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 * *
쿠우웅―!
지하가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다. 제이미가 기둥 하나를 붙잡고 소리 질렀다.
“그렇게 무식하게 파괴했다가는 성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그거 좋네요.”
유리한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병사를 제압했다.
“요한.”
“네, 유리한 씨.”
“지하에 있는 실험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유리한과 함께 연구 시설을 파괴하고 있던 고요한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어처구니없어하는 제이미에게 유리한이 말했다.
“제이미 님, 이해가 안 되죠?”
“네, 안 됩니다.”
제이미가 곧장 대답했다.
“보좌관 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습니까?”
“당연히 가만히 안 있겠죠.”
유리한이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제이미가 붙잡고 있던 기둥을 파괴했다.
“으악!”
제이미가 비명을 질렀다. 유리한이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서 멀리 내던졌다.
우르르!
바로 그때, 제이미가 있던 곳으로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미, 미친.”
제이미는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서 욕을 내뱉었다. 유리한이 저를 내던지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거다.
- 뾰족귀야, 놀랐느냐?
“흐악!”
제이미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펄쩍 뛰었다. 그의 가까이에서 날갯짓하던 니르로르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 간이 작구나.
“암만 간이 큰 녀석이라고 해도 이런 광경을 보면 놀랄 겁니다!”
유리한은 실험이 이뤄지던 장소를 혼자서 파괴하고 있었다.
실험체를 가둬두던 유리 상자는 산산조각을 내버렸고, 실험체에게 마력을 주입하던 장비는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물론, 그녀를 막고자 하는 이가 여럿 있었다.
“으아악!”
“죽어라!”
당장 지금도 그녀를 향해 글러트니의 병사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한은.
“커헉!”
그들을 너무나도 쉽게 제압했다.
뚝뚝, 창을 타고 피가 떨어졌다. 유리한이 가볍게 창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냥 도망치면 목숨만은 살려줄 텐데.”
유리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들 이렇게 목숨 아까운 줄 모를까?”
정말 안타까웠다.
물론, 그 마음과는 별개로 유리한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는 모조리 죽여버렸다.
푹, 푸욱!
살갗을 꿰뚫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린 후에야 실험실을 지키고 있던 마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흐아아악!”
“괴, 괴물이다!”
마족들의 비명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괴물이라니, 너무하네.”
괴물은 저들이지 않은가?
같은 마족도, 그리고 인간도 끔찍한 실험으로 유린했다.
어쨌거나 금방 방해꾼들이 사라졌다. 유리한은 창을 크게 휘둘렀다.
콰과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실험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 한가운데에서 유리한만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멀리서 니르로르와 함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제이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저 인간은 도대체…….”
- 유리한이다.
“네?”
- 유리한이라 말했다.
니르로르가 그녀의 모습을 붉은 눈에 꼭 담으며 말했다.
- 저 인간은 짐의 계약자이자 짐을 죽였던 유리한.
그가 씨익 웃었다.
- 한낱 인간 따위가 아니다.
왜인지 모르게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제이미는 생각했다.
어쨌든 간에 상황 종료.
그런데 보좌관은 실험실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도망친 건가?”
제이미가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을 유리한이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멀린 아서가 도망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거다.
유리한이 위로 뚫려 있는 천장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보좌관 님이 말입니까?”
“네.”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 아서라면 자신이 이 성에 침입한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제이미 님.”
유리한이 물었다.
“당신은 왜 글러트니 님을 배신하려고 하는 건가요?”
“글러트니 님을 배신할 생각 따위 없다고 했을 텐데요!”
제이미가 빼액 소리 질렀다.
“저는 그분을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 인자하고 상냥했던 군주로요!”
그렇기에 제거 대상은 글러트니가 아닌 그의 보좌관. 자신의 주인을 타락시킨 바로 그자였다.
“아하, 그랬었죠.”
유리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런데 바로잡을 수 없다면요?”
“네?”
후우웅―!
위쪽에서 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내, 쿵!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지하에 들이닥친 존재가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군주를 바로잡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유리한이 가볍게 창을 휘두르며 먼지를 걷어냈다. 시야가 탁 트이자 제이미가 두 눈을 잘게 떨었다.
“글러트니 님……?”
글러트니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영롱하게 빛나고 있던 두 눈에선 초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이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글러트니 님! 저 제이미입니다! 글러트니 님!”
하지만 그에게는 제이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죽었어요.”
“네?”
