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화 (2/324)

2화

<대참사의 생존자>

사람들이 보인다. 간간히 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복장.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성들, 얇은 천으로 몸을 가린 갈색 피부의 여성들….

그것은 인도 뭄바이의 모습이었다.

‘또 이 꿈인가’

단번에 꿈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매일같이 꾸어왔던 꿈. 지겨울 정도로 꾸어서 전개를 모조리 외워버린 꿈. 이것은 10년 전, 뭄바이에서 양친을 잃어버렸을 때의 꿈이다.

시각은 1차적이다. 어릴 적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이 보인다. 자신의 양옆에는 양친이 있다. 둘은 즐거운 얼굴로 사방을 돌아다닌다. 일찍 결혼한 부부다. 10살짜리 아들이 있다 해도 해외의 관광은 특히 즐거울 터다. 결혼기념일을 겸하는 것이니 더더욱.

‘이 다음에 옷을 사던가’

그와 양친이 옷가게로 들어간다. 붉은 색 천의 쫄리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어린 그에게도 사리를 입히려 드는 것은 언제 봐도 이상하다.

‘이 다음은 음료수.’

옷가게에서 나온 그들은 사탕수수 주스를 사서 각자 입에 하나씩 문다.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날씨니, 목이 탈만도 하다. 이걸로 해갈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이 다음이었지….’

시장가의 중앙쯤에 도착했을 즈음, 갑작스레 새들이 날아오른다. 판매를 위해서 진열되어있었던 동물들은 다급히 우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 소리를 낼 수 있는 동물들은 무엇 때문인지 크게 울부짖는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놀란 양친과 그가 멈추어 섰을 때.

‘크윽!’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그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꿈이기에 감을 수가 없다. 어릴 적의 자신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기에, 그 눈으로 꿈을 보는 그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서운 광경.

사람들이 쓰러진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양친 역시 여지없이 땅을 향해 몸을 떨군다.

사람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 역시 사라진다. 성당이, 아스팔트가, 집이, 상점이, 심지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마저도. 마치 지우개로 지워지는 것처럼 점차로 사라져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린다.

오직 건물이 사라져버려서 고층에 있던 사람들이 박살나버린 시체들과 우리에서 풀려나 도망가는 동물들만이 그곳에 인간이 만들었던 것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인간 본연의 모습인 알몸으로 돌아간 인간의 시체들만이 보인다. 인구가 많았던 만큼, 건물이라는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사라지니 인간의 시체가 지평선 끝을 뒤덮는 듯하다.

‘…하아.’

그는 약간은 괴롭지만 담담하게 그 참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봐온 이 참사는 분명 그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지만, 지금은 눈을 뜨고 그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트라우마가 된다 해도 상당히 극복한 상태란 말이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꿈은 계속해서 꾸게 된단 말인가 적어도 꾸는 횟수라도 줄어들어야 할 것 아닌가 어린 아이였던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인간으로 매워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 꿈은 이것으로 끝이다. 언제나 저렇게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가 끝난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인간이 모두 죽어버린, 도시였던 이곳에는 아무 움직임도, 아무 소리도 없다. 시간이 흐르는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는 끝없는 정적. 그는 그 속에서 그저 있다가, 그래. 그저 서있는 것으로 정적에 짓눌려 기억이 꺼진다.

그랬어야 했는데.

‘어’

시각을 희롱하는 아지랑이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나 멀어서 그저 검은색의 점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13개의 인영. 너무나 멀어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해도 당시의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뭐지’

그 인영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아무 이유도 없이 불쾌함이 느껴졌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난다. 눈에 비치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참을 수가 없다. 그래, 모든 것은 저 녀석들 때문이다―

‘뭐야…, 대체….’

인영들은 얼굴이 보일 정도의 거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어째선가 그들의 모습은 멀리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게만 보였다. 얼굴과 몸의 윤곽선만이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들은 그저 검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무언가를 외쳤지만, 그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그에게 매미의 울음소리 마냥 왱왱대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뭐라는 거야….’

