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 * *
“후우.”
유리한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 있었다. 옆구리에 크게 상처가 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빌어먹을.’
분명 어둠을 지배하는 자(S)를 사용해 대비했다고 생각했건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유리한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윽.”
벌어진 상처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글러트니를 아직 쓰러뜨리지 못했으니까.
“으… 으으…….”
글러트니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유리한을 쳐다봤다.
초점이 흐린 눈인데도 글러트니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불쾌했다.
“글러트니 님.”
유리한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음을 알았다.
시체가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이미 죽은 자라고 해도 한때 살아 있었던 사람이다.
‘아니, 마족이지.’
어쨌거나 유리한은 글러트니를 쓰러뜨려야만 했다.
이미 죽은 그를 말이다.
유리한이 작게 숨을 들이마신 후 땅을 박찼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글러트니가 고함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유리한이 가볍게 그것을 피하며 창을 들었다.
푸욱!
그녀의 창이 글러트니의 심장 부근을 깊숙하게 찔렀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글러트니가 유리한의 창을 잡아 뽑아낸 후 그대로 내던졌다. 창을 쥐고 있던 그녀가 바닥을 굴렀다.
“윽……!”
옆구리의 상처가 더 벌어진 것 같다. 유리한이 작게 앓는 소리를 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멀린, 너는 도대체.’
유리한이 두 손을 꽉 주먹 쥐며 이를 갈았다.
분명 심장을 파괴하면 글러트니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유리한은 지금 같은 상황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적의 심장을 부수며 상황을 타개했던 유리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먹히지 않았다.
‘멀린이 수를 쓴 거겠지.’
그라면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을 테니.
유리한이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시야가 흔들렸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유리한이 옆구리를 부여잡고선 몸을 일으켰다.
글러트니에게 ‘오감 지배자(A)’는 소용이 없었다. 하긴, 이미 죽은 사람의 감각을 차단해 봤자 뭐가 달라질까?
‘차라리 오감 지배자(A)를 나한테 사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유리한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의 다른 힘을 풀었다.
그녀의 주위로 그림자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글러트니를 휘감아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으으…….”
하지만 글러트니는 자신의 몸이 그림자에 의해 사로잡힌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유리한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땅을 박찼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옆구리에 난 상처에서 울컥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글러트니에게 달려들며 있는 힘껏 창을 휘두를 뿐.
고통에 앓는 소리를 낼 여유 따위 없었다.
촤아악!
잘린 글러트니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뺨에 튄 붉은 것에 유리한은 이를 악물었다.
죽은 사람의 몸을 이런 식으로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글러트니를 멈추려면 이렇게 해야 했다.
심장을 찔러도 소용이 없다면, 머리를 파괴해야 하니까.
“으으.”
그래, 머리를 파괴해야 한다.
유리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창을 들었다.
푸욱!
글러트니의 미간에 그녀의 창이 정확하게 꽂혔다. 그런 후에야 글러트니는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스르륵.
힘을 거둔 유리한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녀가 이상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지만.
“……!”
이미 늦은 때였다.
머리를 잃은 글러트니가 유리한을 덮쳤다.
“컥!”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망할!’
글러트니를 쓰러뜨렸다고 힘을 풀면 안 됐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멀린 아서의 생존을 실감하자 이성이 살짝 마비된 기분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크윽!”
유리한이 그림자를 움직여 글러트니의 사지를 꿰뚫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목을 조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커헉!”
숨이 점점 막혀온다.
유리한이 어떻게든 글러트니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안 되는데.’
이대로 의식을 잃을 수는 없다. 죽을 수도 없었다.
유시우와 유서아.
하나뿐인 동생이 남긴 가족을 다시 만나러 가야만 했다.
유리한이 두 눈을 번뜩였다.
두 손을 떼어낼 수 없으면 그냥 양팔을 떼어내면 된다.
그림자를 이용해서.
유리한이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그림자를 움직이려던 순간.
촤아악!
글러트니의 어깨 아래가 깔끔하게 잘렸다.
쿵!
그가 마침내 쓰러졌다.
유리한의 목을 힘주어 조르던 손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쿨럭!”
