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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204)화 (204/235)

204화 

【 25. 69층 】

고요한이 몸을 회복했다.

열이 펄펄 끓어올라 쓰러지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말이다.

“다시는 마법을 그렇게 쓰지 않겠어요.”

고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분께 민폐를 끼쳤다니…….”

그러고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유리한 씨의 간호가 싫었다는 건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유리한이 웃었다.

“열도 내려서 더 다행이고요.”

“…유리한 씨가 밤낮없이 간호를 해주셨으니까요.”

그랬다.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을 방에 눕힌 그날부터 유리한은 줄곧 그를 간호했다.

고요한은 가끔 정신을 차릴 때면 그녀의 얼굴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그랬다.

‘내 심장 소리가 유리한 씨한테 들리는 건 아니겠지?’

고요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유리한이 재잘거렸다.

“사실, 저도 요한이랑 같은 증상을 겪어본 적 있거든요.”

“하지만 유리한 씨는.”

“마법을 못 하죠.”

유리한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멀린 몰래 연습한 적이 있어요.”

비록, 그때 축구장 면적의 몇 배를 날려버렸지마는 말이다.

‘그래도 몬스터들까지 같이 날려버렸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일석이조의 일이었다.

“덕분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서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던 거 있죠? 그때 멀린이 저를 얼마나 욕했는지 몰라요.”

“멀린 씨라면 그분이죠?”

니르로르를 붙잡고자 자신을 희생했다는 위대한 대마법사.

‘그리고 디에스 씨와 마찬가지로 유리한 씨의 동료였던 사람.’

고요한이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모르는 유리한의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은 디에스 라고만으로 족했다.

질투할 대상이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나는 건 심적으로 꽤 피곤한 일이었으니.

그때, 고요한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마에 닿는 작은 온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열이 내려서 다행이에요, 요한.”

유리한이 고요한의 열을 재고는 싱긋 웃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그런 인사는 할 필요 없어요. 정 미안하면 이제 아프지 마세요. 함부로 무리하지 마시고요.”

“…네.”

고요한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유리한은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드르륵,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유리한아! 짐이 왔도다!”

“니르로르, 목소리 좀 죽여라.”

“짐에게 명령하지 마라!”

니르로르는 이제 아이의 모습으로만 폴리모프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니르로르 씨, 디에스 씨.”

“고요한아!”

니르로르가 한달음에 고요한한테 달려와서는 물었다.

“괜찮으냐? 아픈 곳은 이제 없느냐? 그러게 왜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려서!”

니르로르가 앙증맞은 손을 들어 고요한의 몸을 여러 차례 때렸다.

“죄송해요. 많이 걱정했죠?”

“그런 거 하나도 안 했느니라!”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고요한은 알았다. 눈앞의 아이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었는지를.

그리고.

“일어났군.”

“네, 여러분 덕분에요.”

디에스 라고 역시 그를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말이다.

고요한의 대답에 니르로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딱히 한 게 없다만.”

“그렇겠죠.”

고요한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요?”

“잠깐 나갔어요. 요한이 쓰러져 있을 때 만물과 천하태평의 남은 잔당이 쳐들어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에요?”

암만 앓아누워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몰랐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고요한은 이어진 유리한의 말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정리돼서 요한은 몰랐을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워낙 강해야지.”

“나와 유리가 나설 필요도 없이 쫓아냈다.”

“그리고 완전히 전멸시키려고 청의 기사단 분들이 뒤를 쫓는 중이고요.”

그것도 이제 끝이라면서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다들 곧 돌아오실 거예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잠만 자고 있었네요.”

“요한이 그 몸으로 돕겠답시고 나섰다면 민폐였을걸요?”

유리한이 짓궂게 말했다.

“어쨌거나 디에스랑 니르로르가 가지고 온 죽 좀 드세요.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그 말에 고요한은 그제야 자신의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한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장지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제로 바니스타의 목소리에 유리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주세요. 제가 나갈 테니까요.”

제로 바니스타는 유리한만을 불렀다. 그건 그녀에게만 볼일이 있다는 뜻.

유리한이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단장님께서 기사분들을 이끌고 돌아오셨답니다.”

“오, 내일은 되어야 돌아올 줄 알았더니.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정다운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말은 잘해요.

