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악연재회>
꿈.
꿈을 꾸었다.
꿈이라 하면 악몽이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지옥이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모든 사람들이 시체가 되는 꿈.
돼지 도축장이 인간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무기질적인 죽음만이 가득한 꿈.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만을 보아왔으니까.
“자장. 자장. 우리. 아가.”
꿈에 들어서기 전의 암흑 속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장가 소리.
그 음색에 묻어있는 감성이 느껴졌다. 이것은 애정이라 불러야할까? 아니. 명백한 단어가 존재한다. 모정이라는 단어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암흑 속에서 목소리만 들려왔다. 몽롱한 정신 속. 주변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이것이 몸에 닿은 다른 것임을 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눈을 뜨지 못한 것뿐임을 알았다. 아아. 과연. 이런 꿈인 건가?
처음이다. 어머니의 꿈을 꾸는 것은.
“…….”
눈을 뜨니 창 사이로 햇볕이 들고 있었다. 보통 새벽에 일어나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오랜만에…편하게 푹 잤다.
“응?”
잠시 꿈의 여운을 떠올리고 있던 천후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했다. 이상하다. 분명 어제 저녁까진 자신이 희주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일어나고 보니 얼굴이 가슴에 파묻혀있었다. 희주는 양팔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듯이 안고 있었다. 억지로 일어나면 일어날 수 있겠지만, 분명 그녀도 깨우게 되리라.
곤란해져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그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대답을 해주자 그녀의 팔이 풀렸다. 이건 이거대로 아쉽다고 생각한 천후는 잠깐 그대로 있다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상체만을 일으킨 그녀는 여전히 표정 없이…아니 아주 살짝 눈가를 구부러뜨리며 웃으며 물어왔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좀 목이 칼칼한데….”
“그럼 국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그녀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천후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다가가 그녀의 볼가에 입을 살짝 맞췄다.
“그럼 부탁할게요.”
“네.”
어느 때라도 고운 음색이지만, 그 속에서 아주 약간 더 기뻐하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천후는 그녀가 옷을 차려입고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완전히 나가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완전히 나를 위한 서포터일지도 모르겠네.”
악몽을 꾸지 않은 게 얼마 만일까?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는데…. 어릴 적 미연이나 다른 누나들의 품에서 잠들었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었다.
취향적으로도 그렇고….
“…자. 이제 그럼 이걸 어떻게 한다?”
천후는 아침을 맞이해서 성대하게 일어서있는 기둥을 내려 보고는 곤혹스런 미소를 지었다.
희주가 차려준 식사를 마치고 천후가 한 일은 자신의 현 재산 상태와 희주와의 고용계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일단 재산에 관련해선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천후의 재산은 간단하게 천후 양친의 상속금과 유그드라실에서 있던 동안 일하면서 모았던 돈. 그리고 유그드라실에서 받은 사회 정착지원금이었다.
이 중 상속금은 거의 대부분이 고인규의 집을 사는데 쓰였다. 서울 한 복판에 있는 이런 주택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전 집주인인 고인규가 천후에게 싸게 판 것이다.
아마 그가 이 집을 팔지 않았다면 천후는 유그드라실 직원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직 양도가 완전히 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준다니 넘어가고.
문제는 나머지였는데, 대충 2000만 원 정도가 나왔다.
“얼른 일을 찾아야겠군.”
집에 꼼짝 말고 박혀있으면 2000만원으로 꽤나 버틸 수 있겠지만, 경제활동을 하려면 그렇게 큰돈이 아니다.
디제스터를 단독으로 18체나 퇴치했는데 왜 이것밖에 없냐 싶겠지만…유그드라실은 기본적으로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다.
국제적인 지원을 받아서 그 활동이 유지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보자면 국제적으로 돈을 좀 많이 뜯어내는 자원봉사 단체에 가깝다.
그렇기에 유그드라실 직속의 일리미네이터는 거의 수입을 챙기지 못한다. 유그드라실 쪽에서도 이 부분을 알기 때문에 마법사들로 하여금 자영업이나 민간단체 취업을 유도, 알선하는 것이다.
