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네? 희, 희주씨? 무슨 소리를…!"
천후는 당황하며 급히 물었지만, 희주는 단추 하나하나를 차근차근히 풀어나갔다.
그때마다 앞섶이 스륵스륵 열리며, 이윽고 살결만큼이나 흰 속옷이 드러났다.
"우왓!"
그것을 보고 천후는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수컷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욕망과의 밀당까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검지와 중지사이를 열고서 실눈을 뜨고 그녀의 행동을 계속 감상했다.
그동안 그녀는 상의를 완전히 벗고서 치마 허리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투둑.
작은 소리와 함께 천 쪼가리가 떨어져 내리고 그곳엔 백옥만이 남았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천후는 오늘의 어기적 포인트를 갱신했지만, 희주는 자신의 몸 위에 있는 인공물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는지, 등 뒤로 양손을 가져가 후크를 풀어냈다.
"꿀꺽."
자기도 모르게 욕실이 울릴 정도로 크게 침을 끌어모아 삼킨 천후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던 쇄골 아래 계곡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눈을 사로잡는다.
땀을 흘린 건지 아니면 서린 김 때문에 맺힌 수증기가 만들어낸 것인지… 계곡으로 향하는 입구에 맺힌 몇 방울의 물방울.
입으로 훑어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미약한 그것들이 조심스레 모여. 단 한번, 빠르게 흘러내린다.
또르륵.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물방울은 유려한 곡선을 따라 흐르다. 옷을 입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풍만함에 반한 듯이 그 속으로 쏙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괘씸한…! 당장이라도 양쪽을 거칠게 쥐고 벌려 녀석을 벌하고 싶지만, 그 순간 시선이 계곡 안에 바깥으로 흐르며 벚꽃 만발한 봉우리를 포착했다.
평소 행실과는 다르게 전혀 얌전하지 않게 부풀어 오른 두 산봉우리의 끝은 지금껏 이 산에 오른 이가 아무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땅에 깔린 벚꽃 길조차 분홍만이 가득했다.
그래. 마치… 이런 자신 위에 올라와달라고 유혹하듯이. 당신이 저를 더럽히는 첫 번째 사람이라고 속삭이듯이.
"츱."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나게 입술을 핥은 천후였지만, 이번엔 부끄럽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겨를조차 없단 게 맞으리라.
저런 것을 보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범하고 싶다. 엉망진창으로 범해서…나 말고는 다른 남자는 생각도 못하게… 만나지도 못하게 가둬놔 버리고 싶다.
'헉…!'
이게 무슨 생각이야? 스스로가 잠시나마 품었던 흑심에 깜짝 놀란 천후는 황급히 욕조 안에서 몸을 반대로 휙 돌렸다.
지금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보면… 분명 참지 못할 거라 천후는 직감, 아니 확신했다.
그러나 천후의 그런 행동도 덧없게… 이번엔 등 뒤에서 스으윽하고, 무언가가 길고 미끈하게 뻗은 것을 따라 내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직후.
틱.
작게 고무를 튕기는 소리가 들리자 천후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져서 급하게 소리쳤다.
"희희희주씨. 정말 잠깐만요! 이, 이런 건 아무나와 함부로 하는 게 아니-"
"서포터라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럴리가 있나! 속으로 소리쳐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는지 마침내 차박차박하고 물을 밟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으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한 천후는 마침내 자신이 생각해낸 마지막 수단을 입에 올렸다.
“씻는데에 희주 씨는 필요 없어요!”
제발 통하라고 염불외는 심정으로 소리 지른 천후는 그 순간 발소리가 뚝 그친 걸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통했나?!
그러게 생각했지만, 돌아온 다음 반응은 상상 외였다.
“저로선…부족한가요?”
방과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감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무심코 뒤돌아봤던 천후는 경악했다.
