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유리한은 말없이 눈앞의 마족을 노려봤다. 진실 감별(B)로 확인해 보건대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제이미는 물끄러미 유리한을, 그리고 그녀 뒤의 동료들을 쳐다봤다.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그럴 작정으로 보여 결국 유리한이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유리한 씨!”
고요한이 괜찮겠냐는 듯이 그녀를 불렀다.
유리한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요한.”
이미 들킨 거, 속 시원하게 밝히는 게 좋았다. 계속 숨기려고 들면 분위기만 악화될 터.
결국 고요한도 우물쭈물하다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정체를 드러낸 두 남녀에게 제이미가 물었다.
“역시, 첩자셨군요.”
유리한이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녀에게 제이미가 다급하게 물었다.
“러스트 님께서 뭐라십니끼? 글러트니 님을 죽이랍니까?”
“아니요.”
유리한이 고개를 저었다.
“러스트 님은 오히려 부탁했어요. 글러트니 님을 죽이지 말아달라고요.”
그 말에 제이미가 웃었다.
“당신이 글러트니 님을 죽인다고요? 한낱 인간 따위가 말입니까?”
“글러트니 님의 보좌관도 한낱 인간이지 않나요?”
제이미가 입을 다물자 유리한이 말을 이었다.
“제 목표는 바로 그 보좌관 녀석이에요. 러스트 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습니까?”
제이미가 그렇게 묻고는 지친 낯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렇다면 헛걸음을 하셨군요.”
“네?”
“당신은 절대로 그를 죽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제이미는 진지했다.
그가 놓친 건, 유리한 역시 물러날 생각 따위 없다는 거였다.
“싫어요.”
“저는 지금 당신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네, 알아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필요 없어요.”
그 말과 함께 숨어 있던 니르로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제이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짐의 용안이 그렇게 아름다우냐, 뾰족귀야?
“도마뱀이, 말을!”
- 짐은 도마뱀 따위가 아니다!
니르로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유리한이 그 입을 막고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
“제이미 님이라고 했죠?”
“네? 네, 그렇습니다만.”
“당신, 글러트니 님을 배신할 생각이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제이미가 버럭 소리 질렀다. 꽤나 격한 반응이었다.
“기껏 아량을 베풀었건만 제가 우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를 가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만, 정말로 글러트니 님의 사람이라면 왜 저희한테 선택의 기회를 줬겠어요? 아주 친절하게도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무엇보다 글러트니 님도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 정체를, 당신이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답은 간단하다.
제이미는 성내의 모든 병력을 파악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알았을 거다.
‘사실, 저희가 이번에 새로 배정받아서 말입니다. 마크 님께 안내를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새로 온 녀석들인데 제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중이었습니다.’
신규 병사 따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름 모를 마족이 흉내 낸 마크가 진짜 본인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성의 안팎살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것도 아니면.
“병력을 손쉽게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걸까나? 아, 이미 병력을 모아놓았을 수도 있겠네요.”
글러트니의 뒤를 치기 위해서.
유리한이 그 말을 삼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제이미의 낯빛은 한없이 어두워져 있었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보다시피 인간이에요. 러스트 님이 보낸 첩자이기도 하고요.”
“그런 걸 물은 게 아닙니다!”
제이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당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플레이어라고 하지요?”
“네, 맞아요. 그런데 신기하네요.”
유리한이 제이미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고요한이 그녀의 옆에 붙었다. 제이미가 유리한을 공격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제재 없이 제이미 앞에 다다른 유리한이 비딱하게 물었다.
“저희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죠? 이곳 마계에 저희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올라왔을 리는 없을 텐데 말이에요.”
제이미가 입술을 달싹였다.
“보좌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웬 인간을 잡아 오셨거든요. 꽤 강한 놈이라 그놈을 제압하는 데 여럿이 당했지요.”
유리한이 표정을 굳혔다.
보좌관이 잡아 왔다는 인간.
분명 디에스 라고일 것이리라.
“보좌관님께서 직접 제압하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겁니다. 어쨌든 상황이 종료된 후, 그 인간의 정체를 여쭤보니 플레이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보좌관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고 했다.
“마계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몇 명 더 있다고 말입니다. 곧 저희 성에 들이닥칠 거라 했지요.”
“그 인간을 구하러요?”
“네, 그렇습니다.”
