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진정하시지요.”
“천후 양친 재산이 좀 남은 게 있길레 그걸로 집값을 대신 했었지만, 양도 계약서상으로는 아직 완전히 넘어간 게 아니거든요? 희주를 데리고 있는 조건으로 그 부분을 탕감해주려고 했는데 뭐. 싫다면야.”
“싫다곤 한마디도 안한 거 알죠, 형?”
아니 애초에 계약서에 사인한 기억이 없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어차피 그 부분을 지적해봐야 불똥만 더 튈 것이 뻔히 보였다.
뭐 마음먹으면 계약금만 내고서 날아버릴 수도 있긴 하겠지만… 사회에 던져졌는데 내 집이 있고 없고 차이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면 뻐길 입장이 아니다.
취업이라도 했으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마치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한 것 마냥 컨트롤 당하게 생겼다.
“좋아요. 그럼 결정. 뭐 그냥 약간 의존증 있는 여자로 생각하면 되잖아요. 환자라곤 해도 그녀도 천후처럼 약물치료랑 정기적인 상담치료 정도나 받는 정도의 환자일 뿐이예요.”
정신과에서 그 이상의 환자라면 아예 병실에 들어앉아있는 환자 정도나 남는 것 같지만 닥쳐야겠지.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천후 자신도 매일 꾸는 악몽 때문에 주기적으로 약물을 투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걸로 책잡을 입장이 되지 못한다.
인규는 그렇게 천후를 몰아넣고 그로기로 만들어놓고는 좋아하다가, 뭐가 생각났는지 약간 들뜬 기색으로 물어왔다.
“아. 그런데…그럼 오늘 그녀랑 한 거예요?”
“…뭘요?”
“섹스.”
……. 천후는 잠깐 울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다가 간신히 감정을 수습했다. 거기선 좀 그거. 라거나 좀 더 우회하는 단어를 써줬으면 했는데 이 양반은 전혀 그런 걸 생각해주지 않았다.
심리학이나 정신과 수업을 듣다보면 리비도나 섹스 등의 단어는 뭐 거의 패시브처럼 안고가긴 한다마는…. 게다가 지금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또 이상한 요구를 해댈게 뻔하겠지.
“안했어요.”
“형한텐 거짓말 안 해도 돼요. 아. 지금 이거 카운슬링 겸하는 하니까 솔직하게.”
“…진짜로.”
“What…? 왜요? 안서요?”
미치겠다…. 다시 한 번 얼굴을 손으로 감싼 천후는 앓는 소리를 냈다. 보통 정신과 치료나 카운슬링이란건 좀 더…조심스럽고 그렇지 않나? 그런데 이 양반은 왜 이따위지? 아니 다들 이런 건가?
“서긴 서는데….”
“그럼 왜 안했어요?”
그러게요. 천후는 답변을 꾹 삼켰다.
그러고 보니 진짜 알 수가 없었다. 왜 안 덮쳤지? 처음은 소중한 사람과 하고 싶다…같은 생각을 안 한건 아니지만 그라고 무슨 성인군자가 아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10년 동안 돌봐준 누나한테도 발정했었지 않나? 희주가 그에게 한 짓은 정상적이라면 눈알이 뒤집혀도 모자를 판인데….
전화 받으러 나왔다지만 솔직히 거기서 전화 왔다고 그만 둔단 게 이상하지 않나? 전화를 안 받고 달리고 말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자신이 의도적으로 도망 나왔단 걸 확실히 자각한 천후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왠지 못하겠어요. 음. 왠지.”
이것은 이 시점에서 천후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대답.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인규의 목소리의 톤은 또 한 번 변했다.
“그렇군. 흠.”
평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는, 짧고 차가운 음성에 천후는 흠칫하고 소름이 돋았다.
“형?”
“…아. 뭐 첫경험하기 전에 종종 있는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요. 급하게 생각할 건 없지.”
“…….”