왱왱왱왱-.

‘뭐라는 거냐구….’

왱왱왱왱-.

“뭐라는 거냐구!!!”

“천후야.”

“으…으으….”

“영천후.”

“아아악!”

벌떡! 찢어지는 고함을 내지른 그는 튕기듯이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몸놀림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야수를 연상케 할 정도의 날렵함인지라, 상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체 덮쳐져버렸다.

그렇게 말을 걸어오던 이를 쓰러뜨린 그는 상대의 가슴과 어깨를 눌러 움직임을 제압하고는 충혈된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그의 모습이 익숙한 것인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우리 천후도 많이 컸구나. 이 누나를 이런 식으로 다루다니.”

“후욱…. 후욱…. ……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 영천후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상황파악을 했다.

그가 있는 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료작업용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기계들과 수술장비가 보였다. 그리고 그가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도…. 살짝 고개를 들어보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커다란 유리창이 보였다.

거기까지 돌아보고서야 천후는 메디컬 룸에서 보디 체크를 실행하면서 잠들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몸 여기저기에 전극이 붙어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우리 천후도 참…. 바로 뒤에 자기가 누워있던 침대가 있는데도 멘 땅에서 덮치다니. 물론 누나는 짐승 같은 남자도 싫어하진 않지만….”

“아 앗! 죄, 죄송해요, 미연이 누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천후는 흠칫하며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미연이라고 불린 이지적인 인상의 그녀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체 가슴에 닿았던 손을 잡고는 꾹 하고 끌어당겨왔다.

뭉클. 흰색 가운과 그 안쪽에 스웨터를 입고 있음에도 감촉이 여과 없이 전해져왔다. 조심스레 유도하는 손길에 중지 두 번째 마디에 다른 곳보다 솟아올라 있는 곳이 느껴졌다.

“뭐, 뭐하는 거예요”

“후후. 손이 얼마나 커졌는지 보고 있었지.”

그 행동에 천후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을 마주보던 여자는 잠깐 동안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리더니, 입 꼬리만 슬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응. 배에 딱 붙어있군. 좋은 때야. 그쪽 기능도 정상이군.”

“ ! 아. 진짜. 장난 그만쳐요! 언제적 장난을 하는 거야!”

무슨 소린지 몇 초 지나서야 알아들은 천후는 제압당하지 않은 다른 한쪽 손으로 필사적으로 아침 수탉의 울부짖기 직전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목처럼 곧추선 그것을 가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은 여자는 그의 손을 풀어주고는 스윽 하고 몸을 돌렸다.

그 사이에 빠르게 침대의 이불로 응급처치를 마친 천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전신 메디컬 체크를 하느라 완전히 알몸으로 잠들어 버렸었는데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이 누나는 언제든지 환영이란다. 천후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침대에서 2차전….”

“아, 정말!”

버럭 하고 소리 지른 천후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이고는, 양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서 귓가에 입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계속 그런 소리하면 저도 안 참아요, 누나…!”

“아…. 장난이야, 장난. 그러니까…비켜줄래 조금 무서운데….”

“…….”

눈을 가늘게 뜬 천후는 천천히 물러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지적인 인상의 여자였다. 날카로운 눈매 덕에 그냥 보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데, 제대로 보정이 되기는 할까 싶은 폭이 좁은 사각 렌즈의 안경이 합쳐지며 더욱 그런 인상을 준다.

거기에 백색 가운이 조합되니 깐깐해 보이는 느낌을 피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와 마주보고 있는 눈빛에는 조용한 포용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긴 머리를 올려 묶은 당고머리 덕에 이목구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데도 누구를 붙여놔도 꿀리지 않을 만한 미녀.

가운 안쪽에 입은 붉은색의 스웨터와 검은 미니스커트. 그리고 그 아래로 쭉 뻗어진 다리를 감싸는 검은 스타킹까지 합쳐져 조금은 요염한 느낌도 났다.

