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촤아악―!
세 사람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밀려난 주철야가 성난 목소리를 뱉어냈다.
- 강호인의 긍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녀석들이군!
“죄송하지만 저희는 강호인이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요.”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다시 갑니다.”
타앗!
유리한이 땅을 박찼다.
“요한! 엄호 부탁할게요!”
“네, 유리한 님!”
파아앗―!
고요한이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유리한은 그의 마법이 부서지지 않으리라 믿으며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디에스!”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안다.”
디에스 라고가 어느새 그녀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다리를 맡지.”
“그럼 나는 위.”
유리한이 씨익 웃고는 땅을 박차 날아올랐다.
- ……!
주철야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디에스 라고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박차를 가해 주철야의 허벅다리 부분에 검을 찔러 넣었다.
- 크으윽!
주철야가 우락부락한 팔을 들어 디에스 라고를 밀쳤다.
이번에는 유리한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작살을 던지듯, 그를 향해 검을 내던진 것이다.
주철야가 빠르게 다가오는 검을 겨우 피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
갑작스럽게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그뿐이랴? 귀도 멀어버린 기분이었다.
유리한이 그의 감각을 차례차례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내던진 검은 정확히 주철야의 오른쪽 어깨에 꽂혔다.
주철야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자신이 유리한의 공격에 당한 것조차 모르고 있는 듯했다.
- 누, 눈이……!
주철야가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알았다.
눈앞의 남자는, 아니…….
몬스터는 절대로 쉽게 무너질 녀석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 내가 이따위 조잡한 공격으로 무너질 것 같더냐!
포효와 함께 주철야가 어깨에 꽂힌 검을 뽑아 들었다.
쐐애액!
“유리한 씨!”
유리한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검을 가볍게 낚아챘다.
“유리, 네 힘에 저렇게 반응하는 녀석은 처음 보는군.”
“그래? 나는 많이 봤는데. 그보다 곤란하게 됐네.”
화르륵, 주철야의 성난 기운에 맞춰 대지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흐음, 아쿠아 님의 보물이 생각보다 형편없었나 봐.”
라고 유리한이 중얼거릴 때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화염이 푸식, 김빠진 소리를 내며 줄어들었다.
주철야가 허둥거렸다.
-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땅이 왜 이러냔 말이다!
“오, 그게 보여요?”
유리한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 내 땅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당장 말해라!
주철야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성난 고함을 치는 그를 향해 유리한이 키득거렸다.
“말해줘도 못 들으면서 난리네.”
“실력과는 다르게 멍청한 녀석인가 보군.”
“그만큼 무식한 것 같고.”
발을 쿵쿵 구르던 주철야가 정확히 유리한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유리한이 창을 꺼내 쥐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휘두를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레나! 발을 묶어!”
“네, 단장님!”
파아앗―!
주철야의 위로 푸른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그 속에서 여러 개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 크윽?!
사슬은 주철야가 꼼짝도 못 하게 그의 몸을 묶었다.
“라이, 한 번에 간다!”
“네, 단장님.”
타앗!
라이 에스페란도가 청예신과 합을 맞춰 주철야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유리한은 그 순간을 맞춰 그에게 오감 중 하나를 돌려줬다.
돌려준 감각은 촉각.
- 크아아악!
주철야가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으로 끝이 나면 좋겠건만, 주철야의 목숨은 끈질겼다.
쿠웅!
그가 커다란 손을 들어 아래로 내리쳤다. 청예신이 라이 에스페란도와 함께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청예신 씨, 괜찮나요?”
“네, 괜찮아요.”
유리한의 걱정에 청예신이 태연하게 대꾸하며 말했다.
“늦게 와서 죄송하네요. 따라온다고 따라온 건데 유리한 씨가 너무 빨라서요.”
- 생각보다 실력이 형편없는 녀석이었나 보군. 짐은 유리한을 금방 따라잡았는데.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뺨을 쭈욱 잡아당겼다.
“그건 네가 내 어깨 위에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이고.”
- 아프도다, 유리한아!
“아프라고 하는 거잖아.”
니르로르가 있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유리한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라이 에스페란도는 청예신과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문지기 앞에서 태연하군요.’
‘그러게.’
청예신이 엉망이 된 몰골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주철야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저렇게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니.’
청예신, 그녀 역시 덤덤해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청예신은 주철야가 뿜어내고 있는 살기에 온몸이 저릿했다. 라이 에스페란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두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유리한이 있었다.
튜토리얼을 끝낸 위대한 영웅.
그리고 이 탑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
청예신과 라이 에스페란도는 그녀가 가진 힘을 믿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유리한이 말했다.
“저 녀석 생각보다 끈질겨요. 다 같이 공격해서 숨을 끊어놓아야 해요.”
인간에게는 치명상인 상처를 곳곳에 냈는데도 주철야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몰골은 전혀 그러지 않았지만.
그때, 주철야가 포효했다.
- 크아아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청의 기사단의 유일한 마법사, 엘레나 리본이 쿨럭 피를 토해냈다.