“하하하. 그럼 희주는 잘 부탁할게요. 뭔가 물어볼 게 생기면 연락하고. 저도 오늘 있었다는 일들 알아보고선 전화 다시 할게요.”
“네. 알겠어요, 형.”
인규 쪽에서 전화를 끊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천후는 잠시 미간을 짚었다.
“조금 이상한데….”
그의 마지막 태도가 조금 수상했다. 그저 심증이지만 약간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있는 걸까? 하지만 단지 저 반응만으로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냥 미연이라거나 다른 사람에게 몰래 소문내고 싶어 안달 난 바람에 저런 태도가 나왔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전과가 없는 것도 아니고.’
첫 자위를 했던 경험을 말했다가 유그드라실 전 여직원들에게 소문이 났었던 기억을 떠올린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희주 중 누구 관련으로 태도가 바뀐 건지 추론하는 게 불가능한 이상 소용이 없다. 잠이나 자러 가야지. 잠이나….
“…….”
천후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방문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저길 다시 들어가면…참을 수 있을까?
아니 참을 필요는 딱히 없고…잘 생각해보면 합의하에서 하는 일이고. 저쪽이 먼저 말해온 거고…. 그렇지만 왠지 걸렸다.
뭐라 말로 꼬집어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래선 안 된다고 채근하고 있었다.
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하면 안 될 거 같다라니. 이건 대체 뭘까? 10대 소년 감성도 이렇진 않을텐데. 인상을 찌푸린 천후는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문제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혀봐야겠다.
이런 정체 모를 감정에 휘둘리는 거 자체가 불쾌하니까.
*
안방으로 들어오니 희주는 천후가 나갔던 때와 똑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불을 전부 꺼두어서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으로 알 수 있었다.
“기다렸어요?”
“네.”
침대로 올라오며 묻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봐왔다. 하지만 그 기색은 나가기 전까지와는 조금 다르다.
약간 들뜬 듯, 기쁜 듯이 달아올라있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다시금 무표정으로, 아니 살짝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완전히 마주 못하는 것이 조금은 어둡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하려했던 행동이 부끄러운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천후가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벌려져있는 앞섶을 여몄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희고 흰 두 가슴은 풍만함을 자랑하는 호선을 그리며 여전히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가기 전 이불을 덮어씌우지 않았다면 그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겠지.
꿀꺽.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가 여과 없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못 참겠다. 반라인 그녀 옆에 이렇게 않자, 몸은 과도할 정도로 반응해왔다.
안아. 안아버려. 당장 쓰러뜨려서 네 것으로 만들어.
분명 그래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겠지. 하지만….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천후는 배게 하나를 집어 들고서는 일어났다.
“왜…?”
희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다가 말을 삼키며 엄지와 검지만으로 그의 옷자락 끝을 잡아왔다. 그의 힘이나 체격을 생각하자면 저항이라고도 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으로 천후의 움직임이 잠시 멎어버렸다.
“같이 자면 안 될 것 같아서. 나가서 자려고요.”
“…….”
일부러 조금 단호하게 말투를 꾸며낸 천후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방문 밖 쪽을 보았다. 지금 고개를 돌리면.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단숨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날이 춥습니다.”
“상관없어요.”
“그럼…차라리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소파 말곤 다 맨바닥인데 여자를 그런데 재울 순 없어요.”
“…….”
여기까지 말하자 옷자락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천후는 밖으로 나가려고했다. 하지만 그 때….
투둑.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소리가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단숨에 짐작해내고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천후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고운 턱선을 타고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제가, 제가 못나서…. 제가 부족한 탓에….”
“아….”
뇌가 타버릴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천후는 머릿속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듯한 감각을 맛보며 다급히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런 거 아니예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지만…주인님께서….”
“아니예요. 정말 아니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요. 네? 여자라고 그렇게 함부로 우는 거 아니에요. 치사하잖아.”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은 천후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다가,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손을 뒷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몸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가져와. 가슴에 품었다.
