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 *
“지금쯤… 올라가셨겠죠……?”
고요한이 아쉽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디에스 라고에게 물었다. 디에스 라고 역시 고요한과 똑같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고는 픽 웃었다.
“뒤늦게 아쉬워졌나 보군.”
“네.”
고요한이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조금 전에 아쉽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쉬운 거랑 후회하는 거랑은 다른 뜻이에요, 디에스 씨.”
하여튼 간에 말은 잘한다고 생각하면서 디에스 라고가 픽 웃었다. 고요한 역시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아쉽지만, 유리한 씨를 돕게 돼서 기뻐요.”
고요한은 언제나 바랐다.
유리한이 자신에게 등을 맡길 날이 오기를, 그녀가 이고 있는 짐을 자신이 덜어줄 날이 오기를 말이다.
그리고 지금 고요한의 바람이 이뤄졌다.
“시우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야지.”
설사,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도 바로 처리하면 된다.
디에스 라고가 주먹을 꽉 쥐며 그렇게 생각했다.
“우선, 우리의 목표는 시우의 안전을 확보하고 그 아이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거다.”
당연히 제거 대상은 청의 기사단을 설립한 초대 단장.
“어떻게 생겼는지는 바람의 정령왕이 보여줬으니 금방 찾겠지.”
“과연 그럴까요?”
“걱정되나 보군.”
“네.”
이번에도 고요한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는 현재 청의 기사단장인 청예신 씨가 몇 번이고 그분을 찾고자 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모두 실패했다죠.”
고요한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청예신 씨는 제가 본 플레이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세요. 그런 분도 찾지 못하셨는데 저희가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 거다.”
디에스 라고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물론, 유리보다는 늦게 찾겠지. 하지만 고요한.”
디에스 라고의 금안이 고요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네가 본 플레이어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다.”
디에스 라고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유리의 신경을 건드린 그 빌어먹을 자식은 내가 기필코 찾아낼 테니.”
호언장담하는 그 모습에 고요한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부디 그래 주세요. 저는 제 실력에 자신이 없으니까요.”
“자신감을 가져라. 네 스승이 누구인데.”
“누구인지 모르겠는데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디에스 라고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고요한은 유쾌하게 웃었다.
결국, 디에스 라고 역시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이렇게 실없는 녀석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 봤다고 유리한에게 친한 척하며 들러붙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유리한은 뭐가 좋다고 제게 들러붙는 고요한을 ‘유지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엽게 여겼다.
‘이제는 유리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지만.’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을 흘긋거렸다. 보면 볼수록 유지한을 떠올리게 하는 녀석이었다.
강한 듯 보이면서도 한없이 여린 성정을 가졌던 아이.
고요한은 아이라고 하기에는 다 큰 어른이었지만, 그에게서는 분명 유지한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래서 유리가 함께 탑을 올라가고자 한 거겠지.’
자신이 버렸다가는, 유지한과 똑같이 그를 잃을까 싶어서 말이다.
“디에스 씨?”
고요한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에스 라고는 그제야 고요한한테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리를 움직였다.
“가자.”
“네.”
고요한은 그렇게 디에스 라고와 함께 탑의 바깥으로 향했다.
유리한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 * *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유리한의 동료로 익히 알려진 두 사람이 탑을 나간 그 시간.
“도착했군.”
“그래, 도착했어.”
유리한은 니르로르와 함께 60층에 도착했다.
엘리아룸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쾌적한 공기에 유리한이 미소를 그렸다.
그 순간이었다.
“윽……!”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유리한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다행히도 거센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멎어 들었다.
대신 살랑이는 산들바람이 오른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풍향에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그녀가 비딱하게 웃었다.
‘바람이 길을 알려줄 거라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제로 바니스타가 있는 곳을 알려줄 줄은 몰랐다.
“니르로르, 이제 그만 폴리모프 좀 풀어줄래?”
“싫다면?”
“맞고 풀래? 아님, 그냥 풀래?”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주먹을 쥐고는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니르로르가 두 눈을 데굴 굴리다 폴리모프를 풀었다.
- 유리한아, 네 주먹이 무서워서 폴리모프를 푼 건 아니다.
“네네, 그러시겠죠.”
- 정말이다! 믿어다오!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알겠으니까 그만 말하고 쫓아오기나 해!”
- 그게 무슨 말이냐?
“전속력으로 빌어먹을 백작님을 찾아갈 생각이니까 나 놓치지 않게 열심히 따라오라고.”
- 뭐라는 건지 모르겠도다.