혹시나 했던 것처럼 그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인 것에도 놀랐지만…정말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지금까진 무슨 말을 해도 변화 없던 그 무표정 대신, 곱고 긴 아미를 미세하게 떨며 아랫곡선을 그리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유리알 같던 눈동자의 광점이 일렁이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닫히면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눈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후는 왠지 머릿속이 꽈르릉 울리면서,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강렬한 죄책감이 찾아와 죽어버리고 싶다는 자살충동을 건드렸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이성적인 생각이 어쩌구 하는 것을 바로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니, 아니예요. 필요해요. 엄청 필요해!”
“…그렇습니까?”
이번엔 눈썹이 아주 약간…자세하게 보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로 아주 작게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에 천후는 따라서 웃다가 아연실색했다.
‘내가 무슨 소릴 한 거야?’
세상에…. 결국 자기 입으로 알몸으로 몸을 씻겨줍쇼 하고 외친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단 걸 이제야 다시 자각한 그는 진정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삼각으로 움직여댔다.
그녀는 그동안 다시 물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손 이전에 다른 것이 그녀의 몸에 닿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서도 참을 수 있을까?
‘그럴리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천후도 파릇파릇한 20살이었다. 이미 몸은 전투태세를 완료하고 선두 병력을 총검돌격 시키자고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적 진영엔 저항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어서…아마 닿는 순간 백기가 꼽히리라.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덮칠까? 덮쳐버릴까? 하는 물음이 뇌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것에 그리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왜? 뭐하러 저항하지 하는 생각이 마구 일어났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아직 샤이한 20세 청년인 천후는 마지막 방어기제, 그러니까 이런…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먼저 하고 싶다는, 눈앞에 있으면 머리통을 망치로 세게 후려 치고 싶은 생각을 진심으로 떠올리면서 개미만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그럼 등 뒤에서 씻어주세요…!”
“그래선 재대로 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 이 말 자체가 체리군의 알량한 발상, 그러니까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닿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어린 청춘의 무의미한 발악에서 나온 것이니 논리라곤 있을 수가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지만, 천후는 그 순간 희주라면 먹힐지도 모를만한 논리를 생각해내고는 억누른 비명이 삐져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뒤에서 해주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그래요!”
희주의 논리에 의하면 서포터라면 응당 주인의 몸을 씻겨줘야 한다였지만…여기서 취향문제를 들이댄다면 어떨까?
“…그렇군요.”
과연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군말 없이 천후의 등 뒤로 돌아갔다.
몸은 씻겨줘야 하지만 주인의 취향은 존중해준다는 이 상냥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진심으로 고민됐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물이 나올 것 마냥 고마웠다.
이것으로 정조는 세이프! 내 것도 그녀의 것도! 윈윈전략 완성!
그러나 천후가 그렇게 속으로 승리선언을 외쳐대는 것도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욕조에 앉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키가 워낙 크셔서….”
아아. 과연.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욕조 턱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희주는 샴푸를 풀어서 그의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꾸욱꾸욱 하고 두피를 눌러주는 게 지금까지 쏠렸던 혈액까지 순환시켜주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아, 천후는 멍하니 그 손놀림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뭉클…하고. 머리 뒤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천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뭘까? 아니. 뭔지는 알고 있다. 이…머리의 샴푸를 씻어내 주고, 얼굴에 비누칠을 해주느라 닿는 팔뚝과 연결되는 부위라면 한곳 밖에 없다. 그것이…뒤통수에 닿았다가 천천히 미끄러 내려오며 양 목덜미를 감쌌다.
“…….”
똑. 똑.
코에서 색이 심상치 않은 액체가 떨어져 나오는 걸 왼손으로 틀어박은 천후는 온몸을 사시나무마냥 떨었다. 이건 위험하다. 도망 가야해.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하반신의 기동 포트리스는 점점 더 각도를 올리며 고각샷을 쏠 준비를 해대고 있었다. 이미 이 각도가 최대 사거리 각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기세다.
“추우신가보군요.”
