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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99)화 (199/235)

199화 

【 24. 다구리에 장사 없다 】

제로 바니스타는 지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어제 하루, 구천하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느라 심적으로 많이 지쳐 푹 쉬어보려고 했건만.

“이거, 참. 유리한 님은 정말 무섭다니까? 그렇지 않나, 제이?”

제로 바니스타의 질문에 제이가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힘드시면 쉬셔도 됩니다. 어떻게든 제가 변명해 보겠습니다.”

“됐어. 유리한 님께 밉보이면 안 되지, 안 돼.”

유리한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자신은 죽을 터였다.

‘그럴 수는 없지.’

트라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는 제로 바니스타였다.

그가 채비를 갖춰 방을 나섰다.

“가지.”

“네, 백작님.”

제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제이가 제로 바니스타를 데리러 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테이블을 두드리던 유리한의 손이 멈췄다. 문이 열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문객이 누구인지 그녀는 보지 않고 맞힐 수 있었다.

“늦으셨네요, 백작님?”

“하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제가 인내심 하나는 최고라서 말이에요.”

“다행이군요. 그보다 친애하는 단장님께서도 돌아와 계셨군요?”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던 척, 시치미 떼시기는.”

청예신의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쨌거나 69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서로 시시콜콜한 안부를 나누는 데 관심은 없을 테니까요.”

“뭐, 맞는 말이지만 안부는 백작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나눠서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어서 구천하로부터 얻은 정보를 말해주시죠.”

“알겠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곧장 이야기를 꺼냈다.

“먼저, 69층이 용암 지대라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화(火) 속성 저항 아이템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

랴오륭의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랴오륭 님의 말에 덧붙이자면 화(火) 속성의 스킬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이상하군.”

의견을 낸 사람은 청의 부기사단장인 라이 에스페란도였다.

“화염 속성 저항 아이템의 효과가 없다는 건 이해가 간다만, 관련 스킬도 효과가 없다니?”

“아아, 그게 말이지요.”

제로 바니스타가 미소를 그렸다.

“큰 불꽃은 필연적으로 작은 불꽃을 집어삼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불꽃이 바로 69층의 환경이라며 제로 바니스타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구천하와 그레이시 아서는 북해빙궁의 만년빙정을 노렸습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죠.”

북해빙궁.

딸아이가 머물렀던 곳의 이름이 나오자 청예신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유리한이 그녀를 흘긋거렸다.

‘쳥예신 씨.’

사실, 유리한은 청예신과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야, 유리한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딸아이를 지켜달라는 말에 자신만 믿어달라는 식으로 호언장담했으면서, 결국 청예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도 청예신은 유리한을 이유 없이 도와줬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겠지.’

청의 전 기사단장이 저지른 일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자신을 도와준 것이리라.

하지만 그 도움은 이곳, 무림에서 만물과 천하태평의 잔당을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함께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하고자 기꺼이 나서고 있었다.

‘언제 한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제대로 드려야겠어. 그리고 북해빙궁에서 있었던 일도 사실대로 알려줘야지.’

청예신이 북해빙궁에서의 일을 모두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하지만 지금은 대화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구천하와 그레이시 아서가 만년빙정을 얻는 데 실패한 후, 두 사람이 노린 것은 물의 정령왕이 지니고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오, 그건 처음 듣는데? 우리 단장님께서는 알고 계셨나?”

“알고 있었어.”

랴오륭의 질문에 청예신이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들의 말에 뒤이어 제로 바니스타가 입을 열었다.

“참고로 구천하와 그레이시 아서는 그 보물 또한 얻지 못했습니다. 여기 계시는 영웅님의 활약 덕분이었죠.”

‘영웅’이란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유리한에게로 향했다.

“저기, 다들 잊고 있는 모양인데 저만 ‘영웅’이라고 불렸던 건 아닌데요?”

디에스 라고 역시 유리한과 마찬가지로 영웅이라고 불렸지만 그는 말했다.

“하지만, 유리. 모두가 기억하는 영웅은 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리한이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휴,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 말에 서문기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물의 정령왕님의 보물은 어떻게 되었나요? 유리한 님이 맡게 되셨습니까?”

“그게 정말이야?”

랴오륭의 놀란 목소리에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유리한이 인벤토리 안에서 아쿠아로부터 받은 보물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줬다.

