르의 검은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갑작스럽게 나타난 유리한과 니르로르를 보고 얼이 빠져 있던 황실 근위병들이 창을 치켜들며 소리 질렀다.
유리한이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 황궁을 향해 빽빽 소리 질렀다.
“레이지 황제 폐하! 저 유리한이에요! 정령왕들께서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고 왔는데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황궁이 떠나가라 외치는 목소리에 근위병들이 희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 이런 오만방자한 녀석이! 감히 어느 분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폐하께서는 너 같은 것을……!”
만나줄 시간 따위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유리한 님!”
엘리아룸의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헐레벌떡, 격은 내다 버린 채 뛰어오는 그의 모습에 근위병들이 헛숨을 들이켜 마셨다.
“폐, 폐하!”
“뭣들 하느냐! 어서 문을 열어드리거라! 그분은 나의 귀한 손님이시다!”
그 말에 근위병들이 다시 한번 헛숨을 들이켜 마시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끼이익, 육중한 문이 활짝 열리자 니르로르가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유리한에게 소곤거렸다.
“저 인간은 언제 봐도 눈치가 좋고 빠르구나.”
“황제라면 응당 그래야지.”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그사이 그녀의 앞에 당도한 레이지 시안 디엔드 엘리아룸이 희게 질린 얼굴로 사과했다.
“유리한 님, 죄송합니다! 근위병들이 그새 유리한 님의 얼굴을 잊은 모양이군요.”
“아니에요, 폐하. 그보다 정령왕님들은 여기 계신가요?”
“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지 황제가 활짝 웃으며 앞장섰다. 유리한은 여전히 니르로르를 안아 든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달한 곳.
“오, 뭐야. 정말 드래곤들 간의 다툼을 끝내고 왔잖아?”
이그니스가 쾌활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이그니스의 목소리에 이어 아쿠아가 재잘거렸다.
“내가 유리한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이그니스 바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누구보고 바보라는 거야?!”
이그니스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릴 때, 대지의 정령왕인 테라가 쯧 혀를 찼다.
“둘 다 그만하고 정령왕의 체통 좀 지켜. 그보다, 너.”
테라의 시선이 니르로르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너는 분명, 죽음의 드래곤으로 그 힘을 부리던 녀석이었을 텐데.”
“신기하죠? 블랙 드래곤이라고 해서 재앙으로 불려야 하는 법은 없더라고요.”
묻는 말에 대답한 사람은 유리한이었다. 그 말에 테라가 눈가를 찡그렸다.
“뭐?”
“다시 말해드릴까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니르로르는 재앙이라고 불리며 이 세상에서 추방당하지 않아도 됐다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 유리한은 정령왕들을 찾아왔다. 또한, 그들에게 부탁하고자 이곳에 걸음 했다.
“물의 정령왕님, 불의 정령왕님. 그리고 대지의 정령왕님, 바람의 정령왕님.”
유리한이 정령왕들을 한 명씩 보고는 입을 열었다.
“블랙 드래곤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세요.”
“뭐라고?”
이그니스가 괴상망측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물었다. 유리한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블랙 드래곤이 태어나더라도 다른 드래곤들이 죽이려고 들지 않게, 니르로르와 같은 사례가 또 일어나지 않도록 인식을 바꿔 달라고요.”
이건 오직, 엘리아룸의 세계를 관장하는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