그가 그렇게 덜덜 떨고 있자, 떨고 있는 이유를 완전히 착각한 그녀는 조심스레 팔을 활짝 펼쳐서 그의 몸을 꼭 하고 끌어안았다. 그 순간, 등 뒤의 말랑함이 극대화 되면서, 그 첨단의 각별한 감각이 민감해진 등을 통해 여과 없이 전해져왔다.
“끄…갸….”
고각샷을 준비하던 탱크는 주포 각도를 이윽고 최대치로 올려, 발사하면 자기 자신에게 포탄이 되돌아올 지경이 되었다.
입에서 뭐라 형언하기 힘든 이상한 소리를 흘려보낸 천후는 욕조를 짚고 있던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조금 더 참아주십시오. 추위를 이겨내는 것도 남자의 성숙함을 재는 척도입니다.”
추워서 떠는 게 아닙니다. 전혀 잘못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그 감각에 까무러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인내심의 극한을 발휘한 상태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몸과 손을 움직여 상반신에 거품형 보디워시를 전부 바른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이면서 옆으로 기울여 그의 허벅지와 종아리, 발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그동안 몸을 숙이느라 시야에 그녀의 상체가 조금씩 비추는 것은 필사적으로 외면했지만, 욕조를 짚고 있는 손에 뭉클한 끄트머리가 닿았다 떨어지는 것은 도저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식을 놓으면 그대로 손을 뒤집어 그것을 움켜쥐고, 이 욕조에 밀쳐 넣어버릴 것 같았다. 그것조차 이겨낸 그의 의지력이란 이미 초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이미 씻을 곳은 다 씻은 것 같다고 생각한 그 때. 그녀는 오히려 보디워시의 거품을 훨씬 꼼꼼히 내기 시작 했다.
‘뭐…지?’
그 대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손톱 끝의 세균까지 박멸하려는 듯 치밀하게 손을 움직여댄 그녀는 다시금 그의 등에 몸을 밀착해오더니, 귓바퀴에 입을 가져오고선 작게 속삭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
스윽…. 허벅지와 종아리를 만져오면서도 피해왔던 그 중앙부로 손을 가져간 그녀는 조심스레…정말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씻어내기 시작했다.
스윽스윽. 조물조물하고, 양손이 파트를 나눠서 실행하는 그 움직임에 천후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달렸다.
“아아아아아아!”
천후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내지른 그 순간, 그녀는 그의 귓바퀴를 입술로 한번, 꼬옥 하고 물었다 놓으며 약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금세 끝납니다. 참아주세요.”
“안…!”
그녀 나름대로의 책하는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완벽히 역효과였다. 지금까지 진군 명령만 기다리던 특공병력들이 그것을 지령으로 알아듣곤, 오랜 시간 대기하고 있던 둥근 대기실을 벗어나, 자신들의 전장으로 힘차게 뛰쳐나왔다.
“아……. 이건…….”
그 기세가 사뭇 엄청나 손끝으로도 울컥울컥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그녀는 잠시 멍하니 손을 멈췄다가, 조심히 전장 이곳저곳에 흩어진 그들 중 한 무리를 수습해선 소중히 입안에 담아보고는 무심코 말했다.
“쓰군요.”
“……! 으아아아아!!”
그 순간, 바로 방금 전까지 그의 안에서 들끓던 짐승의 감각이 아니라,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수치심에 휩싸인 천후는 그대로 얼굴을 감싸고 욕실에서 뛰쳐나와 버렸다.
세상에! 이럴수가!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차라리…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자빠뜨려 버릴껄! 그냥 그때 해치워버렸으면 차라리 오히려 그림이 낫잖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안 참느니만 못하잖아! 쪽팔려! 부끄러워서 돌아버릴 거 같아!
내가 뭐하려고 참았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아니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으, 으아아아아아!”
쾅쾅쾅! 거실까지 뛰쳐나와 벽에 머리를 몇 번이나 박은 그는 다리에 힘이 쭉 풀려서 소파에 주저 앉아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은 자신이 알몸인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더 이상의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2차전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