이런 여자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이렇게 침대 옆자리에 앉아서 허벅지를 짚어온다면 그 어떤 남자라도 흑심이 동하리라 하지만….

“또 그 꿈을 꾼 거니”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더 이상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 섞인 목소리로 그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물어왔다. 어릴 적부터 받아왔던 손길이다. 천후는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네…. 아시잖아요. 매일같이 꾸는 거. 신경 쓸 거 없어요. 이제 와서 무슨….”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저도 이제 스물인데. 멀쩡해요.”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부여잡은 천후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지만, 미연은 더더욱 고운 눈을 짙게 내리깔았다.

그녀가 그를 알게 된지 10년이 지났다.

허리춤에나 올까말까 하던 꼬맹이가 자라, 이제는 키가 180이 되어서 올려다봐야만 하게 됐다. 몸도 다부져서, 옆에서 이렇게 앉아있으면 뚜렷하게 나와 있는 근육들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을 문득문득 느끼곤 한다. 가끔씩 진짜 만져보기도 하고….

하지만 10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이것이리라.

대참사.

인구 약 1200만 명의 대도시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영천후는 그 사건에 영혼이 사로잡혀 있었다.

매일같이 그날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꾸며, 절대 그 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늘 아침마다 이렇게…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아닌 척, 강한 척 하고 있지만, 10년간 봐온 동생이다.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너의 잘못이 아닌데…. 살아온 게 뭐가 나쁘단 거니’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은 그에게 아무런 위로,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는 아마 평생 동안 저 아픔을 안고가리라.

그것이 안쓰러워진 미연은 조용히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와,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품어 안았다.

“웁! 누나…”

“…천후.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해”

“네….”

기억 못할 리가 없다. 지난 10년간…꿈에서도 바라왔던 날.

“이곳을…떠나는 날이죠.”

“그래…. 오늘부터 너는 자유야.”

10년. 영천후는 10년 동안 대참사의 유일 생존자라는 이유로 한 단체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다.

말은 보호이지만, 그것은 격리에 가까웠다. 한정된 사람을 만나면서 대참사에 대한 의견을 듣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유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약을 먹고,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고….

그렇게 살기를 10년이 지나서야 단체의 보호가 풀린 것이다.

이미연은 그 10년간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그의 귓가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제 널 속박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비록…그날의 기억은 잊지 못하겠지만…너를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오늘을 기뻐하렴. 아마…그 분들도 그걸 바랄 거야.”

“…네.”

“그러니까 오늘은…좋은 것만 생각하자. 알았지”

“네…. 근데 누나…. 저 이제 진짜 괜찮아 졌으니까…. 그만….”

“응 아…….”

그녀 덕에 기운은 차렸지만, 그러자 지금 상황이 얼마나 남세스러운 것인지 깨달은 천후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오히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는 그대로 무게를 앞쪽으로 주어서 그를 눕혀서 몸 위에 딱 달라붙어 누워버렸다.

그 순간, 허벅지 아랫부분에서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와 닿는 것을 느낀 미연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려서 그것을 가늠해보곤 속삭였다.

“…천후 정말로 남자가 다됐구나”

“안 참는다고 했어요!”

천후는 더 이상 농락당할 수 없어 굳어있던 손을 움직여 단숨에 그녀의 양 둔부를 꾹 하고 눌렀다.

“하앗!”

그와 동시에 뜨거운 기운이 더더욱 치솟아 오르면서 얇은 옷감을 압박한다. 그 감촉에 잠깐 움찔했던 그녀는 그의 손을 찰싹하고 때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한테 못하는 게 없니!”

“그러는 누나는….”

그 말엔 미연도 할 말이 궁한지, 어물거리고 있다가 그저 눈을 째릿 하고 흘기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 곧 그 문에 기대어 키득키득 웃으며 엄지와 중지를 쫙 벌려보았다.

조금 모자라려나 살짝 진홍빛 혀로 입가를 양 입술을 적시며 고소를 지었다.

“많이 컸네. 정말 잡아 먹어버릴까 남 주긴 조금…아쉬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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