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5화 (5/324)

5화

<백옥무정의 서포터>

면접 후, 최악의 면접을 치룬 천후는 면접장 건물 1층 로비의 자판기 앞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의자에 주저 앉아있었다.

결국 백수가 되버렸습니다. 이얏호!

새장에서 나온 새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누구야? 그건. 조나단? 조나단입니까? 광속으로 나는 갈매기 같은 겁니까?

“으아아아아아….”

분명 오늘 온 15개 기업은 이 나라에 있는 디제스터 퇴치 기업의 대부분일 터였다. 마지막 면접을 봤던 면접관은 서양인이었으니까 외국계 기업도 좀 섞여있던 것 같았으니 몇 군데 더 있겠지만, 이미 소문은 쫙 퍼졌으리라.

영천후라는 허언증 환자가 있다고. 블랙리스트니까 조심하라고.

즉 취직 길은 영영 막혔단 소리다.

“사업허가 받고 프리랜서로 뛰어야하나….”

기업에 취직 못하게 된 이상 길은 이것뿐이지만…이건 이거대로 문제가 있었다. 말이 프리랜서지, 일리미네이터 활동은 혼자서 할 수가 없다. 법으로 정해진 일정 인원…그러니까 본인 포함 최소 3명을 안고 가야한다.

본래 고소득층인 일리미네이터가 벌어들이는 수입을 사회적으로 나누겠답시고 시행한 특별법이지만, 당장이 급한 천후에겐 자기 외에 두 명의 인건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 없고, 웃음 많은 그라도 긍정적으로 생각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쭈그려 앉아서 한숨 쉬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유그드라실에 다시 돌아가겠다고 해볼까?’

어차피 알아봐야할 일도 있으니 한 번 가보긴 해야 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좀 더 있다 가겠다고 하면 뭐라고 할 사람은 딱히 없으리라. 아니 오히려 환영하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만….

‘하…. 무슨 생각이야. 무슨 염치로….’

할 수야 있지만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오늘 아침에는 나름 배웅까지 받고 나왔는데. 게다가 아직 가보진 않았지만 유그드라실 쪽에선 그가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집까지 마련해 줬다고 들었다.

그렇게 수고를 끼쳐놓고 ‘면접 망했어요. 취직 안할래!’라고 하겠다고?

“하아아아아….”

필요하다. 리셋버튼이. 엄청나게. 그러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우울해진 마음을 어쩌질 못하고 그는 양 무릎을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그 때였다.

“일어나 계신가요?”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조용한 1층 로비. 발걸음소리조차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안에서…하나의 음성이 파고들어왔다.

낮고 기복 없는 목소리. 하지만 그런데도 음색이 고와서 똑똑히 귓가에 와 닿았다.

‘나한테 한 소린 아니겠지…?’

살짝 몸을 움찔했던 천후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목소리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건물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사박. 사박. 귓가를 간질일 듯한 작은 발걸음을 내며, 음색을 냈던 주인공은 천후의 앞을 좌에서 우로 스쳐 지나갔다.

그럼 그렇지 하고 다시금 침울해진 천후는 아랫입술을 꾸욱 물면서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러자….

“주무시고 계신 겁니까?”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말뿐만이 아니라 볼가에 차가운 무언가까지 함께 닿았다. 그 감촉에 화들짝 놀란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가듯이 몸을 기울였다.

“으앗?! 누, 누구세요?”

“…….”

숨을 고르며 바라본 곳에 있는 것은 새하얀 인상의 소녀였다. 보고 있자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얀 피부다. 사람이 피부가 저렇게 흴 수 있을까 싶은…혈관들이 들여 보일 것만 같은, 설원 속 토끼와도 같은 순백.

그것을 이마에서 타고 내려온 긴 흑단이 허리까지 가리며, 조막만한 얼굴에 몇 가닥 남아 미를 더한다.

그 사이에 또렷하게 떠있는 이채서린 흑진주 위엔, 폭포수 같은 흑단을 거슬러 올라 곱상하게 휘어 오르는 긴 속눈썹.