유리한이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린 찰나, 제로 바네스타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고요한 님께서 일어나셨다면 곧 69층을 공략하겠군요.”

저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제로 바니스타는 고요한이 쓰러진 후 잔뜩 불안해했다. 아니, 초조해했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69층의 공략이 늦어지게 돼서 그런 거겠지.’

유리한이 속으로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야죠. 시간이 지체된 감이 없지 않아 있으니까요.”

“다행입니다.”

“요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요? 아님, 이제 드디어 69층을 공략하러 갈 수 있게 돼서요?”

비딱하게 묻는 말에 제로 바니스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유리한이 다시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하여튼 간에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아니, 딱 하나 있기는 했다.

제로 바니스타가 제공해 주는 정보.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정보 수집 능력도 뛰어나고.’

그리고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그 덕분에 살아 있는 거겠지.’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 얼굴에 뭐 묻은 거라도 있습니까?”

“갑자기 재수 없어 보여서요.”

“아…….”

제로 바니스타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말했다.

“그래서 청예신 씨는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참, 청예신 씨가 선물도 몇 개 들고 왔는데 마음에 꽤 드실 겁니다.”

“청예신 씨는 언제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어요. 백작님과는 다르게요.”

“그랬었군요. 앞으로 유리한 님의 마음에 들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유리한은 한껏 얼굴을 구겼다.

* * *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아, 유리한 씨.”

“수고하셨어요.”

유리한이 청예신에게 인사했다.

“청의 기사단 분들만 너무 고생시킨 거 아닐까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청예신이 싱긋 웃었다.

“혈맹은 69층의 문지기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뮤즈의 분들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리한이 청예신의 말을 끊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뮤즈의 주인인 제로 바니스타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보다 청예신 씨가 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하던데 말이에요.”

“백작님이 그새 말씀하셨나요? 어쩜 그렇게 입이 가벼운지.”

“칭찬 감사합니다.”

제로 바니스타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청예신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

그녀는 곧 웃는 낯으로 말했다.

“데리고 와, 라이.”

“네, 단장님.”

청예신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라이 에스페란도가 자리를 비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청예신 씨, 저 녀석들은……!”

유리한을 위한 선물을 데리고 말이다.

선물은 모두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 모두 익숙한 차림새라는 게 문제였다.

만물의 마법사와 천하태평의 무인들.

유리한이 두 눈을 부릅뜬 순간, 청예신이 그녀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저희한테 항복한 녀석들이에요. 참고로 배신할 가능성은 없어요.”

청예신이 찻잔을 들며 말을 이어갔다.

“맹세를 받아냈으니까요.”

그들이 청예신에게 어떤 맹세를 했는지 유리한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랴오륭이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심장을 걸었을 거다. 배신하는 순간, 그 숨이 끊어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청예신 씨도 참 냉혹하다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성적이란 말.

당황했던 것도 잠시 유리한이 제 앞에 내밀어진 선물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차하면 69층을 공략할 때 방패로 쓰면 되겠네요.”

유리한이 성큼, 선물이 된 플레이어들을 향해 다가가서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불만은 없겠죠? 그간 벌인 짓들이 있는데.”

청의 기사단에게 항복한 플레이어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한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에 유리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었어요. 제가 정말 여러분을 69층의 문지기에게 먹이로 던져줄까 봐요?”

그럴 줄 알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유리한이 쥐죽은 듯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너무하시네.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였나요?”

“그간 유리한 님이 보여준 행동이 워낙 무자비했으니까 말입니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제로 바니스타가 눈치껏 유리한에게 아양을 떨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한껏 불쾌한 표정을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선물이 저 사람들로 끝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실망이었다.

다행히도 유리한을 위한 선물은 더 있었다.

“당연히 아니죠.”

청예신이 눈웃음을 지었다.

“저분들이 69층까지 무사히 안내해 줄 거랍니다.”

“오.”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렸다.

“마음에 드네요.”

단순한 포로가 아니라 길잡이였다니.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다행이네요. 실망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청예신 씨가 저를 위해 준비해 주신 선물.”

그녀의 두 눈이 청의 기사단에 항복한 플레이어들에게로 향했다.

“어디 한번 잘 사용해 볼게요.”

만물의 마법사들과 천하태평의 무인들은 그 말에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았다.

도망치거나 배신하면 죽음뿐.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잘못된 주인을 따른 대가는 무척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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