돌아와서 이정도면 몇 달 정도 살아갈 순 있겠고, 작정하고 혼자 버티면 년 단위도 버티긴 하겠지만…. 문제는 지금 인건비 빠질 사람이 있지 않은가?
“저는 월급이 필요 없습니다만.”
“아뇨…. 그렇겐 안 되죠.”
천후는 일단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고용계약을 수정하려 했는데(고인규와 맺었던 해당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경악했다.
그녀는 정말 무보수로 천후에게 팔려왔던 것이다. 거의 무슨 인신매매 계약서 쓰듯이.
“미친….”
지금까지 고인규가 자기 돈이나 유그드라실 기금으로 그녀의 보수를 대신 내주고, 자신에게 서포터로 붙인 거라 생각했던 천후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간혹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 가족끼리 운영한다고 고용계약서도 안 쓰고 무보수로 일하며 인건비를 절약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만 해도 그다지 건전한 운영태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건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에게 서포터 계약을 맺으란 식으로 소개를 해준 거면 모를까…. 이미 다른 계약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어떻게 된 일인지.
천후는 몇 년이나 의지해왔던 형인 고인규의 정신 상태를 진심으로 의심했다. 게다가 놀랄 것은 더 있었다.
천후는 면접에서 떨어져서 민간 일리미네이터 목록엔 등재되지 않았지만, 일단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로서의 자격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에 관련된 전산자료만 연동 받아 본 천후는 그녀의 이력서를 보고 입을 벌렸다.
[홍희주. 서포터 등급 : S. 거의 대부분의 탈것에 대한 면허 소지. 내, 외과 응급처치 가능. 각종 구조관련 자격증 소유. 세계 각국의 요리 자격증 소유. 그 외 가사실무 능숙. 부동산, 동산 재무관리 가능. 검술 상급. 한시적인 메인 퀘스트 디제스터 전투 참가 및 지원 가능.]
“세상에…. 희주 씨, S급 서포터였어요?”
요약되어있는 내용 아래로 그녀가 소지한 자격증이 거의 한 페이지 빼곡하게 적혀있었는데, 대충 쓱 훑어봐도 ‘못하는 것 따위 없음’이라고 써있는 것과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포터에도 등급이 있는데, 일리미네이터 활동을 얼마나 잘, 전 방위적으로 보조해줄 수 있느냐로 갈렸다. 그녀는 그 등급에서 최고등급을 받은 것이다.
이 정도라면 솔직히 서포터 활동 안하고 다른 일 무엇을 해도 고수익자로 살 수 있고, 서포터로서의 몸값도 부르는 것이 값이리라.
까놓고, 천후에겐 과분하다.
“으…. 그럼 일단 월 300에 디제스터 퇴치보수 실수령액의 10%. 그리고 5회 이후에는 재협상 하는 걸로….”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 무리 아니예요!”
“…….”
현 자산이 현금 2천만 원이 끝인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하자 과연 희주도 약간 안색의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가 보기에 그의 행동은 ‘저는 근시일내에 집을 처분해 보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외치는 격이었지만, 천후의 뜻을 꺾을 수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출이라도 받아서 프리랜서로 뛰어야하나….’
진지하게 그 생각을 떠올린 천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한, 두 달 내에 답이 안 나오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유그드라실에서 저리 대출도 취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품어보았던 천후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일단 좀 더 최선을 다해본 이후다. 어쩌다보니 월세 300짜리 임대주택에 살게 된 꼴이란 것도 지금은 당장은 어떻게든 떨쳐냈다.
“이…일단 이건 어느 정도 정리됐다 치고. 집에 뭐 부족한 건 없나요?”
“부족한 건…. 다른 건 없습니다만, 식료품이 약간 부족합니다.”
“먹을 거요? 음…. 그럼 사러 가죠. 겸사겸사 바람도 좀 쐬게.”
어제부터 지금까지 멘탈적인 데미지가 너무 쌓였다. 이럴 땐 상황이 안 좋다고 집안에만 박혀 있어봐야 머리만 아프다 생각한 천후는 일단 뭐가 됐던 밖에 나가보기로 했다.