“죽었다고요.”
글러트니한테서는 어떤 생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말 다 했지.’
그러니까 이자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언데드처럼 말이다.
“어떻게…….”
제이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분명, 분명히 살아 계셨는데.”
자신이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안내해 주겠답시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죽었다는 말인가?
제이미가 부들부들 떨다 주먹을 꽉 쥐었다.
“보좌관의 짓입니까?”
“아마도요.”
유리한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마 글러트니 님은 오래전에 죽었을 테죠. 그 몸을 보좌관이 제멋대로 움직였을 거고요.”
멀린 아서는 그럴 만한 실력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 생명이 암만 마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터인데.
‘변했어.’
너무 변해버렸다.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이딴 실험을 저질렀을 리가 없지.’
유리한이 입매를 비틀었다.
“자,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그 질문에 제이미가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당신의 군주가 보좌관의 손에서 놀아나는 걸 보겠어요? 아님, 제가 죽여드릴까요?”
제이미가 금방에라도 울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이미는 후자를 선택했다.
유리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땅을 박찼다.
글러트니의 텅 빈 눈에 돌연 이채가 도는가 싶더니.
“크아아악!”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윽!”
글러트니의 고함에 맞춰 돌풍이 불었다. 그 바람에 유리한이 반쯤 부서져 있던 기둥에 그대로 처박혔다.
- 유리한아!
“나 괜찮아! 너는 제이미 님이나 보호하도록 해!”
니르로르가 안절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면서도 그녀의 말을 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제이미가 그러지 않았다.
- 뾰족귀야, 어디를 가느냐!
니르로르의 방어막을 뚫고서 나가버린 거다.
- 유리한아! 뾰족귀 녀석이 도망쳐 버렸느니라!
“도망친 거 아닐걸?”
유리한이 글러트니에게 창을 겨누며 말했다.
제이미는 분명 군대를 일으키러 갔을 거다.
보좌관을 치기 위해 말이다.
‘소용없을 텐데.’
유리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린 아서라면 그가 일으킨 군대를 손쉽게 제압할 터.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빠르게 글러트니를 처치하고 제이미에게 합류한다.
유리한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후, 글러트니를 향해 땅을 박찼다.
“크아아아!”
글러트니가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유리한은 그에게 창을 내던지고선 글러트니의 모든 감각을 빼앗아 버렸다.
그래 봤자 이미 죽은 몸.
감각을 빼앗겼다고 한들 글러트니가 당황해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되는 대로 폭주를 시작했을 뿐이다.
쿵, 쿠웅!
파괴된 실험실이 더욱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니르로르!”
유리한이 글러트니의 공격을 피하며 그의 팔을 베어냈다.
촤악!
흩뿌려지는 피에도 글러트니는 계속 날뛸 뿐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지하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도망쳐! 요한에게로 가!”
- 싫다!
니르로르가 고집을 피웠다.
- 너를 두고 갈 수는 없다!
“고집 피우지 말고 어서 가!”
유리한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죽을 것 같아?”
니르로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 고갯짓에 유리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 안 죽어.”
이 탑의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 죽을 수 없다.
적어도 멀린 아서.
자신의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어서 가!”
유리한이 버럭 소리 지르며 재차 창을 휘둘렀다. 가슴팍이 길게 베인 글러트니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쿠구궁!
동시에 실험실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니르로르, 어서!”
유리한이 비명을 질렀다.
니르로르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실험실을 빠져나와 고요한에게로 향했다.
그가 어디 있는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성에서 가장 큰 마력을 쫓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 고요한아!
“니르로르 씨?”
유리한의 부탁에 따라 실험체들을 대피시키고 있던 고요한이 놀란 눈으로 드래곤을 반겼다.
“유리한 씨는요?”
- 저 안에 있느니라.
니르로르가 금방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횡설수설했다.
- 절대로 안 죽는다고, 그러니까 짐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고요한이 그 말에 미간을 좁히던 찰나.
우르릉, 콰광!
글러트니의 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요한이 두 눈을 살짝 떨었다.
“유리한 씨.”
유리한이 아직 저 안에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제로 바니스타도, 디에스 라고도 아직 성안에 있었다.
“안 돼.”
유리한이라면 무사할 거다.
제로 바니스타와 디에스 라고도 무사할 터였다.
그들 모두 고요한보다 강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탑에서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니까 분명 무사할 텐데.
“안 돼!!”
왜일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