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 27. 글러트니 】
유리한이 눈앞에 드러난 성에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러스트의 성보다 몇 배는 거대한 규모에 절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엘렌티아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는 아무도 없지만 방심하지 마. 경비 대신 온갖 마법이 펼쳐져 있으니까.”
“네, 그렇네요.”
고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겹겹이 쳐진 마법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문을 통해 들어갔다가는 바로 붙잡힐 것 같군요.”
제로 바니스타의 말에 유리한이 아래턱을 쓸었다.
성문에 쳐져 있는 마법이 제 힘을 감지해 낼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는 하나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 때문에 유리한은 엘렌티아에게 물었다.
“비밀 통로 같은 건 없나요?”
“있어. 글러트니 님의 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고위 마족들의 성에는 모두 비밀 통로가 있지.”
“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몰라.”
엘렌티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었으면 너희를 진작 그쪽으로 안내해 줬을걸?”
“하긴.”
유리한이 수긍했다.
“그럼, 비밀 통로는 저희가 알아서 찾아보도록 할게요. 엘렌티아 님은 이만 가보셔요.”
엘렌티아가 눈가를 찡그렸다.
“비밀 통로를 찾아보겠다고? 어떻게?”
“이렇게요.”
유리한의 발밑으로 그림자가 뻗어 나갔다.
“우왓!”
엘렌티아가 자신의 발아래를 지나가는 그림자에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유리한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겁이 많으시네요?”
“시끄러! 놀라서 그런 것뿐이야!”
엘렌티아가 치욕스럽다는 듯 버럭 화를 냈다. 유리한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찾았어요.”
유리한이 비밀 통로를 찾았다. 그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두 눈을 반짝였다.
곧 친구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일 터.
어쨌거나 유리한은 일행을 데리고 비밀 통로로 향했다. 궁금했는지 엘렌티아도 뒤를 쫓아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엘렌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이는 거라고는 퍼석하게 마른 땅뿐이었다.
“나 참, 엘렌티아 님. 누가 비밀 통로를 다 볼 수 있게 만들겠어요?”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그가 발끈했다.
“그런 것쯤이야 나도 알고 있거든? 그냥 말해 본 것뿐이야.”
“네, 그렇겠죠.”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인 후 마른 땅 위를 이곳저곳 눌러보기 시작했다.
“으음, 누르는 게 아니라 여는 구조인가?”
유리한이 무릎을 굽히고선 손을 들었을 때였다.
끼기긱―!
낡은 소리를 내며 땅이 열렸다.
“오, 됐다.”
유리한이 활짝 웃었다. 엘렌티아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저요?”
유리한이 열린 통로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유리한이에요, 유리한.”
“내가 그걸 몰라서 물었겠어?”
짜증 섞인 목소리에 유리한이 키득거리며 웃고는 말했다.
“어쨌든, 엘렌티아 님. 안내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안 그래도 그럴 거야.”
엘렌티아가 퉁명하게 말했다.
“나중에 보자.”
“네, 나중에 봐요. 꼭이요.”
유리한이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통로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고요한과 제로 바니스타도 그녀와 똑같이 인사하고는 통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통로가 다시 닫혔다.
엘렌티아는 물끄러미 그들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다 걸음을 돌렸다.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어서 돌아가야지.”
그는 마법이 풀릴까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마법이 풀렸다가는 글러트니의 병사들에게 금방 붙잡히고 말 거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대로 죽고 말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엘렌티아는 어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리한이야, 뭐.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엘렌티아의 생각대로 유리한은.
“어이쿠, 이거 실례!”
비밀 통로 안에 나타난 몬스터를 아주 잘 처리 중이었다.
* * *
유리한의 앞길을 막고 있는 몬스터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사람이었던 것들.
“마계에도 좀비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휘둘렀다.
- 크아아악!
- 키야악!
좀비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유리한이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머리를 베어내야 해요.”
마계의 좀비들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튜토리얼 때 나타났던 녀석들과 똑같았다.
어쨌거나 유리한의 말에 고요한이 대답했다.
“네!”
마법을 한껏 펼치면서 말이다.
후웅―!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것들이 좀비들의 머리를 베어냈다. 머리가 날아간 좀비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잘했어요, 요한.”
유리한의 칭찬에 고요한이 배시시 웃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검을 들었다.
그의 말대로 좀비는 아직 비밀 통로에 빼곡했다.
고요한이 질렸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 저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창을 휘둘렀다.
“그냥 대비를 해둔 게 아닐까요? 침입자를 염려해서요.”
그건 유리한의 바람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올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뒀다니.
그건 정말.
‘멀린 같잖아.’
유리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혹시 디에스가 붙잡힌 걸까? 그래서 이렇게 몬스터를 풀어놓은 걸까?