감히 마주보지 못해 고개를 내리면 유려하게 곡선 그리는 콧대와 미모의 화룡정점을 찍는 연분홍의 꽃잎이 살짝 벌어져있었다.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천후는 더 이상 눈을 맞출 수 없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흰 손. 섬섬옥수라는 표현이 이제 와서는 구태의연하다지만…그녀에게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때, 천후가 그녀의 미모에 자기도 모르게 홀려 감탄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는 조용히 다시금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 것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네?”

“유그드라실에서 말입니다.”

“아….”

그 명칭을 듣고 나서야 현실감각이 돌아온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그의 한쪽 손을 잡아오더니, 그 위에 무언가를 하나씩 올려놓았다.

“먼저…이건 유그드라실과 상시 통신할 수 있는 통신기입니다. 그리고 이건 천후님이 머무실 집 열쇠. 그리고 이건….”

“자, 잠깐잠깐잠깐잠깐.”

뭔가 하나같이 중요한, 원래는 자신이 가지고 나왔어야 마땅한 물건들을 건네주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천후는 끄응 하고 신음성을 내면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건 상황 정리가 조금 필요해보였다.

“일단 이거부터 대답해주실래요? 음. 당신은 누구고, 왜 이런 걸 다 가지고 있는 거죠?”

“…….”

진안의 질문에 표정변화 없이 몇 번인가 눈만을 깜빡인 그녀는 이내 고개를 작게 움직이고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보고서 그의 궁금증에 답해주었다.

“저는… 천후님의 서포터Supporter입니다.”

“서포터!”

일리미네이터는 무조건 서포터, 그리고 오퍼레이터가 함께 해야만 기업 내 팀이던, 개인 사업을 하던 할 수 있다.

그 중 서포터는 일리미네이터의 전투 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한 모든 활동을 보조하는 인력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운전만 하는 서포터도 있고, 혹은 전투에 직접 참가해서 도움을 주는 서포터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서포터라고 밝힌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저는 서포터 구인을 한 적이 없는데요?”

아니 애초에 지금 면접에서 떨어진 마당에 무슨 놈의 서포터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잠시 왼손으로 턱을 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조금 혼란스럽습니다만…. 일단 제 나름대로 하나씩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부디.”

“알겠습니다. 일단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을 잊고 있었군요…. 제 이름은 홍희주라고 합니다.”

“홍희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지인은 알지도 못하는데도.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진 미모에 놀랐었지만…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면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서 근거 없는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저 예뻐서일 수도 있지만…. 아니. 이런 것은 좀 더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떠오르는 잡념을 밀어낸 천후는 당장의 의문을 풀어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네. 그리고 오늘부터…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

머리가 아프다. 그렇게 느낀 천후는 사양하지 않고 이마를 양손으로 짚었다. 이건 대체 또 무슨 소릴까? 근처에 듣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이해하기 힘들게 말씀 드렸나요?”

네. 아주. 매우. 엄청나게. 입에서 바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막아낸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사람은?

“그렇습니까? 그럼…좀 더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오늘부로 당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가사일도, 재산관리도…남성으로서 풀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아니아니아니아니.”

그걸 설명하라는 게 아니야. 아니라고! 끄으응 하고 속 끓는 소리를 내지른 천후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홍희주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녀는 여전히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함께 눈을 맞춰왔다.

라보에서 구르고 구른 연구원이 몰모트를 다룰 때도 이것보단 감정이 느껴지리라. 그 모습을 보고서야 천후는 정말로 그녀가 방금 전의 그 말을 아무런 감정이나 의도를 품고서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그것대로 보통 일은 아니다. 순식간에 등골이 싸해진 천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그드라실에서 누나들에게 자주 당했던 장난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란 것을 깨달은 그는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듣기로 했다.

“이, 일단 질문을 바꿀게요. 희주…씨? 희주 씨를 누가 저에게 보냈고, 왜 보냈는지 알고 계세요?”

“네. 저의 전(前) 주인님은 고인규라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지상생활에 익숙하지 않을 거라면서 저의 소유권을 당신에게 양도하셨습니다.

“인규 형이?”

