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고요한은 니르로르부터 배운 마법을 곧장 시전했다.
“…대단하군요.”
“그러게, 정말 대단해.”
청예신이 라이 에스페란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고요한에게 말했다.
“태양교의 사제로 힐(Heal)만 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청예신의 말에 고요한이 멋쩍게 웃었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더더욱 놀라운데요?”
청예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물의 마법사들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더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그녀는 감탄하고는 물었다.
“어때, 라이?”
라이 에스페란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의 말씀대로 놀랍군요. 엘레나보다 실력이 더욱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청예신이 웃는 낯으로 고요한을 향해 말했다.
“어때요, 요한 씨?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한 후 저희와 함께하는 건요.”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저는 유리한 씨와 평생 함께할 거라서 말이에요.”
“오…….”
‘평생 함께라니, 꽤 로맨틱한데?’
라고 청예신이 생각하는 순간.
“유리한 씨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동료로 말이죠!”
고요한이 다급하게 덧붙여 말했다. 청예신은 피식 웃었다.
“후후, 그렇군요. 아쉽네요. 어쨌거나 다시 전투를 이어가 보도록 할까요?”
“그 전에 잠깐만요.”
유리한이 손을 들고는 말했다.
“요한, 혹시 마법을 하나 더 시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그건 이 녀석한테 어려울 거다, 유리한아. 중첩 마법이라니, 고요한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고요한의 말에 니르로르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 고요한아, 네 주제를 알거라.
“제 주제를 잘 알아서 하는 말이에요. 저는 할 수 있어요, 니르로르 씨.”
니르로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잘못돼도 짐은 모른다.
“네, 니르로르 씨.”
대답은 잘하지.
니르로르가 불퉁한 얼굴로 유리한에게 물었다.
- 원하는 마법이 무엇이냐?
“나를 69층의 문지기로 보이게 만드는 마법. 그게 안 되면 사람들한테서 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마법.”
“그런 마법이 없더라도 우리는 너를 공격할 수 있다, 유리.”
“물론, 그렇겠지.”
유리한의 디에스 라고의 말에 픽 웃었다.
“하지만 무기 끝에 살기가 담겨 있지 않더라고.”
디에스 라고가 움찔거렸다.
살기라니!
어떻게 그런 걸 담아 유리한을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니르로르, 부탁할게. 요한도요.”
- 알겠다.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대답했고.
“네, 유리한 씨. 맡겨만 주세요.”
고요한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법이 시전됐고.
“……!”
유리한과 고요한, 니르로르를 제외한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유리한 씨.”
“네, 청예신 씨.”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창을 들었다.
“바라던 바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청예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유리한의 앞에 나타났다.
유리한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황급히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날아드는 검에 유리한이 황급히 청예신을 밀쳐내고는 몸을 숙였다.
유리한을 꿰뚫지 못한 검이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칭찬 고마워요.”
라이 에스페란도의 담담한 목소리에 유리한이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웃는 낯에 라이 에스페란도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곧 그가 검을 꽉 쥐고는 유리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세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겉보기에는 마법이 시전되기 전에 있었던 전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확연히 달라졌다.
상대를 기필코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
모두의 공격 하나하나에 그것이 담겨 있었다.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린 찰나.
콰과광―!
갑작스럽게 위에서 내리꽂히는 창에 유리한이 얼굴을 굳혔다.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라이 에스페란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디에스.”
“목소리는 유리가 맞군.”
디에스 라고가 흙바닥에 꽂혔던 창을 빼내 들고는 말했다.
“목소리마저 그 자식과 같았다면 나는 정말로 너를 죽이고 싶었을 거다.”
“그것참 다행이네.”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의 목을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네가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진심으로 덤벼봐.”
싱긋, 웃음기 담긴 목소리에 디에스 라고가 입매를 비틀었다.
* * *
쿵, 쿠궁―!
“연무장이 엉망이 되어버렸군.”
제로 바니스타는 제이와 함께 마법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그의 말에 제이가 곤란하다는 듯 난처하게 말했다.
“이것 참, 객잔의 주인께 보상해야 할 돈이 엄청나겠군요.”
“고요한 님의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려나.”
제로 바니스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을 시전 중인 고요한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곧 마력 고갈로 쓰러질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럴 리는 없어.”
제로 바니스타가 피식 웃었다.
고요한은 무한의 마력을 지닌 남자였다. 그런 그가 마력 고갈로 쓰러진다니?
“뭐,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서 쓰러질 것 같기는 하네.”