디에스의 소식이 끊기면 자신이 이곳에 올 줄 알고서.
유리한의 머리가 뒤죽박죽 복잡해질 때였다.
“유리한 씨!”
고요한이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며 검을 휘둘렀다.
- 키아아아악!
유리한을 향해 달려들던 좀비의 목이 베어졌다.
“아.”
그녀가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요한.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네요.”
전투 중에 다른 생각이라니.
유리한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책했다.
그런 그녀에게 고요한이 웃는 낯으로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제가 지켜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유리한을 지켜주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고요한은 그것이 기꺼웠다.
그때 니르로르가 유리한을 타박했다.
- 유리한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리 넋을 빼놓고 있었느냐?
“알 거 없어.”
니르로르가 입술을 삐죽이며 쳐다봤다.
“그렇게 봐도 안 가르쳐줄 거야.”
- 흥!
니르로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사이 앞길을 막던 몬스터가 정리됐다. 유리한이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말했다.
“가죠.”
“네.”
고요한과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어깨 위에 얹은 채 걸음을 옮겼다.
끝없이 나 있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빛이 보였다.
입구였다.
유리한이 자신도 모르게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디에스……!’
디에스 라고가 자신을 반겨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유리한의 바람일 뿐이었다.
“윽.”
유리한은 악취에 코를 막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제로 바니스타도 입가를 가렸다.
“누군가 한바탕했던 모양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유리한 님?”
유리한은 대답 대신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살폈다.
“디에스예요.”
“네?”
“이 시체들, 디에스가 한 짓이라고요.”
유리한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디에스! 디에스 라고!”
부른다고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없었으니.
유리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디에스는 이 성을 탈출하려고 했던 거예요.”
하지만 붙잡혔을 거다.
아까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좀비들만 봐도 그랬다.
‘디에스라면 좀비들 따위 가볍게 뚫었을 거야.’
그러나 통로에서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좀비들이 채워진 건, 디에스가 붙잡히고 난 후.’
유리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글러트니의 보좌관은 알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디에스 라고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멀린.’
정말, 너야?
유리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 유리한아.
그때 니르로르가 말을 걸었다.
- 디에스 놈은 괜찮을 거다.
유리한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미소를 그렸다.
“그래, 괜찮겠지.”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이 아는 한 가장 뛰어난 플레이어였다.
그라면 멀린 아서에게 붙잡혔다 할지라도 괜찮을 터.
“일단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죠?”
유리한이 그림자를 풀어 입구를 찾아냈다.
“잠시만요.”
제로 바니스타가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를 붙잡았다.
“유리한 님의 힘이 대단한 건 알지만 그래도 변장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작이 그렇게 말하며 시체가 쓰고 있던 투구를 건네줬다.
유리한은 피가 묻은 것을 닦아내고는 머리 위에 썼다.
고요한은 머뭇거렸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그의 걱정을 덜어줬다.
“어차피 죽은 사람, 아니, 마족의 것이지 않습니까? 주인 잃은 물건에 손을 댄다고 해서 잔소리 들을 일은 없을 겁니다.”
고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투구를 썼다. 그렇게 그들은 시체들이 가득한 방을 벗어나게 됐다.
* * *
방을 나서자마자 축축하고 습한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 그들을 반기는 건 불쾌한 공기뿐만이 아니었다.
“이봐, 마크! 이제 나왔냐?”
그들과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던 마족이 말을 건넨 것이다.
유리한도 고요한도 그리고 제로 바니스타도 당황했다. 도대체 누구를 향해 ‘마크’라고 부르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마족이 손수 ‘마크’의 등을 때리며 그의 정체를 알려줬다.
“이 자식아, 결투장에서 뭔 일이라도 있었냐? 그 인간 놈이 생각보다 강하던?”
얌전히 등을 내준 유리한이 두 눈을 번쩍였다.
“인간?”
“그래, 인간.”
마족 남자가 떠벌거렸다.
“눈빛이 재수 없다면서 간수 놈이 데리고 내려갔었잖아. 너는 구경하겠답시고 갔고. 그보다 옆에 있는 녀석들은 누구야?”
“내 동료들.”
“뭐? 동료라니, 우리한테 그런 게 어디 있, 흐아악!”
유리한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히익!”
목에 검이 겨누어진 마족이 기겁하며 두 손을 들었다.
“마, 마크! 이게 무슨 짓이야?!”
“미안하지만 나는 마크가 아니야.”
유리한이 투구를 벗고는 미소를 그렸다.
“그 인간에 대해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을까?”
주변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를 따라 고요한과 제로 바니스타도 투구를 벗었다.
마족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간들을 보고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