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죽는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제이미는 눈치 빠르게 직감했다.
그렇기에 그는 입을 열었다.
“무한의 마력을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리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상이 들어맞아 기쁜 마음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분노만이 들끓었다.
“보좌관은 인간이지?”
“네.”
“그리고 마법사일 거야.”
제이미가 놀란 눈을 보였다.
“그걸 어떻게…….”
유리한은 실소를 터트렸다.
‘멀린, 너는 도대체 왜.’
꽉 쥔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유리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래, 지한이를 생각하자. 그리고 시우와 서아를 생각하는 거야.’
가족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제이미 님.”
“네? 네.”
“실험이 어디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또 말투가 바뀌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어투였지만 제이미는 두려웠다. 조금 전 느낀 공포가 그에게 각인된 탓이다.
하지만 제이미는 희게 질린 낯으로 말하기를 주저했다.
“제이미 님도 실험이 중단되기를 원하시잖아요?”
제이미가 화들짝 놀라 유리한을 쳐다봤다.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말이다.
유리한이 담담하게 물었다.
“아닌가요?”
“…맞습니다.”
제이미가 한숨을 토하듯 말을 내뱉었다.
“저는 이 빌어먹을 실험이 중단되기를, 아니, 영영 끝나기를 원합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실험 때문에 수많은 영지민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글러트니 님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계십니다. 그렇게나 다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도.”
“그래서 글러트니 님을 배신할 생각이었나요?”
“배신이라니요!”
제이미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분은 제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배신을 하겠습니까?”
“거짓말.”
유리한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제가 했던 말 기억하죠?”
제이미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유리한이 자신에게 했던 말 중 뇌리에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성의 안팎살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아님, 병력을 손쉽게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걸까나? 아, 이미 병력을 모아놓았을 수도 있겠네요.’
자신을 놀리려는 게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제이미가 유리한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글러트니 님을 배신하고자 군사를 모은 게 아닙니다.”
“그러시겠죠.”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의 목적은 그 보좌관을 제거하는 거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제이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좋네요.”
“네?”유리한이 미소를 그렸다.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물론, 그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글러트니까지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제이미.
글러트니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
* * *
그 시각, 제로 바니스타는 글러트니와 함께 만찬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방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병사를 죽이지 않았었나?’
하지만 글러트니는 자신이 죽인 병사의 죽음 따위는 잊은 듯 굉장히 기분 좋아 보였다.
그런 그가 경멸스러웠다.
아무리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제로 바니스타라고 해도 그랬다.
그때, 글러트니가 물었다.
“자네는 내 보좌관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잘은 모릅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술술 거짓말을 내뱉었다.
“말했듯, 저는 그분의 은혜를 입은 것뿐이니까요. 아마 그분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워낙에 구하신 분들이 많아서.”
“하하, 그럴 테지!”
글러트니가 유쾌하게 웃었다.
“내 보좌관 녀석은 우수해. 정도 많지.”
정이 많은 사람이 지하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제로 바니스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차피 투구 속에 가려진 얼굴이라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보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제로입니다.”
‘바니스타’란 성은 굳이 붙이지 않았다. 백작의 목표는 보좌관의 옆에 있다는 청년이었으니.
그가 정말 자신의 친구라면 제 이름에 반응하리라.
‘트라이.’
제로 바니스타가 친구를 떠올리며 입술 안쪽을 꾹 깨물 때, 글러트니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제로라…….”
그러더니 아래턱을 쓸고선 입을 열었다.
“좋은 이름이군. 그보다 만남을 너무 고대하지는 말게나. 내 보좌관 녀석은 남들 눈에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하거든.”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글러트니 님과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제로 바니스타의 아부에 글러트니가 “와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마음에 드는군! 일개 병사로 두기엔 아까워!”
“좋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글러트니가 겸손도 잘 떤다면서 백작을 칭찬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만찬장에 도착했다.
“먼저 들어가지. 보좌관에게 자네의 합석을 물어볼 테니 기다리고 있게.”
“네, 글러트니 님.”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꾸벅였다. 곧 글러트니가 만찬장 안으로 사라졌다.
“후우.”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들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만찬장 앞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뿐이랴?
이곳까지 오면서 병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하녀나 하인들, 그런 고용인들을 말이다.