희주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 외출준비를 하겠습니다.”
*
장을 보러 천후와 희주가 향한 곳은 근처의 대형마트였다. 이 근방에는 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형마트 두 개가 나란히 서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외국기업인지라 단합도 이뤄지지 않아서 진정한 출혈경쟁이란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 중 외국기업 쪽은 출입할 때 회원카드를 받는 지라 다른 쪽으로 들어간 천후는 그 규모에 놀랐다. 마트 하나가 몇 층 규모나 된다니?
“와아….”
“이런 곳엔 처음 와보십니까?”
“와보긴 했는데…. 쇼핑하러오긴 처음이네요. 느긋하게 둘러본 적이 없었어요. 신기하네.”
“…….”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한지 쇼핑카트를 조금 빠른 속도로 몰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희주는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겹쳤다.
“오늘 이후로도 시간이 나신다면…다른 곳도 데려가주시겠습니까?”
“네?”
“…보기 좋습니다.”
자기 얼굴을 올려보며 하는 말에 천후는 잠깐 얼굴을 붉혔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올려보고 있는데도, 굉장히 아름답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는지,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잠깐씩 멈춰 섰다가 아내나 여자친구들에게 한차례 혼나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제야 천후는 희주의 모습을 다시금 재대로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하지만, 하루사이에 조금 익숙해져서 자신만은 알아볼 수 있는 미소 섞인 얼굴.
그 아래로 흰색 반팔 단추 티셔츠와 체크무늬 치마가 안 그래도 앳된 그녀를 어린 학생처럼 보이게 한다. 딱히 요염하거나 유혹적이진 않지만 활동적인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묘하게 어울린다.
“하하. 희주 씨도 예쁘게 입고 나오셨네요.”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주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폭력 아닌 폭력을 당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주변에서 젊은 커플로 바라보는 눈빛을 한껏 즐기며 둘은 장볼 거리가 있는 지하로 향했다. 지하에서도 온갖 식품의 보고에 홀린 천후는 정면이 아닌 사방을 정신없이 돌아보면서 다녔다. 그 때.
퉁 하고 맞은편에서 오던 카트와 부딪히면서 카트를 밀던 사람이 그대로 뒤로 넘어져버렸다.
“꺅!!”
“앗! 괜찮으세요?”
여자 비명소리에 천후는 깜짝 놀라서 넘어진 사람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아아…. 드라이클리닝 오늘 했는데…. 대체 어딜 보고 다니시는 거죠?”
“죄, 죄송합니다.”
아닌 말이 아니라 정말 딴 데를 보고 카트를 밀고 있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여러 번이나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사과를 한 천후는 조심스레 그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죄송해요. 세탁비는 제가 드릴게요.”
“하아…. 됐어요. 앞으로 눈은 똑바로 앞을 보고 다니세…. 아니, 당신은?”
엉덩이를 손으로 털어내던 그녀는 천후를 보고서 놀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뭐지 싶어 똑바로 서서 그녀를 바라본 천후 역시 놀랐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웨이브 진 금발과 청색 눈동자. 그 아래로 내려가면 도도한 성격만큼이나 오뚝하니 높이 선 콧대와 작은 입이 보인다.
옷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한국인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볼륨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재킷 틈새의 넉넉함이 예사롭지 않다. 그 사이로 튀어나온 흰 셔츠의 굴곡은 지나가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어딜 보는 거죠?”
“아. 그게.”
그건 천후도 예외가 아니라서, 시선을 느낀 그녀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가슴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허리 아래로 길게 쭉 뻗은 커피색 스타킹에 감싸여진 다리도 한 차례 꼬이는데 그것이 또 침 넘어가게 만든다.
한편 천후의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본 여자는 오히려 가드를 풀어버리더니만, 그의 코 앞 까지 다가와서 그를 올려보았다.
“이런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허언증 환자씨. 이제는 성희롱까지 해?”
“…….”
그녀는 어제 면접장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그를 책망했었던 금발의 면접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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