고인규. 유그드라실에서 영천후의 정신과 주치의 및 카운슬링을 맡았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유그드라실 내근직의 경우 여성비율이 높은 편이었는데, 그는 남자인데다가 젊어서, 천후가 어릴 적부터 형형 거리면서 잘 따르곤 했었다.

그의 집안은 재산가였고, 그 자신도 고수익자인지라 큰 저택에서 고용인을 쓴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녀는 그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희주의 이런 사무적인, 아니 반 기계적인 태도도 이해는 갔지만….

‘이건 너무 프로페셔널 하잖아….’

고용인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고용관계로 엮였을 뿐 사람간의 관계일 텐데, 그녀가 말하는 투는 마치 스스로를 물건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그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사실인지라 이런 도움을 주는 것도 기뻤지만, 그녀의 이런 태도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도 있었다.

“음. 희주씨. 그럼 제가 당신의 주인이라 이거죠?”

“네.”

“혹시, 이건 정말 혹신데. 제가 당신이 필요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저를 폐기하시겠습니까?”

“…….”

주르륵 하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해고도 아니고 폐기라니? 용어 선택이 범상치 않다. 게다가 이런 소리를 하면서 목소리 톤이나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당장 일자리를 잃게 생겼는데 이런 반응이란 건….

“으으으음…. 폐, 폐기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음. 그냥 필요 없다고 했을 때 이야기인데.”

“네. 폐기했을 때의 이야기로군요.”

“…그러면 어디로 가실 거예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겁니다.”

“머, 먹고는 살아야죠.”

“먹지 않을 겁니다.”

우와…. 조심스레 웃으며 물어보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린 천후는 숨이 턱 막혀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건…진짜 심하다.

한편 계속된 질문에 느릿느릿, 몇 번인가 눈을 감았다 뜬 그녀는 오른손을 가슴께에 올리며 물어왔다.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만…혹시 저를 폐기하려고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니∼요. 절대! 절대 아니죠. 하하핫!”

여기서 그렇다고 했다간 사단이 날 것 같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에 천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종합빌딩 1층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아사한 여성에 대한 내용의 뉴스 화면이 어른거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시체치울 순 없지. 입 안의 한약이라도 들이켠 듯이 쓴맛 나는 침을 꿀꺽하고 삼키며 마음을 정리한 천후는 그녀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으…. 알았어요.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드릴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그녀는 이번만은 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천천히 양손을 뻗어와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작다….’

천후는 자신보다 손가락 한마디는 차이나는 작고 고운 손의 감촉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너무 세게 만지면 부서지지 않을까 저어해하면서도, 계속해서 쥐고 있고 싶은…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 때였다.

“어이. 거기. 정장 입은 친구. 영…뭐였지. 하여간 성이 영씨 맞죠?”

“응? 네. 그런데요.”

악수치고는 좀 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천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 맞네. 시간 있어요? 시간 있으면 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음?”

시선을 향한 곳에는 3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약간 구부정하게 서서 내려 보고 있었는데, 천후와 희주를 번갈아보면서 묘하게 웃고 있었다.

“방금 면접 봤던 거 결과 알고 하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이번에 입찰…아니 면접 대상 기업에 들어가진 못한 회사 인사담당자고요.”

“아, 아 그래요? 희주 씨 잠시만 여기 있어볼래요? 저 잠깐 저분들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그러시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천후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려다, 뭔가 걸린 듯한 느낌을 받고는 멈춰 섰다.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어…. 희주씨? 소, 손을 놔주셔야 제가 갈 수 있는데….”

“…….”

희주는 천후의 말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의 손을 감싸 쥐고 있던 양손을 내려 보다가, 스르륵 하고 천천히…그의 검지의 손금 마디마디를 각인하듯 손으로 훑으며 이내 손을 때었다.

아쉬워하는 걸까? 하지만 표정을 보면 그런 기색은 역시 전혀 없다. 판별하기 힘든 사람이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지자 천후는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그럼 금방 갔다 올게요!”

“네.”

그들이 있는 계단 근처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던 그녀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자기 손을 내려보다가, 다시금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그를 올려보며 감미로이 속삭였다.

“다녀오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