두 가지 이상의 마법을 시전하는 건 만물의 수장이었던 그레이시 아서와 같은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그런데 그걸 지금 하고 있단 말이지.’
제로 바니스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쩌면 고요한이 무한의 마력을 가지게 된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군.’
제로 바니스타는 고요한이 어쩌다 무한의 마력을 지니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그 과정을 파악했단 말이다.
‘만물의 호기심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제로 바니스타가 웃는 낯으로 고요한을 볼 때였다.
“오…….”
그가 힐까지 시전했다.
이미 펼친 마법들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데도.
* * *
“치사해!”
유리한이 우는소리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껏 모두의 체력을 고갈시켰다고 생각했더니만 힐이라니!
“죄송해요, 유리한 씨. 하지만 실전처럼 덤벼보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요! 이왕 모두를 치료해 줄 거면 저도 치료해 달라고요! 나도 엄청나게 지쳤는데!”
“그럴 수는 없어요.”
고요한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한 씨는 지금 적이잖아요.”
고요한이 지금 그녀한테서 보고 있는 사람은 트리샤 리스체가스.
바로 그의 친할머니였던 리스체가스의 주인이었다.
그렇기에 고요한은 펼쳐놓은 마법들을 유지하느라 힘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힐을 시전한 거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유리한을, 아니…….
트리샤 리스체가스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그 대신 이렇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할 때도 나는 이렇게밖에 도움을 주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고요한이 입술 안쪽을 꽉 깨물 때였다.
“고맙다, 요한.”
디에스 라고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유리한을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유리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살살하자, 좀.”
“실전처럼 네게 덤벼들라고 한 건 바로 너였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 진심을 다해 자신에게 덤벼드는 건 좋은 일이었다. 더욱이 조금씩 서로 공격을 연계하면서 합을 맞추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하는 데 별문제가 없을 터.
‘나야, 따로 합을 맞추지 않아도 되니까.’
유리한은 자신의 타고난 센스를 믿었다.
“뭐, 그럼 나도 진심을 다해 볼까? 슬슬 힘에 부쳐서 말이야.”
체력 고갈로 꼴사납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유리한이 씨익 웃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두의 감각을 빼앗아 버렸다.
물론, 자신이 부탁한 마법들을 시전 중인 고요한과 그를 보좌하고 있는 니르로르의 감각 역시 빼앗아 버렸다.
- 유리한아! 또 짐의 감각을……!
“실전처럼 한다고 했잖아.”
- 69층의 문지기인지 뭔지가 이런 힘을 사용할 리가 없잖느냐!
“사용할 수도 있지?”
유리한이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모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자기 감각을 빼앗겨 당황해하고 있던 모두가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는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오감이 아닌 기감.
그것을 느낀 거다.
“오.”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렸다.
“역시 다들 대단해요.”
청각을 빼앗겨 아무것도 듣지 못할 텐데도 유리한은 그들을 한껏 칭찬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모두가 비딱하게 웃으며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캉, 카앙―!
몇 번이고 쇠붙이가 맞붙었다.
막상막하의 실력.
유리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멀찍이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차린 디에스 라고가 그녀를 단숨에 따라잡고는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나하나가 막기 버거운 묵직한 공격이었다.
유리한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는 그림자를 이용해 그의 몸을 날려버렸다.
“윽!”
디에스 라고가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곧장 몸을 일으켰지만 말이다.
유리한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나한테서 누구를 보고 있는 거야?’
누구를 보고 있는 건지 예상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레이시 아서겠지.’
분명 그의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봤을 텐데도 디에스 라고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싫다는 거겠지.’
유리한이 픽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끝이 없겠는데.’
무슨 좀비도 아니고 쓰러뜨려도 계속해서 일어났다.
더욱이.
‘요한.’
유리한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땀을 뻘뻘 흘리는 와중에도 고요한은 착실히 힐을 시전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만 제외하고.
69층의 문지기가 이런 상황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나 마나였다.
“힐러부터 처리하겠지.”
유리한이 씨익 웃고는 고요한을 향해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그녀를 막아 세웠다.
유리한이 고요한을 공격할 줄 예상했다는 듯 말이다.
“이런…….”
사방이 가로막혔다.
공중으로 몸을 피한다고 해도 곧장 모두가 따라붙을 터.
유리한이 고민하다가 픽 웃었다.
‘고민할 것도 없지.’
자신이 정말 69층의 문지기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죽어버렸을 거다.
유리한은 빼앗은 감각들을 모두에게 돌려주고는 무기를 내렸다.
“항복. 제가 졌어요.”
멍하니 있던 모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유리한 역시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다구리 앞에 정말 장사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