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213)화 (213/235)

213화 

유리한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처치해 달라니요……?”

“죽여달라는 거다.”

“알아요.”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러스트 님, 저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시겠지.”

러스트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마땅한 이유가 있다면?”

“네?”

“내가 네게 이런 부탁을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일단 들어는 보죠.”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재잘거렸다.

“도대체 글러트니 님에게 붙어 있는 그 인간이 어떤 악독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요.”

러스트가 픽 웃었다.

“정말이지, 너는 이상한 인간이구나.”

“칭찬 감사해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러스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이었다.”

“그랬어요? 저는 칭찬처럼 들렸는데.”

헤실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 러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렌티아.”

그녀는 나지막하게 자신의 보좌관을 불렀다.

엘렌티아는 순식간에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니르로르를 품에 안고서 말이다.

“유리한아!”

“니르로르? 너는 또 왜 그 모습이야?!”

유리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던 니르로르가 그녀에게 달려갔다.

유리한이 그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품에 안기자마자 니르로르가 칭얼거렸다.

“유리한아, 보고 싶었도다!”

“거짓말하시네.”

“거짓말 아니었느니라!”

니르로르가 빼액 소리 질렀다.

“저 뾰족 귀 놈이 짐을 얼마나 달달 볶았는지 아느냐?!”

엘렌티아가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니르로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 좀 칭얼거려.”

“흥.”

니르로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때 러스트가 입을 열었다.

“엘렌티아.”

“저는 억울합니다.”

“그게 아니라 유리한에게 말을 해주려무나.”

“무엇을 말씀입니까?”

“글러트니.”

“아.”

엘렌티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 그가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유리한의 앞에 창이 나타났다.

“네 앞에 보이는 건 글러트니 님의 영지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글러트니의 영지는 황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족 역시 보이지 않았다.

유리한의 물음에 엘렌티아가 말했다.

“그야, 영지민들 모두가 글러트니 님의 성에 잡혀 들어갔으니까.”

그리고 유리한의 동료 역시 잡혀갔을 거라고 엘렌티아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오, 그분의 성이 꽤 큰 모양이네요?”

“아니. 글러트니 님의 성은 고위 마족분들 중 가장 작다.”

“그래요?”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러트니 님이 재정적으로 풍족하신가 보네요? 그러지 않고서야 영지민 모두를 성으로 데려올 순 없잖아요.”

“재정적으로 풍요롭지는 않다.”

“그럼, 왜 그런 거죠?”

묻는 말에 엘렌티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험을 위해서다.”

그 말에 유리한은 러스트의 말을 떠올렸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병사로 키우기 시작했다고 했지.’

그리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다.

유리한은 그 사실을 상기하며 엘렌티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영지민들은 모두 실험체라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실험에서 실패한 녀석들은.”

엘렌티아가 잠시 말을 멈춘 순간, 유리한은 보고 말았다.

황폐한 땅에 나타난 마차를.

“저건 뭔가요?”

“보면 알게 될 거다. 실험에서 실패한 실험체의 말로라고 하지.”

유리한이 미간을 좁힐 때였다. 마차에서 내린 두 명의 마족이 인간 하나를 버렸다.

유리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저 사람…….”

꽤 오랜 시간 동안 굶주렸던 모양인지 피골이 상접했다. 얼굴 역시 창백하게 질린 것이 곧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리한이 집중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온몸에 나 있는 무수한 주삿바늘 자국.

그것을 유리한은 언제인가 본 적이 있었다.

‘지한이.’

자신의 동생, 유지한의 몸에 나 있던 상처들이었다.

유리한이 두 손을 주먹 쥐었다.

“러스트 님.”

“그래.”

“글러트니 님의 성에서 자행되고 있는 실험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도 될까요?”

까드득, 유리한이 이를 갈았다.

“글러트니 님은 정말 단순히 병사를 만들고 있는 건가요?”

“아니.”

러스트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병사를 만드는 건 부가적인 일. 글러트니와 그 보좌관의 목적은 무한의 마력이다.”

쿵!

유리한은 심장이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을 느꼈다.

러스트는 말을 이어갔다.

“무한의 마력이라니.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는데 말이지.”

무한의 마력은 존재했다.

한때 유리한이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고요한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리한?”

러스트가 그녀를 부르며 물었다.

“너는 글러트니의 옆에 붙어 있는 인간 녀석을 죽여줄 수 있느냐?”

“네.”