유리한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멀린이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자신이 디에스 라고를 구하러 오리란 것을.
유리한과 디에스의 관계를 아는 다른 플레이어들이야 쉽게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이제 막 열린 세계인데, 아래층에서 있었던 일을― 그러니까 자신과 디에스 라고의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멀린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애초에 왜 살아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느냔 말이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리한 씨…….”
고요한이 조심스럽게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억지로 펼치게끔 했다.
“손 상해요.”
“아.”
유리한이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요, 요한. 걱정을 끼쳐드렸네요.”
“아니에요!”
고요한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우물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고요한은 지금 괴로웠다.
그의 구원자는 명명백백하게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못 했다.
달래주고자 내뱉는 말은 위선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그녀의 화를 돋우는 인물을 죽이려니.
‘힘이 없어.’
자신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무한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유리한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 유리한아, 고요한 녀석이 혼자서 땅을 파고 있느니라.
“아니에요!”
고요한이 놀라 펄쩍 뛰었다.
니르로르는 혀를 날름 내밀어 한 번 더 놀려주고는 유리한의 어깨 위에 앉았다.
유리한은 제이미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보좌관이란 자의 정체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없습니다.”
제이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분이란 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글러트니 님의 곁에 머물게 되면서.”
“전쟁이 일어났으니까요.”
유리한이 제이미의 말을 끊었다.
“또한, 사람들을 이 꼴로 만든 실험도 시작됐겠죠.”
제이미는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실험체들은 유리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제발 죽여달라고 빌 뿐이었다.
“요한.”
“네, 유리한 씨.”
“저 사람들을 치료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고요한이 망설임 없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실험체들에게 달려갔다.
파아앗!
곧, 그의 손가락 끝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힐이었다.
하지만 고요한의 힘은 실험체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으아악! 아파! 아프다고!”
“아아악!”
실험체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고요한이 깜짝 놀라 힘을 거두었다.
“이, 이게 무슨.”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고요한이 당황한 눈으로 제이미를 쳐다봤다. 설명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 시선에 제이미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 감옥에 갇혀 있는 실험체들은 모두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녀석들입니다.”
제이미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계에 사는 생명체들은 모두 ‘마나 하트’라는 특별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에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마나 하트라고요?”
“네, 마력이 응축되어 있는 심장을 말하는데.”
“그런 건 알고 있어요.”
당장, 만물의 마법사들이 그런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설명해 주세요. 그 심장이 도대체 뭐기에 요한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거죠?”
제이미가 고요한을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심장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심장이 작동하는 데 악영향을 끼치는 마기가 온몸에 들러붙어 있으니까요.”
“마기요?”
70층까지 올라오면서 처음 듣는 용어였다.
“마기가 뭔가요?”
제이미가 설명해 주고자 입을 떼었을 때.
- 그건 짐이 말해 주겠느니라.
니르로르가 나섰다.
크흠, 헛기침을 터트린 그가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 마기는 마력의 또 다른 말이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것들이지.
“무슨 뜻인데?”
- 마력이 마법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면, 마기는 마법을 사용하고 난 후의 마력 찌꺼기들을 말한다.
“소위 말해 쓰레기들입니다.”
제이미가 감옥 안의 실험체들을 눈에 담고서는 말했다.
“쓰레기를 계속 몸에 주입당했으니 얼마나 망가졌겠습니까? 더군다나 마계의 마기는 숙주를 찾으면 그 안에서 기생합니다.”
쓰레기라고 불리는 것과는 달리 엄연히 살아 있는 것들이란다.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살리지 못합니다. 몇 번이고 실험을 반복하다 결국 온몸이 문드러져 죽고 말겠지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발 죽여달라.
차라리 죽여달라.
이제 죽고 싶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죽음을 바라는 울부짖음에 유리한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두 손을 꽉 쥐면서 말이다.
촤아악!
그녀의 발아래에서 뻗어 나간 그림자가 감옥 안에 있던 실험체들을 모두 감싸버렸다.
이후, 그림자가 사라졌을 때 감옥 안의 실험체들은 편안하게 눈을 감은 뒤였다.
“당신!”
제이미가 경악하며 유리한을 불렀다. 그녀는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말해.”
순식간에 바뀐 말투.
제이미가 당황한 찰나, 유리한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여기서 지금 무슨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녀는 자신의 가정에 확신을 얻기 위해 그리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