“아….”
품에 안긴 그녀는 낮은 탄성을 내질렀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양 어깨 아래쪽에 손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시간이 지나 가슴에서 느껴지던 물기가 멎었다 싶을 즈음, 천후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사실…조금 일부러 그래봤어요. 절대로…절대로 희주씨가 싫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다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
꼬옥하고. 어깨아래, 겨드랑이 근처에 올라간 손이 쥐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아니라…희주 씨가 너무 몸을…함부로 다루려고 하는 거 같아서. 그런 게 싫었던 거예요. 전…희주 씨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그래서 더 첫 단추는 재대로 끼고 싶어요. 서로 마음이 맞고 싶어요. 의무감이 아니라…. 좀…어린애 같나요?”
스스로 말하고도 부끄러워진 천후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그 말에 희주는 말없이 품속에서 고개만을 저었다. 그 때문에, 심장 고동이 조금 더 빨라졌다.
“우리…앞으로 오래 볼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건 좀 더 서로, 재대로 알고 난 후에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서로…싫어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언제해도 괜찮으니까 더더욱.”
흑단같은 머릿결에 고개를 묻어, 귓가에 속삭인다. 희주는 아주 작지만, 안고 있는 그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기뻐 천후는 밝게 웃으며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의 몸 위에 겹치듯 누운 그녀는 살짝 몸을 물러 옆으로 뻗은 오른 팔에 머리를 올려왔다. 그 모습에 참을 수 없어 귓가를 만지니, 그녀는 작은 숨소리를 내면서 몸을 꾸욱 기대왔다.
화악 하고. 지금까지 이상으로 살내음과 아직 남아있는 보디워시의 잔향. 그리고 여성 특유의 향취가 섞여 뇌리를 자극해왔다. 그것을 이제야 조금은 여유로워진 천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모두 받아들이며 토로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계속 이러니까, 솔직히 제어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저는…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상관없습니다.”
기복 없는 목소리. 하지만…이제는 다르다.
안색이 다르다. 말끔했던. 생리작용으로 달아올랐었던 그때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사랑받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암컷의 얼굴이 되어…부끄러움을 이겨내며 말하는 얼굴이 되어있었다.
얼굴보다도 붉은 입술이 부끄러움을 자각하듯 떨리고 있었다. 긴장했었던 걸까? 타액으로 훑은 듯 반질거리는 붉은 열매. 그것이 사랑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져가고 말았다.
“음….”
살짝 닿기만 하는, 가벼운 입맞춤.
“…제가 갑자기 덮칠지도 몰라요.”
“……네.”
흔들흔들. 유리알 같다 생각한 눈동자가 인간의 것이 되어서, 초점이 움직이며 떨린다. 홍조가 피어난 얼굴은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피어난 감정이 생소해서인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매만져보다가, 꼬옥 하고 품속에 파고 들어왔다. 그것을 받아들여주며, 천후는 자신 쪽에서 그녀의 허리춤과 허벅지 아래로 손을 돌려 감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미 폭발 직전인 남성이 그녀의 배꼽과 가슴 사이를 꾸욱 하고 찔러 들어간다. 그것을 느낀건지 그녀의 귓가가 새빨개졌다. 그것을 본 천후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절대 희주 씨가 싫은 게 아니에요. 저도 당장…하고 싶으니까. 알 거 같죠?”
끄덕이는 느낌을 받은 천후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이제야 조금…여자의 모습이 된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자신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괴물을 유혹하고 있단 걸 깨달았단 눈치다. 다행이다. 다행이지만….
‘범하고 싶다….’
이제야 조금 부끄러움을 자각한 이 여자를 아래에 깔고 신음 지르게 만들고 싶지만…. 바로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되돌릴 수는 없는 거니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천후는 그렇게 수그러들지 않는 욕망을 갈무리 하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에 의한 피로가 몰려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여자를 끌어안고 자는 건 기분 좋은 일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12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