니르로르가 그렇게 말했지만 유리한은 더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신 땅을 박차 바람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늦게 그녀를 쫓았다.
유리한은 뒤를 흘긋거리고는 픽 웃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누가 등을 떠밀어 주는 느낌도 들지만.’
그렇다고 불쾌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내달렸을까?
오른쪽으로 불던 바람이 멎었다. 유리한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바람이 멎은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고요함 가운데, 인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북쪽이었다.
유리한이 다시 땅을 박찼다.
그렇게 달려가던 유리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멈춰 섰다.
북쪽으로 불던 바람이 멎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주위는 고요하기만 할 뿐,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한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바람의 정령왕, 아우라는 분명 말했었다.
‘60층에서 내린 후, 바람이 안내해 주는 곳을 따라가. 그곳에 백작이 있을 테니. 그리고 조심해. 70층 이후의 세계는 내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이니.’
70층 이후의 세계가 도대체 어떻기에 아우라의 바람이 닿지 않는 것인지 뒤늦게 궁금해졌다.
‘뭐, 지금 와서 궁금해해 봤자 답을 알기는 글렀지만. 그보다.’
계속 이렇게 허탕이라니.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건강도 안 좋으신 백작님께서 몸은 꽤 날래신가 보네?”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걸까.
‘아님, 아우라 님의 힘이 무림에서 제대로 발휘되지 않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우라의 힘이 생각보다 약한 걸지도 모른다.
유리한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오우, 불경하게 무슨 생각을!’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뺨을 가볍게 때렸다. 아무래도 달이 훤한 밤에 똥개 훈련을 한 탓에 신경이 많이 예민해진 모양이다.
‘이성을 되찾자.’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할 때.
- 유리한아! 천천히 좀 가거라!
뒤처졌던 니르로르가 그녀에게로 따라붙었다. 유리한이 해츨링을 흘긋거리고는 픽 웃었다.
“천천히 가고 있어. 네가 굼떠서 그렇지.”
- 길 가는 인간 붙잡고 물어보거라! 네가 얼마나 빠른지를!
“그러고 싶은데 주변에 사람이 없네?”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그 말에 니르로르가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 도대체 누구를 찾는데 그렇게 열심인 것이냐!
“제로 바니스타.”
유리한이 차갑게 이름을 말했다.
“뮤즈의 백작, 기억하지?”
- 짐은 인간의 얼굴 따위 하나하나 기억하지 않는다.
“아이고, 그러세요? 며칠 떨어져 지내면 제 얼굴도 잊겠네요?”
- 네 얼굴은 잊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유리한이 놀란 얼굴로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붉은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유리한이 픽 웃었다.
“그것참 고맙네.”
- 짐은 진심이다!
니르로르가 빼액 소리 질렀다.
숲이 떠나가라 외치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짧게 혀를 찼다.
“네네, 알겠으니까 큰 소리 좀 내지 말지? 바람이 다시 움직이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서쪽.
아니, 서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향했다가 몇 번이고 풍향이 바뀌고 있었다.
유리한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어.’
백작을 붙잡아 자신을 똥개 훈련 시킨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 테다!
유리한이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몸을 풀었다.
“가자. 이번에는 잘 따라올 수 있지?”
-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정말로 그럴 생각인지, 니르로르가 앙증맞은 발톱을 들어 유리한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유리한의 살갗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게 용할 정도의 섬세함으로 말이다.
유리한이 자신에게 꼭 달라붙은 니르로르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그럼, 간다.”
그 말과 함께 유리한은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바람이 움직일 때마다 그보다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 덕분일까?
“제로 바니스타!”
유리한은 그토록 원하던 사람을 찾게 됐다.
화들짝 놀라 자신을 돌아보는 가면을 향해 유리한이 손을 뻗었다. 살기 어린 미소를 입가에 띠면서 말이다.
유리한은 기어코 제로 바니스타를 붙잡았다.
“드디어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자식!”
우당탕!
뒤로 넘어간 제로 바니스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저를 붙잡은 유리한의 손을 쥐었다.
“큭……! 도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너를 쫓아온 거냐고?”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의 말을 끊어 먹으며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야, 유리한. 설마 못 본 사이에 내 목소리를 잊은 건 아니겠지?”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제로 바니스타와의 맹세가 지켜졌습니다.]
[제로 바니스타와의 맹세가 해제됩니다.]
그걸 본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유리한이 그렇게 제로 바니스타를 붙잡았을 때, 탑의 바깥으로 나간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은.
“누, 누구세요?! 삼초온! 이상한 아저씨들이 찾아왔어요!!”
울지 못해 웃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