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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90)화 (190/235)

190화 

【 23. 맹세가 끝난 후에 】

유리한의 조카, 유시우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은 아이의 눈물 앞에서 절절맸다.

“시우야, 형 기억 안 나?”

“시우는 아저씨 몰라요!”

쿠궁!

고요한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아이를 쳐다봤다.

그때, 행복 머니의 도웅이 우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것 참, 죄송합니다. 그게, 시우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유시우는 엉엉 울 뿐이었다.

점점 커져 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백상철이 다그쳤다.

“시우야! 이분들은 유리한 님의 동료분들이시잖냐!”

“유리한? 고모?”

유시우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상철은 인자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가 그렇게 말했던 네 고모!”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히며 백상철에게 물었다.

“시우가 유리도 잊어버린 건가?”

“네? 네, 그렇습니다!”

백상철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유리한의 동료이기 전에 영웅이라고 불리는 플레이어, 디에스 라고였다.

백상철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유리한 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설마……!”

“우리도 잊었을 줄은 몰랐다는 거군.”

“네, 그렇습니다!”

우렁찬 대답에 디에스 라고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아이에게 다가갔다.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에 유시우가 도웅의 옷깃을 꼭 끌어 잡으며 겁에 질린 얼굴을 보였다.

디에스 라고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유시우.”

그가 다정하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물었다.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나?”

“마지막에 만난 사람……?”

유시우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끔뻑이다가 말했다.

“아저씨들인데에.”

“아니, 우리 말고.”

“삼촌들?”

“저 녀석들도 제외하고.”

유시우는 두 눈을 데굴 굴렀다.

곧, 아이한테서 디에스 라고가 원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웅.”

유시우가 고개를 끄덕인 후, 종이와 크레파스를 챙겨 열심히 누군가를 그렸다.

“이렇게 생긴 할아버지인데, 시우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줬어요! 착한 할아버지예요!”

그림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디에스 라고는 아이가 누구를 그렸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은색으로 칠해진 머리칼, 날카로운 눈매의 푸른 눈을 가진 할아버지라니.

“디에스 씨…….”

고요한 역시 유시우가 누구를 그린 건지 알아차리고는 디에스 라고를 불렀다.

“그래. 그 빌어먹을 초대 단장님께서 시우한테 무슨 수작질을 벌인 게 분명하군.”

디에스 라고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유리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유시우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을 줄이야.

“뭐, 그 빌어먹을 자식한테는 우리가 온 것도 불행이겠지만.”

까드득, 디에스 라고가 성난 얼굴로 이를 갈았다.

감히 유리한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존재의 기억을 헤집어 놓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디에스 라고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바람이 멎은 고요함을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깨부쉈다.

“유, 유리한 님?”

“그래, 나야.”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내가 쫓아오는 걸 분명 알았을 텐데 이렇게 도망치다니. 결국, 나한테 잡힐 줄 알았을 텐데 말이야? 응?”

“아, 아닙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에 유리한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감히 사람을 이렇게 똥개 훈련 시켰겠다?”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를 쫓아오는 사람이 유리한 님인 줄 알았다면 당신을 기다렸을 겁니다!”

“나인 줄 몰랐다고?”

“네! 그렇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는 가면을 벗었다.

정말 몰랐는지, 그는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은땀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 참, 유리한 님이라면 분명 탑의 바깥으로 향했겠지 싶어서 말입니다.”

“청의 초대 기사단장 때문에?”

그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놀란 눈을 보였다.

“초대 단장이 탑의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걸 아셨는데도 올라온 겁니까?”

“그래.”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백작님과 빌어먹을 맹세를 했는데,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심장이 멈춰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잠시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던 유리한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방긋 웃었다.

“청의 초대 단장은 디에스랑 요한이 처리하러 갔어요.”

부드럽게 살살 달래는 목소리에 제로 바니스타가 꿀꺽 침을 삼켰다. 분명 친절한 태도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무서웠던 탓이다.

“그, 그렇군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제로 바니스타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유리한에게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초대 단장은 현재 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청예신 단장님보다 그 실력이 뛰어난 자입니다.”

“아하.”

그래서 청예신이 초대 단장의 뒤를 쫓지 못했었나 보다.

“그래도 뭐 괜찮을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고요한만 보냈더라면 불안했을 거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디에스 라고가 있었다.

그리고 디에스 라고는 자신과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내였다.