“엘레나!”
라이 에스페란도가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나는, 괜찮아…….”
엘레나 리본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저 녀석이 내 마법을 부숴버렸어. 고작, 기합 한 번으로.”
라이 에스페란도가 날 선 눈으로 주철야를 노려봤다. 엘레나 리본의 말대로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이 사라졌다.
“어떻게 하죠?”
“얌전히 있으면 돼요.”
유리한이 청예신의 질문에 싱긋 웃었다.
“적은 알아서 올 테니까요.”
그 말대로 주철야가 쿵, 쿵! 그들을 향해 한 걸음씩 다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걸음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 감히 내게 이런 수치를 안겨주다니! 너희 모두 산산조각 찢어버려 주겠다!
날카로운 손톱이 유리한을 향해 쇄도했다.
* * *
쿠구궁―!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땅울림에 강시를 사냥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비틀거렸다.
“이게 무슨 난리다냐?”
“유리한 님께서 69층의 문지기와 열심히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가 봅니다.”
“실랑이?”
랴오륭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낡은 전각을 맨손으로 부서뜨리며 말했다.
“일방적으로 유리한 님이 문지기 놈을 패는 게 아니라?”
제로 바니스타는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서 무슨 대답을 기대했겠냐?”
랴오륭이 퉤, 침을 뱉고는 소리 질렀다.
“서문기율! 왜 그렇게 굼벵이처럼 움직이고 있는 거야?! 팍팍 좀 쓰러뜨려!”
“그러고 있습니다!”
“어쭈? 지금 나한테 짜증을 낸 거야? 짜식, 많이 컸네?”
“그런 거 아닙니다!”
서문기율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지만 랴오륭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태연하게 동료를 갈구는 모습이라니.
욕을 들어먹어도 할 말 없었지만, 그에게 욕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퍼억!
랴오륭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강시의 머리를 맨손으로 으깨버렸다.
“아오, 손 더러워졌네.”
슥슥 옷에 더러워진 손을 닦아내며 랴오륭이 얼굴을 구겼다.
“하나같이 약한 녀석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니 귀찮네.”
“원래는 강했을 겁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차갑게 식어버린 용암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숫자도 훨씬 많았겠지요.”
분명 용암이 들끓었다면 강시들이 계속해서 밖으로 나왔을 거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의 보물이 환경을 바꿔버렸다.
폐부를 뜨겁게 만들던 공기가 차갑게 식어버렸고, 그에 따라 용암도 식어 굳어버렸다.
그리고 바뀐 환경은 강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굼뜨게 움직이는 것들은 사냥하기 쉬웠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나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약한 놈들을 상대하게 돼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다행은 무슨 다행?”
랴오륭이 성난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나는 강한 녀석이랑 붙고 싶단 말이다.”
“아하, 그래서 유리한 님과 붙었다가 된통 깨진 것이군요.”
“죽고 싶냐? 너도 강시로 만들어줄까?”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가볍게 검을 휘둘러 강시의 머리를 베어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농담 좀 한 것 가지고 그렇게 화내지 마시지요.”
“농담도 농담 같은 걸 해야지!”
그때였다.
“맹주님!”
랴오륭의 든든한 오른팔, 서율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강시들이 갑자기 물러납니다!”
그 말대로 느릿하게 플레이어들을 향해 움직이던 강시들이 전에 없던 속도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뭐야, 저것들 어디 가?”
랴오륭이 미간을 좁힌 찰나.
“이봐, 서문기율!”
서문기율이 자리를 이탈했다.
랴오륭이 황급히 그를 불렀지만 서문기율은 이미 강시들을 따라 사라진 뒤였다.
“저 자식은 왜 주제도 모르고 멋대로 날뛰는 거야?!”
“그 제자에 그 스승 아니겠습니까?”
“닥쳐.”
랴오륭이 제로 바니스타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황급히 서문기율을 쫓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죽는다. 랴오륭은 유리한과의 맹세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서문기율! 멈춰!”
“싫습니다!”
서문기율이 고집스럽게 외쳤다.
“저 녀석들, 유리한 씨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도와주러 가야 합니다!”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랴오륭이 쯧, 혀를 찼다.
그러고는 속도를 높여 단숨에 서문기율을 따라잡았다. 서문기율의 눈이 동그래진 찰나.
“우왓?!”
“꽉 잡아라. 달릴 테니까.”
그러면서 그는 제로 바니스타가 있는 곳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백작! 뒷정리를 부탁하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제로 바니스타에게 무리 없이 닿았다.
“가버리셨군요.”
“그러게.”
제로 바니스타가 제이의 말에 픽 웃었다.
“뭐, 우리는 맹주님께서 부탁한 일을 처리하도록 할까?”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강시들 몇몇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강시는 언데드 몬스터.
핵을 부수지 않으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몬스터였다.
“조심하면서 머리를 부수자고.”
“네, 백작님.”
제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도 땅울림은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