‘이상한데.’
제로 바니스타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성을 둘러볼 때.
“제로, 들어오게나!”
글러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만찬장 안에도 고용인이 없는 건가?’
제로 바니스타는 놀라워하면서도 문을 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말이다.
만찬장 안에 들어선 그는 얼굴을 들지 않고서 말했다.
“합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좌관 님.”
“뭘요.”
듣기 좋은 미성이 제로 바니스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고개를 드세요. 글러트니 님께서 칭찬하시던 병사분을 보고 싶네요.”
투구를 벗으란 말이겠지.
제로 바니스타가 투구를 벗고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몰라 얼굴은 변형한 상태였다.
만찬장은 화려했다.
예상대로 만찬장 안에 고용인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는 음식들과 그것을 비추는 화려한 샹들리에.
그 안에 있는 건, 보좌관과 글러트니뿐이었다.
‘보좌관이 부리고 있다는 남자는 보이지 않는군.’
제로 바니스타가 아쉬워할 때.
“앉으세요.”
보좌관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제로 바니스타가 영광이라는 듯 격한 몸짓을 하며 외쳤다.
“네, 감사합니다!”
제로 바니스타는 보좌관의 맞은편에 앉고서 그를 흘긋거렸다.
로브를 얼굴 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지라 그의 외양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제 얼굴이 궁금한가요?”
“네? 아닙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젓고는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은인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된 것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그래서 그만 훔쳐보는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다면서 제로 바니스타가 절절맸다.
보좌관은 웃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말을 참 잘하시네요? 트라이에게 들은 대로요.”
“네?”
제로 바니스타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가 멍하니 쳐다보자, 보좌관이 스테이크를 자르던 손을 멈추고는 물었다.
“트라이를 불러드릴까요?”
제로 바니스타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저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그보다 글러트니는?
힐끗 보니 글러트니는 먹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글러트니 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신경 쓰인다면.”
따악!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글러트니의 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보좌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저희 둘만 남았네요.”
제로 바니스타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위험하다.
탑을 오르면서 수없이 발동했던 직감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제로 바니스타는 물었다.
“트라이를 아십니까?”
지금까지 친구를 만나고자 탑을 올랐다. 그를 찾고자 뮤즈를 설립했고 탑의 모든 정보를 모았다.
그 결실을 눈앞의 남자에게서 거둘 수만 있다면야, 제로 바니스타는 기꺼이 두려움을 참을 수 있었다.
보좌관이 미소를 그렸다.
“물론이죠. 트라이는 제가 이 탑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옆에서 제 손발이 되어준 친구인걸요?”
이 탑에 들어왔을 때부터라.
“보좌관 님은 플레이어십니까?”
“네, 플레이어예요. 하지만 여러분과는 다르죠.”
여러분?
제로 바니스타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 시선에 보좌관이 웃었다.
“리한도 같이 왔죠?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요?”
의외로 순진하네.
글러트니의 보좌관, 멀린 아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저 남자는 정체가 뭐지?’
‘리한’이라면 분명 유리한을 가리킬 터.
하지만 누가 그녀를 그런 식으로 부른단 말인가? 디에스 라고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었다.
그야, 유리한은 탑을 오르는 모든 플레이어가 우러러보는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글러트니의 보좌관은 가까운 친구라도 되는 듯 친근하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제로 바니스타가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멀린 아서.”
위대한 대마법사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는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으며 미소를 그렸다.
“유리의 친구예요.”
제로 바니스타는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멀린 아서.
그 이름의 위대함을 익히 들어본 제로 바니스타였다.
하지만 죽었다지 않았나?
니르로르를 막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를 희생시켰다고 들었는데.
“거짓말…….”
“디에스랑 똑같은 반응을 보이네요? 리한도 그렇게 나오려나? 아니지, 리한이라면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네.”
그 말과 함께 성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멀린 아서가 썰다 만 스테이크에 다시 손을 대며 입을 열었다.
“드세요, 백작.”
제로 바니스타가 더욱 놀라 멀린 아서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멀린이 웃으며 말했다.
“리한이 오기 전에 같이 식사 좀 하죠? 아무래도 이게 제 마지막 만찬이 될 것 같아서요. 물론, 죽을 생각 따위 없지만.”
제로 바니스타는 그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