그러니 그들은 무사히 자신에게 돌아올 거다.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과의 약속을 떠올린 후 웃는 낯으로 제로 바니스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백작님께서는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탑 바깥의 소식에도 귀가 활짝 열려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하하, T-Network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많아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T-Network에 올라오는 이야기를 탐색하다가 청의 초대 기사단장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되었단 말이었다.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청예신 씨는 알고 계신가요?”

“아니요. 모르고 있을 겁니다. 만물의 잔당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우리 백작님께서는 청예신 씨와는 다르게 꽤 여유롭게 지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자신을 쫓는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이리저리 도망치는 중이었다면서 제로 바니스타가 사람 좋게 웃었다.

당연히 그가 말하는 수상한 기척은 유리한을 가리킨 것이었다.

‘말이라도 못 하면.’

유리한이 짧게 혀를 찼다.

그때, 그녀에게 들러붙어 있던 니르로르가 입을 열었다.

- 그 우락부락한 인간은 어디로 사라졌느냐?

“맞아요. 맹주는요?”

니르로르가 말한 ‘우락부락한 인간’이 누구인가 하던 제로 바니스타가 유리한의 말에 대답했다.

“랴오륭 말입니까? 그는 지금 구천하를 쫓고 있습니다.”

“그 늙은이는 왜요?”

세상에 누가 천하태평(天下泰平)의 구천하를 ‘늙은이’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을까?

하지만 유리한이라면 그게 가능했다.

그렇기에 제로 바니스타는 유리한의 말본새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

“구천하는 현재 69층의 문지기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아하, 그래서 쫓고 있다는 거군요.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현재 69층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수(水) 속성은 전혀 통하지 않는 용암 지대라는 것뿐입니다.”

그 밖의 다른 정보는 대외적으로 풀리지 않았다.

“69층의 환경이 용암 지대라는 것도 만물의 그레이시 아서가 44층의 북해빙궁에 마법사를 풀어 만년빙정을 얻겠다고 난리를 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정보입니다.”

“그렇군요. 그 망할 새끼가 다행히도 도움 되는 일을 했네요.”

개똥도 쓸모가 있다더니, 그레이시 아서가 죽기 전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 가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백작님께서는 69층의 문지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수집했을 것 같은데요?”

애초에 그와 한 맹세가 그랬다.

유리한, 그녀는 한 달 안에 다시 무림으로 돌아오고, 제로 바니스타는 69층의 문지기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확보한다.

‘그러니까 제로 바니스타와의 맹세가 지켜지고 해제됐다는 말은.’

제로 바니스타가 69층의 문지기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확보했기 때문일 터.

그리고 유리한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조금 더 정보를 수집한 후에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그리 말한 것이다.

그에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랴오륭 씨가 늙은이를 잡아 온 후에 말이에요?”

“네. 제가 수집한 정보에 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구천하에게 이것저것 묻고 제대로 정보를 추리고자 했었다며 제로 바니스타가 설명했다.

“뮤즈의 백작님께서 그렇게 자신 없는 모습이라니. 이것 참 실망인데요?”

“하하,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말해 드려야겠지요.”

제로 바니스타가 너털웃음을 터트린 후 입을 열었다.

“먼저, 69층의 문지기는 마교의 수장이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마교의 수장?”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건 구천하가 아니었나요?”

분명 종남에서 천하태평을 ‘마교’라고 칭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유리한의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저었다.

“구천하 이전에 원래 무림을 위협하던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 존재가 바로 마교의 수장이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 종적을 감췄고 마교는 그대로 무너지게 됐다고 제로 바니스타가 설명했다.

“구천하는 그 빈자리를 꿰찬 것뿐이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유리한이 고개를 주억거린 후 제로 바니스타에게 물었다.

“마교의 수장은 많이 강했다고 하던가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을 악인이라면서 모두가 혀를 찼습니다.”

“흐음.”

유리한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며 미소를 그렸다.

“좋네요.”

“네?”

“좋다고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악인은 자고로 두드려 패야 제맛이거든요.”

그만큼 손맛도 짜릿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백작님의 걱정을 덜어줘야겠죠?”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제 옷에 달라붙어 있는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 왜 그렇게 보느냐?

“네가 활약할 때라서.”

- 짐이 활약할 때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기는.”

유리한이 미소를 그리며 해츨링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새롭게 얻은 힘을 어디 한번 마음껏 펼쳐봐, 니르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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