유리한이 기침을 터트렸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공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이성을 챙겼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도와줬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유리한이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먼저 보이는 건, 달빛에 반짝거리는 귀걸이.
태양을 형상화한 그것에 유리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디에스……?”
유리한을 구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디에스였다.
“디에스!”
역시 무사할 줄 알았다. 그라면 무너지는 성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왔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디에스?”
뭔가 이상했다.
유리한의 부름에도 디에스 라고는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그녀에게 괜찮냐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말이다.
“디에스, 왜 그래?”
묻는 말에 디에스 라고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디에스!”
유리한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길에 디에스 라고가 움찔 몸을 떨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유… 리…….”
고통에 잠긴 목소리에 유리한이 다급하게 물었다.
“맞아, 나야. 왜 그래? 어디 아파? 다치기라도 한 거야?”
“물러, 나라.”
“뭐?”
“물러나, 유리.”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윽!”
도대체 오늘 몇 번째 흙바닥을 구르는 걸까?
유리한이 얼굴을 구기며 상체를 일으켰을 때.
“으아아악!”
디에스 라고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번쩍!
그러자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인가 이 폭발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력 폭주.’
그래, 이건 분명 마력 폭주였다.
* * *
“아아, 디에스라면 분명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쿠구궁!
굉음이 들려오는 쪽을 보며 멀린 아서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것 같네.”
멀린 아서가 싱긋 웃었다.
“그보다 괜찮으세요, 백작?”
멍하니 폭발을 보고 있던 제로 바니스타가 깜짝 놀라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성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멀린 아서가 펼친 마법 때문이었다.
“그보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시다시피.”
멀린 아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디에스가 무한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고 말았어요. 뭐, 성이 무너진 건 그 때문이 아니지만요.”
“폭주라니요?”
애초에 디에스 라고는 무한의 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무한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고 말았다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멀린 아서는 친절하게 말해줬다.
“디에스를 데리고 실험을 하나 진행했거든요. 당신들이 지한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제로 바니스타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유지한 님을…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멀린 아서가 작게 웃었다.
“리한의 동생을 제가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그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의 실험은 정말 흥미롭게 봤어요. 아라가 가지고 있던 열등감을 살짝 부추겨만 줬는데 그런 실험을 할 줄 몰랐죠.”
덕분에 자신도 편하게 길을 만들 수 있었다며 멀린 아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로 바니스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라.
그건 센터의 협회장이었던 자의 이름이다.
주아라가 유리한의 동료였던 건 제로 바니스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멀린 아서가 그 실험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열등감을 부추겼다니?
제로 바니스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설마, 당신이 그런 겁니까?”
“뭐를요?”
“유지한 님의 실험 말입니다.”
제로 바니스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이 계획한 거냔 말입니다!”
멀린 아서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로 바니스타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광의 주인들이 모여 자행했던 실험이, 사실은 멀린 아서의 계획이었다니.
그야말로 그의 손에 놀아난 기분이었다.
멀린 아서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상황이 퍽 재미있다는 듯 말이다.
그가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참 신기하지 않아요?”
백작은 멀린 아서에게 무엇이 그리 신기하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멀린 아서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했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기꺼이 윤리를 저버리는 사람들이요. 뭐, 저도 별반 다름없으려나요?”
하하.
멀린 아서가 폭발이 일어난 쪽을 보며 즐겁게 웃음을 터트리자, 백작이 힘겹게 물었다.
“당신은 유리한 님의 동료이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제로 바니스타는 묻는 대신 말을 삼키며 멀린 아서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멀린 아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저는 유리가 계속 부러웠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녀의 힘을 얻기 위해서.
“당신이라면 이해하지 않나요?”
“아니요.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요.”
“백작이라면 분명 제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었는데 말이죠.”
그러더니 멀린 아서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트라이.”
그 이름을 듣자 제로 바니스타가 흠칫 놀랐다. 멀린이 그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명령을 내뱉었다.
“네가 백작님께 잘 좀 설명해 드리지 않겠니? 나란 사람에 대해.”
“네, 스승님.”
제로 바니스타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트라이.
친구가 멀끔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백작의 눈이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