유리한이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만물이 탑의 거주민에게 자행했던 실험이 이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글러트니의 보좌관이라는 놈의 주관 아래에서.

유리한이 다시 까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글러트니 님도 죽일 수 있어요. 암만 그 보좌관한테 조종당하고 있다고 해도 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러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유리한, 부탁하마.”

그녀가 갑작스럽게 유리한의 손을 붙잡았다. 유리한이 반응할 새도 없이 말이다.

“가능한 한 글러트니를 살려다오.”

유리한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다고 말하려 할 때.

“러스트 님, 손님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손님?”

미간을 좁히며 묻는 말에 엘렌티아가 대답했다.

“네, 그리드 님의 성에 있던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제로 바니스타. 유리한의 동료라고 하는데…….”

자신을 쳐다보며 설명하자 유리한이 말했다.

“맞아요.”

제로 바니스타.

“제 동료예요.”

유리한,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친히 찾아오셨다.

하필이면 뮤즈의 주인, 제로 바니스타가.

러스트가 자리를 비켜줬다.

유리한이 계속해서 동료를 찾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리한과 만나게 된 제로 바니스타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하하! 유리한 님,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저 혼자 이곳에 올라온 건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아아, 그러세요?”

유리한이 떫은 감을 먹은 것 같은 얼굴을 보였다.

제로 바니스타가 러스트의 성에 가장 먼저 도착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마계에서 처음 보는 인간의 얼굴이 제로 바니스타인 게 불만일 뿐.

더군다나.

“그리드 님의 보좌관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유리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용케 저를 찾아오셨네요?”

“아무렴요, 찾아와야죠.”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유리한 님이 계신 곳이 곧 승리를 거머쥘 곳이니까요.”

말이라도 못 하면.

유리한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제로 바니스타가 능글맞게 입을 놀렸다.

“그럼, 제가 그동안 마계에서 얻은 정보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새 정보를 얻었나요?”

“물론이지요.”

제로 바니스타가 활짝 웃었다.

“마계에 올라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시간이면 정보를 얻고도 남습니다.”

“흐음.”

유리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물었다.

“백작께서 제게 거짓 정보를 알릴 가능성은 없는 거겠지요?”

“물론이죠, 유리한 님.”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떻게 유리한 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러더니 폴리모프를 푼 니르로르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그랬다가는 위대하신 드래곤께서 저를 가만두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유리한 역시 그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제로 바니스타는 유리한과 척을 지는 일 따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승산이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제로 바니스타는 유리한을 향해 무해한 웃음을 보였다.

그에 유리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고 니르로르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유리한아, 짐은 저 인간이 마음에 드는구나!

“언제는 싫다면서?”

- 그런 적 없느니라!

“아니야, 있어.”

- 없……!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입을 막고는 말했다.

“좋아요, 백작.”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뱉었다.

“어디 한번 당신이 얻은 정보를 풀어보도록 하세요.”

제로 바니스타가 씨익 웃고는 입을 열었다.

“마계의 전쟁은 5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현재는 잠시 휴전에 들어간 상태고요.”

“오, 생각보다 별로 안 됐네요?”

“저도 놀랐답니다. 최소 100년은 된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제로 바니스타가 사람 좋게 웃고는 중얼거렸다.

“뭐, 그 시간이라면 글러트니 님의 옆에 붙어 있는 인간이 죽었을 테니 전쟁은 진작 끝났겠지요.”

“글러트니 님의 보좌관에 대한 조사도 마쳤나 보네요?”

“당연합니다. 이 마계에서 요주의 인물이니까요.”

그래서 가장 깊게 파고들며 조사했다고 제로 바니스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것참 잘하셨네요, 백작님.”

조롱이 아닌 진심을 담은 칭찬이었다.

“안 그래도 그 인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거든요.”

“그러셨군요. 이거, 조사하기를 잘했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먼저, 그 인간은 5년 전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글러트니 님을 보좌하고 있던 마족 녀석을 죽여버리면서요.”

그러더니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였다.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도 없다고 하는군요.”

“마족들도 마찬가지겠죠.”

“네, 그 때문에 심지어 성별이 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유리한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다만, 그 인간의 곁에는 항상 어떤 남자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남자요?”

“네, 많게 잡아도 20대의 청년이라고 하더군요.”

글러트니의 보좌관은 항상 그 인간을 수족처럼 부린다면서 그가 덧붙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계에서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꼭 플레이어 같다면서 제로 바니스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어떠한 생각이 들었는지 유리한은 표정을 굳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