“이게 바로 물의 정령왕님께서 빌려주신 보물이에요. 보물이 지닌 정확한 효과는 모르지만, 그분의 말로는 어떤 불꽃에도 끄떡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유리한이 아쿠아의 보물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69층의 위협적인 환경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정 걱정된다면 제가 물의 정령왕님의 보물을 지니고 앞장설 테니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설마, 우리 영웅님께서는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이었나?”

랴오륭의 비아냥거림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요.”

유리한이 랴오륭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는 말했다.

“물의 정령왕님한테서 보물을 얻지 못했어도 저는 가장 앞에 서서 싸웠을 거예요.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죠.”

랴오륭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유리한이 말한 ‘누구’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69층에 들어선 후 무섭다고 도망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누가 도망을 친다고!”

랴오륭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위협적인 목소리에도 유리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요. 도망친다면 온 탑을, 아니, 온 세상을 뒤집으며 찾을 생각이었거든요.”

“유리는 적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녀석을 제일 싫어하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누가 도망을 친다는 거야?!”

“랴오륭 씨, 진정하십시오.”

서문기율이 스승이나 다름없는 랴오륭을 달랬다.

“맞아, 랴오륭.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래?”

청예신도 거들자 랴오륭이 씩씩거리며 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리한이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고는 말했다.

“어쨌든, 백작님. 구천하한테서 얻어낸 정보가 그것뿐인 건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유리한 님.”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69층의 문지기는 마교의 옛 수장이라고 하더군요.”

“뜬구름 잡는 소문일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라이 에스페란도의 말에 웃었다.

“마교의 옛 수장은 구천하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무림의 방식대로 말하면, 무공이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하더군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청예신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유리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죠?”

“여러 문파와 협력하며 천하태평과 만물을 쫓으면서 숱하게 들었던 말입니다.”

그러면서 청예신은 이어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이곳 무림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자를 일컫는 말이죠. 여기서 무공이란 저희 플레이어의 스탯 능력치라고 생각하면 되고요.”

“흐음.”

유리한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가 물었다.

“구천하는 오광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었죠?”

오광의 우두머리들인 청예신과 제로 바니스타, 랴오륭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유리한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들에게 물었다.

“설마, 오광 중 제일이었던 건 아니죠?”

“아니야.”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랴오륭이었다.

“단순한 힘으로 따지자면 내가 제일 세지.”

“그렇지만 전투에 있어서 가장 강하신 분은 청예신 단장님이실 겁니다.”

청예신이 쑥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과대평가예요.”

유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느꼈던 청예신이었다.

‘랴오륭이나 제로 바니스타한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청예신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아마 디에스와 비슷하거나 살짝 아래인 수준일 거야.’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를 흘긋거리고는 고요한을 쳐다봤다.

‘요한이 지금보다 더욱더 성장한다면 청예신 단장님과 비슷한 힘을 가지겠지.’

고요한은 유리한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그려보았다.

유리한 역시 고요한을 쳐다보며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그럼, 어렵지 않겠네요.”

“네?”

당황한 듯 묻는 제로 바니스타의 목소리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69층의 문지기가 구천하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일 거라면서요?”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구천하보다 강하다는 것만 알 뿐이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마교의 옛 수장 말고 다른 놈들은요? 몬스터 같은 건 없대요?”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언데드 몬스터인 강시가 주변에 포진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우리가 맡지.”

랴오륭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강시는 같은 언데드 몬스터인 좀비와는 다르게 물려도 상관이 없는 것들이잖아?”

“네놈은 온몸이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몬스터가 강시든 좀비든 딱히 상관없을 것 같은데.”

“라이.”

청예신이 부기사단장의 이름을 부르며 랴오륭을 도발하려는 그를 말렸다.

랴오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라이 에스페란도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 유리한이 그에게 물었다.

“혈맹 쪽에 힐러가 있나요?”

“있기는 있어.”

랴오륭이 뚱하게 말했다.

“그쪽이 데리고 다니는 사제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힐러님께서 몇 분 계시지.”

랴오륭의 손가락이 고요한을 가리켰다.

난데없는 손가락질에 기분 나쁠 만도 하건만 고요한은 좋게 봐줘서 감사하다며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유리한은 고요한을 대신해서 랴오륭의 손가락을 꺾어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69층을 공략하려면 전력 하나하나가 아까울 테니까.’

강시 무리는 혈맹에게 맡긴다고 쳐도 나머지가 문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 문지기를 상대하고 싶지만.’

위험 부담이 큰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괜히 사람들이 나섰다가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 됐다.

유리한이 어떻게 전략을 짜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 유리한아.

가만히 있던 니르로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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